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㉞/ 전후 황금기12(다이에이)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㉞/ 전후 황금기12(다이에이)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0.08.27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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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에이를 이끈 개성 강한 문학가 기쿠치 간(사진 왼쪽). 그와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와의 관계, 다이에이 영화사를 담은 책 ‘기쿠치 간과 다이에이’의 표지(오른쪽). 저자는 기쿠치 간의 손자 기쿠치 나츠키(菊池夏樹)다. 기쿠치 칸은 문예춘추사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초대사장 기쿠치 간(菊池寬)의 다이에이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일본 영화 역사상 최고의 해라고 불리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국적으로 7,500여 개의 영화관이 있었고 관객수만 해도 11억 2,700만 명에 달했다. 연간 제작 편수는 평균 500-~600편에 이르렀으며 당시(1958년) 상영된 전체 영화 중 일본 영화가 75퍼센트를 차지하는 등 자국 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응은 실로 대단했다. 

이중 6대 메이저 회사 중에 다이에이(大映)는 초대 사장인 기쿠치 간(菊池寬)의 분위기가 전후에도 느껴지는 영화사였다. 기쿠치 칸은 문예춘추(文藝春秋)를 창간하고 일본문예가협회를 설립하였으며 아쿠타가와상(芥川賞)과 나오키상(直木賞)을 제정한 이로, 한 때 조선문예부흥에도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는 호치(報知) 신문 객원으로 일했으며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등 신진 문학자에게 기회를 부여하여 일본 문단의 시원(始原)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전후에도 멜로 드라마와 ‘모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게 된다. 

물론 훗날 황금기 이후 부도를 맞아 가도카와(KADOKAWA)픽처스에 흡수가 되어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5대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였던 다이에이(大映)를 인수한 가도카와픽처스는 다이에이의 라이브러리 약 1600편과 가도카와픽처스가 제작한 100편 등 총 1700편의 일본영화 라이브러리를 보유, 황금기 다이에이를 빛낸 작품들을 다운로드 서비스 하고 있다. 

이 영화사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의 ‘라쇼몽’(羅生門, 1950)’이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의 ‘우게쓰 이야기’(雨月物語, 1953) 같은 예술적 명작뿐만 아니라 ‘대괴수 가메라’(大怪獸ガメラ, 1965), ‘자토이치’(座頭市, 1962) 같은 대중 영화도 제작한 회사였다. 

나가타 마사이치라는 독특한 이력의 인물
그들은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과 차별성을 갖기 위해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 사장의 지휘 아래 멜로드라마로 전후 황금기를 연다. 나가타 마사이치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따라 붙는데, 다이에이 전성기 시절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회장이면서 ‘도쿄 오리온스’(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에서 개명) 구단을 보유하기도 했다. 훗날 1969년 신격호의 일본 롯데와 스폰서 계약을 체결한 후 팀 이름을 ‘롯데 오리온스’(현재의 지바 롯데 마린스)로 변경한 이후 초대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사이치는 사재를 털어 홈구장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도쿄도 곳곳을 둘러본 결과 아라카와 구에 새 야구장을 짓기로 결정한다. 

당시 다이에이는 영화 산업의 사양화 등으로 경영난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구장은 속전속결로 착공(1961년 7월) 1년이 채 되지 않은 1962년 5월에 준공했는데 바로 그 유명한 도쿄 스타디움(東京スタジアム)이다. 이러한 독특한 이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시리즈 물’이라는 연속성을 갖고 황금기 다이에이를 이끈다. 

그리고 전쟁 전 교토(京都)에서 활약하던 이나가키 히로시(稻垣浩)와 이토 다이스케(伊藤大輔) 등 베테랑들이 뛰어난 현대물들을 제작하는 한편, 시대극에도 힘을 써서 세계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일본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서민적 이미지의 배우 ‘와카오 아야코’(若尾文子)라는 걸출한 전속 간판 배우를 보유하고 250여 편의 영화에 주조연으로 출연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영화를 공부한 마스무라 야스조(増村保造)와 20여 편의 작품에서 자기 욕망의 주체로서 아름답고 관능적이며 강인한 여성상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기까지 한다. 이로 인해서 일본 누벨바그는 ’다이에이‘가 원조라는 역사적 자취를 남기게 된다.

다이에이는 ‘모성애’를 다룬 작품들을 선호하였는데 전후 손수건을 적시는 이러한 작품들은 수많은 전쟁 미망인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역시 1949년부터 1958년까지 배우 미마스 아이코(三益愛子)를 전면에 내세운 이른바 홈 드라마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어머니 영화(母もの)’일 것이다. 

감독 헨리 킹(Henry King)의 1937년 작품 스텔라 댈러스(Stella Dallas)의 한 장면, 오른쪽은 포스터.

물론 이 시리즈물들을 일본의 영화사 다이에이가 맨 처음 기획한 것은 아니다. 영화 모정(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1955)으로 잘 알려진 감독 헨리 킹(Henry King)의 1937년 작품 스텔라 댈러스(Stella Dallas)가 기본 텍스트였다. 딸의 사회적 진출을 위해 자신을 극단적으로 희생하는 무식하고 소박한 어머니가 등장하는 이 영화는 고통에 직면하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한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형의 영화들은 지금도 많이 제작되고 있으며 자식의 입신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애써서 무정한 척을 하는 구태의연하면서도 인상 깊은 강인한 어머니상은 모든 여배우들의 맡고 싶은 배역이기도 하다. 이 시리즈의 최초 영화는 모리 가즈오(森一生)의 ‘산고양이 영애’(山猫令嬢, 1948)로부터 출발한다. 영애(令嬢)란 ‘따님’을 뜻하는 말인데 딸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가난한 어머니에 관한 스토리로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하여 1950년대 후반까지 무려 31편이나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일본 영화역사에서는 이러한 어머니 영화의 이론적 종지부를 거장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의 적선지대(Street of Shame, 赤線地帶, 1956)로 보기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여성의 고통과 희생을 그린 멜로드라마가 그의 전공이요 특기였기 때문이다.

‘적선지대’란 다름 아닌 ‘수치의 거리’다. 한 마디로 ‘사연 없는 여인은 없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던진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가 사연이 있다. 창녀가 되었지만 말이다. 결핵에 걸린 남편과 갓난아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보석금을 위해서, 늙고 병든 노부모와 아들의 출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인들의 삶은 돌고 또 돈다. 

비극적인 창녀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여인이 생기는 반면 그 길에 처음 접어드는 여인도 생긴다. 그녀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들과 사회의 시선은 매우 냉담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직면한 여인들은 절망하고 꿈이 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결국은 인생(人生)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나면 매우 쓸쓸해진다. 미조구치 겐지는 이러한 동정 없는 여인의 삶을 롱 테이크로 묘사하면서 여성의 수난사를 모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제니가타 헤이지(銭形平次) 시리즈물

일본의 국민 탐정 제니가타 헤이지(銭形平次)
다른 한 축으로는 앞서 말했듯이,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힘을 쏟은 시대극(時代劇, 지다이게키)이다. 교토의 베테랑들이 만들어내는 다이에이의 시대극은 역시 시리즈로 발표 되었는데 당대 미남 배우인 이치카와 라이조(市川 雷藏)와 대조적 분위기의 개성파 배우 가츠 신타로(勝新太郎) 투톱을 정점으로 다이에이의 간판 와카오 아야코의 서민적이고 복스러운 이미지가 어우러져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 낸다. 

이중 가장 대표적 작품으로는 하세가와 가즈오(長谷川 一夫)의 ‘제니가타 헤이지 체포록’(銭形平次 逮捕錄, 1951-1961)을 꼽을 수 있다. 이 체포록(逮捕錄) 시리즈는 수많은 탐정들이 등장하는데 현대물로는 명탐정 코난도 이 범주를 현대물로 바꾼 것에 불과할 정도다. 가장 오랜 기간 사랑받은 일본의 국민 탐정 제니가타 헤이지, 그는 에도를 대표하는 최고의 탐정으로써 인연에 얽힌 온갖 난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헤이지 시리즈는 원작 소설은 물론 이거니와 현재까지 대략 383편의 원작 시리즈이면서 20여 년간 888화로 재탄생한 TV드라마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약 20년간 TV드라마로 방영되었으며, 라디오드라마, 영화, 연극 등으로 소개되기도 한 ‘제니가타 헤이지 체포록’은 ‘제니가타’로 이름을 바꾸거나 현대물로 바꾸면서 수많은 탐정물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물론 이 시절 다이에이의 영화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뜬금없이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지옥문(地獄門, 1953)이 이스트먼 칼러 필름으로 제작되어 1954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자 갑자기 신파극(新派劇)을 컬러로 제작하기도 했다. 로맨틱하고 신비로운 독특한 세계를 창조했던 작가 이즈미 교카(泉鏡花)의 원작 4편을 인형 같은 여배우 야마모토 후지코(山本 富士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오랫동안 일본 멜로 드라마의 중심으로 있었던 신파극을 통해 향수를 자극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장르는 심지어 사무라이 장르의 거장인 미스미 겐지(三隅研次)의 ‘부계도’(婦系図, 1962)까지 만들었지만 일본영화 역사에서 신파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미스미 겐지는 피가 난무하는 사무라이 극을 만들면서도 시적이고 추상적인 감성을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인물에 깊이를 더하고 역사적 디테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1960년대 말 즈음엔 '리틀 미조구치'라는 별명을 얻었다(근현대 영화인 사전에서 발췌). 

사실 미스미 겐지(三隅研次)는 ‘찬바라’(チャンバラ 혹은 ちゃんばら, 칼날이 부딪히고 피가 흩뿌려지는 액션 중심의 검술영화)영화의 대가였다. 그것도 B급 찬바라 영화를 잘 만들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사무라이가 사람을 막 베어 죽이고, 성적 쾌락을 탐하는 막나가는 내용들이 대부분인데 명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부패한 사무라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경력 초기부터 B급 찬바라 영화로 자신의 길을 확고히 했던 그는 일본영화역사의 첫 70mm 대작 프로젝트를 맡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배우 이치가와 라이조(市川雷蔵) 주연의  일본영화역사상 마지막 신파작품을 만든 인연으로 명콤비가 되어 ‘무숙자’(無宿者 On the Road Forever, 1964)라는 명작영화를 탄생시키게 된다. 악의 화신인 아버지와 정의를 대표하는 아들, 부자간의 대결로 아버지는 아들의 칼에 맞기 전에 자기 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스스로 찔러 죽음을 택한다. 아들이 자기를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자결을 택한 것이다. 

다이에이에서 8편을 연출한 미조구치 겐지 감독(오른쪽). 작은 원사진은 야마모토 후지코.

다이에이서 8편 영화 연출한 미조구치 겐지
그러나 이 시기 다이에이를 이끈 주역은 무엇보다도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다. 그는 생애를 마감하기 까지 8편의 작품을 다이에이를 통해 남기고 간다. 이중 유작이 된 ‘적선지대’를 제외하고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 1953), ‘산쇼다유’(山椒大夫, 1954) 같은 걸작 중의 걸작이면서 미조구치 겐지가 아니면 못 만들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이중 우게츠 이야기는 그가 일본의 회화 그리고 전통적인 두루마리 그림인 ‘에마키모노(’絵巻物)를 통해 일본적인 공간 구성미의 이상적인 표현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에마키모노는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그림의 형식으로, 가로 방향에 긴 일본 화지나 비단을 수평 방향에 접속해서 장대한 화면을 만들고, 정경이나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표현(다음 백과사전 발췌)한 것이다. 

‘산소다유’는 신유교주의(新儒敎主義)적인 원작을 불교적 무상관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으로 감독의 자전적인 면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미조구치 최고작들은 대부분 오랜 조력자이자 영화 동료인 시나리오 작가 요다 요시카타(依田義賢)와 여배우 다나카 기누요(田中絹代)와 함께 했다. 그리고 말년에 ‘오하루의 일생’(西鶴一代女, 1952),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 1953), ‘산쇼다유’(山椒大夫, 1954)로 베니스영화제에서 3년 연속 수상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 시기 다이에이를 평가하자면 주옥 같은 명작들을 남겼고 국제영화제에서 수많은 수상의 영광도 누렸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경험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경영상태가 좋지 않았다. 1942년 일본 정부가 신코(新興)·다이토(大都)·닛카쓰(日活)등의 영화사를 통합하면서 발족된 다이에이는 1950년대에 컬러 영화의 선두주자였고 대형 화면의 영화를 제작하는 회사로 전환했는데도 경영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결국 1971년 12월에 도산하고 만다. 

그러나 다이에이의 이러한 시도들과 모성애를 다룬 영화나 여성영화들은 전후 삶에 지친 일본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국제영화제의 쾌거들은 도쿄타워의 등장 만큼이나 위로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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