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한국 땅에 묻힌 혁명가 가네코 후미코
탐방기/ 한국 땅에 묻힌 혁명가 가네코 후미코
  • 노운 작가
  • 승인 2020.09.10 16: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관.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훈장증이 그녀의 공적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녀의 이름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박열(1902~1974)의 일본인 아내이자 여성 혁명가다. 훈장증은 이렇게 적혀 있다. 

“위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다음 훈장을 추서합니다.”
건국훈장 애국장. 2018년 11월 17일 대통령 문재인

훈장증이 보관된 장소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자리 잡은 박열의사기념관. 박열의 고향이 문경이다. 박열 선생은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기념관 인근 산기슭에는 남편의 고향 땅에 묻힌 가네코 후미코의 묘가 있다. <글, 사진=작가 노운> 

문경 ‘박열의사기념관’을 찾아가다
최근 문경을 방문했다가 미뤄뒀던 박열의사기념관을 들렀다. 점촌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외진 마을, 만만찮은 거리였다. 기념관 입구에 도착하자 택시기사가 한마디 건넸다. 

“돌아갈 때는 어떻게 가시게요?”
“버스로 가야죠”
“여긴 버스 안다니는데요”
“아, 그래요.”

잠시 머뭇거렸다. 기사가 한마디 더 했다. “얼마나 둘러보시게요. 30~40분이면 됩니까? 나갈 때 다른 택시를 불러야 할텐데. 제가 기다려 드릴까요.”

영화 '박열'(이재훈, 최희서 주연, 감독 이준익) 포스터가 붙은 기념관 입구.

“그럼, 좋죠.” 한숨을 돌렸다. 기념관 입구에는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는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을 통해 대중들에게 재조명됐다.

멀리서 보기에도 기념관은 웅장했다. 서서히 기념관으로 걸어들어 갔다. 초입에 초가집이 있는데, 박열 선생의 생가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안내판 글을 옮겨본다.

<이곳은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했으며, 1923년 일본 왕자 히로히토를 암살하려 한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가 태어난 집터이다. 2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1946년 1월에 열린 ‘신조선건설동맹’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0월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이라는 기구를 만들고 단장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귀국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박열은 1974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북한의 발표에 의하면 당시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회장이었다고 한다.>

박열의 생가터.
기념관 로비의 박열 동상. 왼쪽 한자는 조소앙이 쓴 글이다.

일제 재판정에서 위연했던 아나키스트 부부
코로나 탓에 기념관 안은 관람객이 전혀 없었다. 필자 혼자였다. 먼저 열체크를 했다. 기념관 로비에서 책을 무릎에 놓고 앉아 있는 박열 선생의 동상과 마주했다. 조소앙(1887-1958) 선생이 쓴 글도 보였다. 
 
 打倒天皇之先鋒(타도천황지선봉)
 開闢民主之建物(개벽민주지건물)
 (천황을 타도하는 선봉에 서고, 민주를 개벽하는 건물이 되다.)

1층 전시관 내부를 둘러보다 가장 먼저 눈길이 갔던 자료가 위에서 언급한 문재인 대통령의 훈장증이다. 뒤늦은 서훈이지만 다행이다 싶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2018년 11월 17일 훈장 서훈을 받았다. 
전시실 안내판에 소개된 가네코 후미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인 가네코 후미코는 1912년부터 조선에서 7년간 살았다. 그런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가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감동해 동지애로 묶이게 된다. 

1926년 4월 대역사건(폭탄 투척 모의 혐의)으로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영화에서도 소개됐지만, 사형이 선고되자 가네코 후미코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전시관은 박열이 판사를 향해 내뱉은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재판장! 자네도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박열 소개 안내판.

부부는 이례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훗날 두 사람이 옥중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큰 파장을 불러오기도 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23일 도치기현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의문사했다. 일본은 자살로 발표했다. 당시 23세에 불과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형무소 생활을 했다. 해방 후인 1945년 10월 27일에야 자유의 몸이 됐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도운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 

박열은 평양, 가네코 후미코는 문경에 잠들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은인이 있다.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다. 1층 전시실엔 그에 대한 자료도 갖춰져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무죄를 주장했던 그는 옥중결혼 수속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수습한 것도 그였다.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 받았다. 

가네코 후미코의 묘.

아내가 사망하자 박열은 고향에 있던 형에게 부탁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문경 선산에 안장하도록 했던 것. 그렇게 그녀는 문경 주흘산 자락 팔영리 중턱에 잠들었다. 그러다 2003년 박열의사기념공원으로 옮겨왔다.

그런데 박열의 묘는 여기 없다. 1974년 1월 17일 북한에서 사망한 박열의 묘는 평양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기념관에서 나와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으로 향했다.  잠시 서서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홀로 남겨진 무덤이 애잔하고 쓸쓸했다. 

시간을 보니 택시기사와 약속한 40분이 다 되었다. 기사는 이미 시동을 건 채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기사님, 문경새재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택시 기사는 필자를 기다린 40분 비용은 따로 받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