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미국 리포트/ 뿌리 깊은 ‘차이나 포비아’
생생 미국 리포트/ 뿌리 깊은 ‘차이나 포비아’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0.09.17 2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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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중국철도 노동자들의 모습.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중국인들이 신대륙으로 넘어 오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차이나타운들은 대만(중화민국)과 중공(중화인민공화국)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공내전 이후 대만과 중국은 거의 반세기 이상 체제 경쟁을 했고 전 세계 차이나타운들은 이른바 ‘깃발 경쟁’을 했다.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의 건국일은 일명 ‘쌍십절’인 10월 10일, 중국(中華人民共和國, People's Republic of China)은 10월 1일이 건국일이다. 이때마다 차이나타운은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라고 불리는 중화민국(대만) 국기와 중국(중공)의 오성홍기(五星紅旗)중에서 어느 국기를 더 많이 거느냐를 놓고 사활을 걸었다. 

미국은 최근 들어서 이러한 경향이 심화 되었지만 비동맹 국가가 많고 화교사회가 성장했던 동남아시아 지역은 그 대립이 엄청났다고 한다. 미국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은 중국세가 강하지만 이곳 로스앤젤레스 차이나타운은 대만세가 강하다. 

차이니즈아메리칸박물관.
로스앤젤레스차이나타운 야경.

참고로 뉴욕 차이나타운의 경우는 홍콩 등 광동성 출신이 많다. 따라서 ‘광동어’를 쓰는 사람이 주류이기에 최근 본토 이민자들과 언어소통이 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입장은 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나타운마다 역사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그 시각은 대만이냐 중국이냐에 따라 20세기 편이 다를 뿐 19세기는 대체적으로 동일한 견해가 기술되어 있다. 

청나라 말기는 통제 불능의 상태였고 부패한 국가와 관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억압하는 구조였던 까닭에 다수의 한족들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으로 ‘자발적’ 집단 이주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골드러쉬’(Gold Rush)는 중국인들에게 매력적인 요인
그럼 왜 미국이었을까?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3가지를 선호한다. 금, 빨간색 그리고 숫자 ‘8’이다. 이들은 이 3가지에 집착한다. 이제 이해가 가는가?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그 이듬해부터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노다지를 꿈꾸며 미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금광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대체해 나가기 위해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골드러쉬 이후에는 동서간 철도부설로 일자리를 옮겨 가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차이나 포비아’가 형성 되었을까? 

우선 백인우월주의 국가였던 미국인들이 볼 때 중국인과 흑인들은 너무 달랐다. 우선 흑인들은 ‘인신매매’를 통해 끌려 왔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건너 왔다. 흑인들은 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기 언어’가 통일되지 않아 공용어인 ‘영어’를 정착시키기 편했지만 중국인들은 ‘중국어’를 고수했다. 

흑인들은 말 그대로 ‘주는 대로’ 식사를 했지만 중국인들은 주식이 ‘쌀’이었고 중국음식을 먹었다. 흑인들은 농장주를 따라 일요일이면 예배도 함께 드렸고 2-3대째 단순노동이나 허드렛일에 익숙해지고 백인들에게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었지만 중국인들은 유교나 불교도였으니 개신교 국가인 미국의 종교를 받아들일 일도 없었고 순응도 하지 않았다. 다산(多産)이어서 인구의 증가를 통해 미국 곳곳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러나 때마침 중국인들에게 ‘강적’이 등장했다.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아일랜드에서 집단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흑인도 중국인도 아닌 값싼 ‘백인 노동자’들의 유입이 이뤄진 것이다. 

중국이민제한법 통과를 촉구하는 신문 삽화(왼쪽). 오른쪽은 중국이민법을 통과시킨 일리노이주 포스터.

제2차 산업혁명의 여파
미국은 역사상 두 번 경제 리셋(reset), 즉 새로 시작함을 경험한 나라라고 표현한다. 1870년대의 경제위기로 첫 번째 리셋을,1930년대의 대공황을 겪은 후 두 번째 리셋을 경험하게 되는데 제프리 이멜트 GE 최고경영자는 이를 ‘그레이트 리셋’(Great Reset)이라고 표현했다. 

1869년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다. 서구열강들이 앞다투어 영토 확장에 몰두하는 동안 미국은 1870년 통일 완수 이후에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 독일과 함께 2차 산업혁명을 선도한다. 석유와 전기, 철도와 내연기관, 그리고 화학공업 등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전까지 농업국가였던 미국은 ‘철강과 석유산업’ 국가로 탈바꿈했다. 

‘철도 노동자 파업’ 등을 거치면서 중국인들에 대한 수요는 줄었지만 그들은 계속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때 칭기즈칸이 유럽을 침략한 이후 황인종이 백인을 위협한다는 ‘황화론’(黃禍·yellow peril)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들에게 중국인들의 집단 이주는 당연히 ‘포비아’(PHOBIA, 객관적으로 볼 때 위험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상황이나 대상을 필사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증상)를 불러 왔다. 당장 백인들의 집단견제가 일어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영화 '엽문4'.

영화 ‘엽문4’가 주는 교훈
1877년 백인들이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을 습격한 ‘샌프란시스코 반 중국인 폭동’이 발생했다. 영화 ‘엽문4’에 등장하는 CCBA(중국인통합자선협회)란 단체는 이 샌프란시스코 폭동 이후 중국인들이 백인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만든 자경단이다. 

영춘권 최고수 ‘엽문’은 아들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향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차이나타운 중회회관 사부들의 텃새다. 게다가 미국 이민국과 해병대와도 사사건건 대립, 무술대결까지 벌인다. 물론 픽션과 논픽션이 섞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차이나타운과 중국인 사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사실 ‘철도부설’ 같은 험한 일을 유럽인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19세기 말 당시로서는 ‘비인도적인 처사’였고 중국인들에게는 ‘인도적인 처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더 이상 중국인들을 원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일거리를 잠식해 나가자 결국 백인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1881년 시작된 캐나다 횡단철도 공사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불만 없이 가장 위험한 일을 할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상당수 중국인들이 밴쿠버로 이주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때다 싶었는지 미국 정부는 급기야 1882년 ‘중국인 제외법’(Chinese Exclusion Act)을 만든다. 

중국 출신 노동인구의 유입을 막는 한편 시민권 부여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러한 현상은 ‘차이나 포비아’가 그 출발점으로 21세기 미국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돈(MONEY)으로 자신들의 미국 내 영토를 급속도로 확장해 나가면서 위협적 존재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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