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의 ‘정치 스승’ 이야기
스가 요시히데의 ‘정치 스승’ 이야기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0.09.18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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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돈, 인맥 없었던 경험 거울삼아 좌우명으로
‘무파벌’ 관방장관 출신인 스가 요시히데(菅 義偉·71)가 일본 99대 총리로 임기를 시작했다.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 자민당 총재에 이어 총리로 선출된 건 일본 정당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아키타현의 딸기 농가에서 태어난 스가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다가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호세이대학 야간부)에 들어갔다. 정치인의 3가지 조건인 학벌, 돈, 인맥이 없었던 그는 요코하마 시의원에 당선되면서 그때의 경험을 거울삼아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意志あれば道あり)는 말을 좌우명으로 정했다. 

요즘 일본 정가엔 이런 스가 요시히데와 관련된 한 인물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다름 아닌 스가의 ‘정치 스승’이라는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静六:1926~2000)다. 스가는 3년 전인 2017년 8월 26일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번 주 나는 정치 스승으로 받드는 가지야마 세이로쿠 전 관방장관의 묘를 참배했습니다. 내가 중의원에 처음 당선(1996년)됐을 때, 가지아먀 세이로쿠 선생은 관방장관이었습니다. 그후, 파벌을 이탈해 총재 선거 출마 등에 행동을 같이 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나 소중히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가 요시히데 새 총리

인생의 고비 때마다 묘소 찾아간 정치적 스승
스가는 이바라키현 히타치오타(常陸太田)시에 있는 가지야마 세이로쿠의 무덤을 종종 찾았다. 언론에 “인생의 고비에는 반드시 찾아온다(人生の節目には必ず来ている)고 밝힌 바 있다. 스가가 언급한 가지야마 세이로쿠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국가공안 위원장, 통상장관, 법무장관, 관방장관, 자민당 간사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과거 가지야마는 다케시다 노부루(竹下登) 내각 당시 ‘다케시다파7부교’(竹下派七奉行)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다케시다파7부교는 1980년대 후반 다케시다 노부루와 가네마루 신(金丸信)이 결성한 ‘경세회’(経世会: 다케시다파)에서 다케시다와 가네나루 후계자로 지목됐던 일곱 명의 유력 정치가들을 말한다.

경세회의 회장 가네마루 신은 가지야마를 ‘대난세의 가지아먀’(大乱世の梶山)라고 칭했다. 또 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인 가지야마는 ‘무투파’(武闘派)란 별칭을 갖기도 했다. 

가지야마는 1,2차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는 전형적인 참모형 관방장관(1996~1997)으로 일했는데, 하시모토 보다 나이가 많았다. 하시모토는 그런 가지야마를 ‘가지상’(梶さん)이라고 불렀다.(이런 점은 아베 신조와 스가 요시히데 케이스와 비슷하다) 가지야마는 관방장관 시절, 오키나와의 후텐마(普天間) 미군 비행장 반환 합의에 진력했었다.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静六)는 이름의 마지막 한자처럼 ‘6’이라는 숫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한 예로 술(맥주)을 마실 때도 여섯 병을 한꺼번에 주문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면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반면 스가 요시히데는 체질적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6이란 숫자는 공교롭게 그의 사망과도 연결된다. 가지야먀는 2000년 교통사고 추돌 후유증으로 인한 폐쇄성 황달로 사망했는데, 사망날이 6월 6일이었다.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이상적인 관방장관’으로 여겨
내각 2인자 관방장관에서 새 총리가 된 스가 요시히데는 이런 가지야마를 ‘가장 이상적인 관방장관’이라고 여겼다. 스스로 파벌에 몸담았던 가지야마지만 스가에게는 “파벌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교훈을 일깨워줬다고 한다. 가지야마는 훗날 다케시다파, 오부치파(오부치 게이조)를 거쳐, 무파벌로 옮겨간다. 

가지야마가 오부치파에서 이탈한 건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였다. 당시 초선의원이던 스가 요시히데는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1937~2000)가 중심이 된 오부치파에 속해 있었다. 가지야마 역시 그랬다.

당시 오부치 게이조가 총재선거에서 나서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그런데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파벌을 이탈해 독자적으로 입후보했다. 한술 더 떠 스가는 “오부치 게이조를 추대하라”는 오부치파의 방침을 거역하고 가지야마를 옹립했다. 스가 역시 오부치파를 이탈했다. 

과거 가지야마에 이어 스가도 파벌에서 이탈
선거는 제3후보 신진 고이즈미 준이치로까지 나서면서 3파전이 됐다. 선거 결과는 오부치 게이조 225표, 가지야마 세이로쿠 102표, 고이즈미 준이치로 84표. 가지야마가 패하고 오부치 게이조가 총재로 선출, 총리가 됐다. 종전 ‘식은 피자’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던 오부치 게이조는 새로운 연호를 발표한 관방장관 출신이라는 점이 선거에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면, 1989년 1월 7일, 일본의 새로운 연호, 헤이세이(平成)를 발표하는 기자 회견장의 주인공은 당시 관방장관이던 오부치 게이조였다. 연호 발표로 국민들의 주목을 받은 오부치에게는 당시 ‘헤이세이 장관’(平成長官), ‘헤이세이 아저씨’(平成おじさん)라는 별명이 붙었다. 오부치는 이런 유명세를 등에 업고 1998년 7월, 가지야마 세이로쿠와의 경합에서 승리해 85대 총리에 올랐다. 

그 30년 뒤인 2019년 4월 1일, 스가 요시히데 당시 관방장관도 새 연호 레이와(令和)를 직접 공개했다. 그러면서 그 역시 ‘레이와 오지상(아저씨)’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오부치 게이조와 스가 요시히데는 연호를 발표한 ‘관방장관 출신 총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자신의 정치 스승에 대한 배려였을까?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이번 새 내각에서 가지야마 세이로쿠의 아들인 가지야마 히로시(梶山弘志) 경제산업장관(무파벌)을 연임시켰다.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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