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일본 지폐 주인공과 수덕사의 인연
탐방기/ 일본 지폐 주인공과 수덕사의 인연
  • 노운 작가
  • 승인 2020.10.06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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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 자락에 있는 수덕사의 대웅전

재팬올에 <이판사판 산행기>를 연재하는 노운 작가가 사찰 기행 글을 보내왔다. 백제시대 사찰인 수덕사(충남 예산군 덕산면)와 개심사(충남 서산시 운산면)다. 수덕사는 대웅전(국보 제49호)의 조형미가 빼어나다. 수덕사는 한국 불교 최고의 여승으로 불리는 일엽스님의 일화가 깃든 덕숭총림 사찰이다. 개심사(開心寺)는 여름~초가을에 배롱나무가 아름답다. 규모가 작은 절이지만 ‘마음을 연다’(開心)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개심사편과 수덕사편을 나누어 싣는다. 

(수덕사편)

<글, 사진=작가 노운>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1861~1926)가 조선에 아사히신문 촉탁 통신원(특파원)으로 건너온 건 1881년이다. 아사히신문 창간 2년 뒤였다. (아사히는 1879년 오사카에서 창간했다)

쓰시마 출신의 의사 아버지를 둔 나카라이는 이미 소년 시절을 부산 왜관에서 보낸 적이 있는데, 조선어가 가능했기에 아사히신문 통신원이 될 수 있었다. 

나카라이가 체재한 1887년까지 조선에서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이 일어났다. 지금이야 아사히신문이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사 중의 하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나카라이는 조선 사정을 보도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아사히신문 역시 판매부수가 단박에 늘어났다. 

춘향전을 일본에 최초 번역 소개한 아사히신문 기자
주목할 만한 건, 이 시기 나카라이가 <춘향전>을 번역해 일본에 최초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그는 『계림정화 춘향전(鶏林情話春香伝)』이라는 제목으로 1882년 총 20회에 걸쳐 아사히신문(오사카 아사히)에 춘향전을 연재했다.

이는 일본어로 번역된 춘향전의 효시이자 최초의 외국어 번역본이었다.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나카라이는 귀국 후, 소설기자로 아사히신문에 정식으로 채용됐다. 

31세가 되던 1891년, 나카라이에게 한 여성 소설가가 제자로 입문했다. 지금 일본 5000엔 지폐의 주인공인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 1872~1896)다. 일본 근대여성 문학의 선구자인 그녀는 「섣달그믐」, 「키재기」, 「가는 구름」, 「십삼야」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폐결핵으로 24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 5000엔 지폐권의 주인공인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나카라이와 히구치는 짧은 기간이지만 사제지간을 넘어 연인에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은 2004년 5000엔권 신권 삽화 인물로 이런 히구치 이치요를 선정했다. 여성으로는 신공황후(1881년 발행 지폐에 등장) 이후 123년 만에 두 번째다.(일본의 지폐 도안은 20년마다 바뀐다.)

일본 소설가 선구자 히구치 이치요 이름을 필명으로
히구치 이치요가 죽은 해인 1896년, 한국에서는 훗날 히구치 이치요의 이름인 일엽(一葉)을 필명으로 쓰게 되는 여성 선각자이자 일엽스님인 김원주(1896-1971)가 태어났다. 기독교 목사의 딸인 김원주는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파 출신의 문인으로 화가 나혜석(1896∼1949)과도 절친했던 신여성이다. 

덕숭산 수덕사 입구
수덕사 전경

김원주는 1920년 일본에서 귀국해 여성이 만든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자’를 창간했는데, 이때부터 신여성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혼, 스캔들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원주는 돌연 불교에 심취하면서 1933년 수덕사로 출가했다.

그녀는 만공선사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한국 불교 최고의 여승이 되었다. 일엽이라는 필명은 김원주가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춘원 이광수가 붙여줬다고 한다. 

국보 제49호 수덕사 대웅전은 조형미가 빼어나다.

이광수는 김원주에게 글 솜씨가 당시 최고로 뽑혔던 일본 작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와 비견될 만하다며 “‘당신은 한국의 일엽(一葉)이 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일엽스님은 1971년 76세로 수덕사 견성암에서 입적했다. 

수덕사-수덕여관, 일엽스님-나혜석-이응노 화백과 인연
수덕사 초입에는 일엽스님의 절친 나혜석이 6년간 살았고, 고암 이응노 화백이 구입해 작품활동을 했던 수덕여관이 자리하고 있다.

나혜석 역시 일엽스님을 통해 만공선사를 소개받고, 여승이 되겠다는 마음을 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파키슨병에 걸린 나혜석은 서울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다 1948년 12월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과 이응노 화백이 머물렀던 수덕여관
수덕여관 전경
이응노 화백이 프랑스로 떠나기 전 바위에 새긴 암각 글씨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백이 프랑스로 떠난 후 그의 부인이 지키고 살다가 이 화백의 큰 조카에게 물려주었고, 이후 수덕사가 여관을 인수했다고 한다. 필자는 나혜석과 이응노 화백의 이야기가 깃든 초가 지붕의 수덕여관과 일엽스님이 기거했던 절간(환희대)을 둘러보며 말없이 긴 생각에 잠겼다. 

국보 제49호 대웅전의 조형미 빼어나 

수덕사의 백미는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대웅전이다. 여느 사찰의 대웅전과는 사뭇 다르다. 좌우에 각각 3개의 빗살문이 있고, 중앙엔 그냥 문 없이 뻥뚫려 있다.

맛배지붕 형식과 외부로 들어올려 노출된 문은 한국 건축사에 보기드는 형태다. 대웅전 소갯글에는 “조형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중요한 건물”이라고 적혀 있다. 

예산의 예당호 일대는 어죽이 유명하다.

대웅전의 빼어난 조형미에 잠시 빠져있다 꽃무릇 만개한 수덕사를 나왔다. 슬슬 배가 고프다. 자, 이제 예산의 별미 어죽을 먹으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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