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㉟/ 전후 황금기13(쇼치쿠)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㉟/ 전후 황금기13(쇼치쿠)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0.10.0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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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하면 바로 떠 오르는 것이 '다다미 샷(tatami shot)'이다. 원래는 바닥에 앉아 있는 인물들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오즈의 스타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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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한때 한국영화계의 마케팅 공식이라는 게 존재했었다. ‘고졸 출신의 20-30대 여성관객’을 타깃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이들 여성층이 홈드라마나 멜로 드라마 혹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선호하면서 소비패턴을 선도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전후 쇼치쿠, 멜로 드라마와 서민극 강점
물론 1990년대 이야기다. 그러나 쇼치쿠(松竹)의 성공사례를 알게 되면 이해가 간다. 쇼치쿠 하면 떠오르는 건 바로 ‘멜로 드라마의 왕국’이었다는 점이다. 1902년 가부키(歌舞伎) 공연을 위한 회사로 설립한 이래 1931년 고쇼 헤이노스케(五所平之助) 감독의 일본 최초 유성영화 ‘이웃집 여자와 아내’(マダムと女房, 1931)를 성공시킨 이후 '멜로 드라마 선호'라는 쇼치쿠의 전통은 전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들은 여성 취향의 멜로 드라마와 서민극(庶民劇)에 강점을 보였다. 서민들의 훈훈한 인정을 담아내거나 오랜 할리우드 모방물 제작에서 축적된 노하우로 여성 취향의 멜로 드라마를 잘 만들어 냈던 것이다. 또한 쇼치쿠는 스타 시스템 보다는 ‘감독의 스튜디오’를 지향하는 영화사로 유명했다. 

후지산을 담은 쇼치쿠의 그 오래되고 친숙한 로고 샷은 지금도 이 전통을 이어오는 회사의 업력을 설명하는 것 같다. 오랜 세월 후지산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처럼 감독들 역시 그렇게 전통을 지켜왔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쇼치쿠는 특히 ‘전 일본 최초’라는 수식어를 좋아하는 영화사이다. 일본 최초의 유성영화, 일본 최초의 총 천연색 칼러 영화도 ‘쇼치쿠’의 몫이었다. 

사실 쇼치쿠는 가부키를 모방했다는 한계성 때문에 여자 역할을 하는 남자배우 즉 ‘온나가타(女形)’가 여자 배역을 대신했음에도, 과감하게 이 유리벽을 깬 회사이면서 전쟁 전과 전쟁 후의 여성상을 다양하게 그려낸 영화사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서민적인 인정(人情)을 주제로 한 여성 취향의 멜로 드라마 제작을 기본 방침으로 했다. 

이는 쇼치쿠의 산증인이자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한 기도 시로(城戸 四郎)의 제작 방침이기도 했다.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서른이란 나이에 전격적으로 쇼치쿠 가마타 촬영소의 소장이 된 그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감독, 조감독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는 한편 콘티를 그려가며 연구를 했다. 

이를 통해 신파극과 가부키의 전통을 털고 내용과 스타일 양면에서 ‘모던한’ 영화를 만들었으며 메이저 영화사들 중 배우가 아닌 감독들의 스튜디오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선구자가 있었기에 쇼치쿠는 전후 황금기에 자신들만의 분명한 작풍을 완성시키고 기라성 같은 감독들을 양산해 낸다. 

오바 히데오(大庭秀雄)감독의 ‘당신의 이름은’(君の名は 1-3)의 포스터

쇼치쿠의 황금기를 빛낸 거장 오바 히데오 감독
이러한 쇼치쿠의 황금기를 빛낸 영화 중 일본미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오바 히데오(大庭秀雄)감독의 ‘당신의 이름은’(君の名は 1-3)은 총 3부작으로 전시에 우연히 긴자(銀座) 다리 위에서 이름도 모른 채 만난 남녀가 전후 혼란기를 겪으면서 일본 전역을 전전하면서도 계속 만나지 못하며 엇갈리기를 반복한다는 얘기다. 

마빈 르로이(Mervyn LeRoy) 감독의 ‘애수’(Waterloo Bridge, 哀愁, 1940)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도입부를 가졌지만 이름을 물어보지 못하고 운명 앞에 떠밀려 엇갈림 속에 내 던져지는 남녀의 애틋함이 일본 특유의 감수성을 그려낸 것으로 평가 받는다. 물론 이 3부작의 마지막이 관객을 위한 전국 관광지 안내로 막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훗날 감독이 ‘설국’(雪國, 1965)이라는 불후의 멜로 명작을 만들어 낸 감독이고 보면 이 영화가 1950년대 아시아 대표 멜로 영화 중 하나였다는데 동의하게 될 것이다. 

서민영화 3대 천황 오즈 야스지로, 기노시타 게이스케, 시부야 미노루
그러나 ‘감독의 스튜디오’답게 쇼치쿠에는 멜러 및 서민영화의 3대 천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 시부야 미노루(渋谷実)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 중 시부야 미노루는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한 코미디 ‘금일휴진’(本日休診, 1952)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북새통’(てんやわんや, 1950), ‘자유학교’(自由学校, 1951), ‘미치광이 부락’(気違い部落, 1957)같은 전후 일본사회의 가치관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일본 코미디 영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시부야 미노루 감독의 코미디 ‘금일휴진’(1952)

이중 ‘금일 휴진’은 일본 코미디 영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 내용은 전쟁으로 외아들을 잃은 미구모 병원의 야츠하루 선생은 조카 고스케를 원장으로 맞이해 새롭게 출발하며 맞이한 만 1년 기념일에 고스케와 간호사들이 온천으로 떠나게 되어 ‘금일 휴진’이라는 안내문을 걸면서 벌어지는 코미디다. 

야츠하루는 이 기회에 낮잠이라도 자려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다른 환자가 계속 찾아오면서 오히려 더욱 바쁜 날이 된다. 물론 이 환자들은 보통의 환자들이 아니다. 오랜 전쟁과 군 생활의 후유증으로 발작증세가 있는 유사쿠, 강도에게 당하고 소지품까지 빼앗긴 유코 등 다양한 인물들이 야츠하루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다.

기노시타 게이스케는 ‘순결함에 대한 연구자’로 표현 될 만큼 전쟁과 그로 인한 혼란을 어떻게 착한 마음을 가진 여주인공들이 극복 혹은 좌절하는지를 보여 준 감독이다. 물론 시대극, 코미디 멜로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감독이자 풍자 코미디와 휴먼 멜로 드라마에 강점이 있는 감독이었다.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의 일본 최초 칼러 영화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1951)

특히 인간에 대한 믿음과 낙관을 잃지 않는 시선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 감독이었기에 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일본인론’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후지 필름의 협력을 얻어 일본 최초의 칼러 영화인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カルメン故郷に帰る, 1951)에서 다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가 쾌활하고 청순한 스트리퍼를 연기했는데 사랑스러운 그녀의 ‘금의환향’이 매우 유쾌하게 그려진다. 

할리우드 멜로 영화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재즈 음악을 삽입하고, 슈베르트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우아하게 써서 앞서가는 시대 감각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늘 서정적인 리얼리즘을 밑바탕에 깔고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항상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기도 했다. 

‘스물 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는 작은 섬마을 분교에 부임한 젊은 여선생 오이시가 1928년부터 이후 20년 동안 겪는 일들을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스물 네 개의 눈동자’가 상징하듯 열두 명의 제자들의 전쟁 전과 전쟁 후는 상실과 슬픔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러나 이를 극복하려는 착한 여주인공은 관객들에게 큰 위로를 준다. 

‘기쁨도 슬픔도 세월 속에’(喜びも悲しみも幾歳月, 1957)는 등대지기 부부의 인생을 통해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으로 25년 동안 그들은 일본 전역의 10개의 등대로 이주하면서 두 명의 자녀를 키우고 여러 동료 및 가족과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한편 1932년부터 1957년으로 이어지는 ‘25년’간의 일본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아낸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도쿄 이야기’(東京物語, 1953)

오즈 야스지로는 ‘서민극’영화의 대가로서 주로 중하류층 일본 가정의 모습을 그려냈다. 물론 전쟁 직후 서민생활에 감도는 유머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겠지만 그는 전쟁 후 복잡해진 일본 사회와 ‘가족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했다. 가족 간의 상호관계가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영화의 주제였다. 

상세한 인물묘사를 통해 가족이 파괴되고 갈등하며 결국은 화해하고 완성되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 ‘만춘’(晩春, 1949), ‘맥추’(麥秋, 1951), ‘도쿄 이야기’(東京物語, 1953), ‘초봄’(早春, 1956) 같은 영화들이 이러한 맥락의 영화들이다. 다만 오즈 야스지로는 만춘 이후 주요 무대를 부유층 주택가인 가마쿠라(鎌倉; 도쿄 남서쪽의 해안 지역으로 역사적으로는 일본 막부정치의 발원지여서 많은 신사와 사찰을 가진 관광. 휴양도시)와 야마노테(山の手: 東京의 文京·新宿구 근방 일대) 지역 등 부르주아 가정을 통해 해체되어 가는 가정과 이에 대한 안타까움 등을 절제된 화면으로 잡아낸다. 

이중 도쿄 이야기(東京物語, 1953)는 도쿄에 사는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 노부부의 쓸쓸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오즈가 스스로 “멜로 드라마의 경향이 가장 강한 작품”이라 말했던 이 영화는 죽음마저도 평범하고 무상하게 그려낸다. 이 영화는 워낙 웰 메이드 영화이기 때문에 최근에 리메이크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오즈는 매우 서정적인 감독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다다미 샷(카메라를 앉은 키 정도에 맞추고, 롱 테이크로 잡아내는 촬영기법)’과 ‘비 오는 장면’을 피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이는 사실 알고 보면 워낙 돈을 적게 투자하여 큰 이익을 남기고자 했던 쇼치쿠의 전략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었다는 후일담이 전해 온다. 

워낙 잘 짜여진 구도와 절제된 대사로 더 이상의 편집이 불가했다는 것이 정설이며 특별히 이 영화를 통해 하라 세츠코(原節子)가 미망인이 된 며느리로 나와 전통적인 미덕인 정숙한 여인으로 연기변신에 성공하여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 전향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쇼치쿠 하면 당연히 ‘오즈 야스지로’라는 공식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허우샤오시엔(侯孝賢)을 불러 오즈에 대한 헌정영화 ‘카페 뤼미에르’(Café Lumière, 咖啡時光, 2003)를 만들게 한 것은 당연한 예우였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된 2003년은 오즈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재평가를 받고 있는 전설의 영화인 시미즈 히로시
마지막으로 언급 될 감독으로는 시미즈 히로시(清水宏)다. 오즈 야스지로에 가려져 최근에 재평가를 받은 감독인데 ‘여성영화의 원조’격으로 불리는 전설의 영화인이다. 무성영화기를 거쳐 35년간 총 166편의 영화를 연출하였으며 자유로운 고전기 모더니즘 영화의 형태를 제시(다음 백과 사전 참조)한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미조구치 겐지가 ‘천재’라고 칭한 감독이었다고 한다. 또한 오즈 야스지로와는 아주 친한 사이였는데 무척 다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오즈는 술마시길 좋아했지만 시미즈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오즈가 평생 독신이었던 데 반해 시미즈는 두번 결혼했다. 영화 연출이나 방향에 있어서도 두 사람의 스타일은 상이했다. 

오즈가 시선을 가정 내에 두길 좋아했던 데 비해 시미즈는 집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즐겨 다루었다고 한다. 게다가 치밀하게 영화를 준비하고 미장센을 디테일하게 하며 카메라를 거의 고정시키는 오즈와 달리 시미즈는 정반대의 방식을 선호했다. 한 마디로 자유로운 연출방식을 좋아해서 자유자재로 카메라를 움직이고 때로는 즉흥적이기도 했다.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아리가토 상’(1936)

이미 로드 무비인 ‘아리가토 상’(有りがたうさん, 1936)으로 스튜디오 밖을 더 선호한다는 자신의 스타일을 구사했던 감독이었기에 야외 촬영을 선호했다. 그의 영화는 중심인물이나 뚜렷한 플롯 없이 소소한 이야기를 다룬다. 오늘날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시미즈 감독의 영화와 많이 닮았다. 예측 불가능성, 카메라 움직임의 자유, 소재의 반복, 생략과 구두점, 플롯 없음, 전복적인 커플의 등장(미국 평론가이면서 에딘버러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인 크리스 후지와라(Chris Fujiwara)의 견해) 등 요사이 영화 팬들에게 익숙한 공식이다. 

그는 1956년 다이에이로 소속을 옮기기 이전까지 황금기에는 때로는 독립영화사인 자신의 ‘벌집 프로덕션’을 통해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후기작으로 아동영화를 만들어 냈다. 사실 그는 감독의 스튜디오라는 쇼치쿠의 이단자 중 한 명이었다. 1943년 대만에서 ‘세욘의 종’(サヨンの鐘, 1943)을 촬영하던 중 쇼치쿠로부터 난폭한 성격 탓에 해고 통보를 받은 바 있었다. 

그는 실제로 전후 자신의 농장에서 전쟁 고아들을 돌보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아동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었다. 츠보타 죠지(坪田讓治)의 아동문학을 영화화한 ‘바람 속의 아이들’(風の中の子供, 1937), ‘아이들의 사계’(子供の四季, 1939), ‘아이들의 사계-가을, 겨울 편’(子供の四季 秋冬の巻, 1939) 등의 걸작과 함께 ‘벌집의 아이들’(蜂の巣の子供たち, 1948)과 ‘벌집의 아이들, 그 후’(その後の蜂の巣の子供達, 1951)를 원폭으로 파괴된 히로시마 로케이션으로 촬영했다. ‘오하라 소스케 상’(小原庄助さん, 1949)과 ‘시이노미 학원’(しいのみ学園, 1955) 등의 걸작도 남긴다. 그는 쇼치쿠와는 잘 맞지 않는 감독이었지만 ‘감독의 스튜디오’라는 쇼치쿠가 낳은 감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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