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거인 가다/ ③이건희와 일본
한국 반도체 거인 가다/ ③이건희와 일본
  • 정희선 일본대표
  • 승인 2020.10.26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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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의 기폭제가 된 후쿠다 보고서를 쓴 후쿠다 타미오 전 삼성 고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78)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타계했다.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5개월 만이다. 1988년 아버지 이병철의 뒤를 이어 수장에 오른 이건희 회장은 병상 기간을 포함해 32년간 회장직에 있었다. 이 회장의 타계는 개인적인 죽음을 넘어 한국재벌 ‘2세 경영’의 막이 내렸음을 의미한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세습 과정에서 삼성의 ‘명암’은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건희의 경영철학이 ‘비즈니스 교과서’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년기부터 회장 시절까지 ‘인간 이건희’를 만든 3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의 마지막 삶을 되돌아 본다. <편집자주> 

<글 순서>
①편 이건희와 논어(이재우 에디터/ 재팬올 발행인) 
②편 이건희와 영화(이훈구 작가/영화 제작자 겸 재팬올 미국대표) 
③편 이건희와 일본(정희선 기업 애널리스트/ 재팬올 일본대표) 

<도쿄=정희선 기업 애널리스트(재팬올 일본대표)>일본 언론들도 이건희 회장의 별세 소식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이 회장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가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존경했다”고 전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는 마쓰시타전기(현 파나소닉) 창업주로 일본에서는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경영자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987년 회장에 취임한 후 삼성을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키워냈다”고 평가했다.

일본과 인연 깊은 이병철~이건희 삼성 집안
선대 이병철 회장 때부터 삼성과 일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병철의 경우, 한국이 해방되기 전부터 자주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했고, 해방 후인 1950년 2월에는 15명으로 구성된 일본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어느 날 이병철은 도쿄 아카사카 뒷골목을 걷다가 한 이발소에 들어갔다. 가게의 간판은 모리타(森田). 40세 전후의 주인에게 이병철이 말을 건넸다. 

“이발 일은 언제부터요?”
“제가 3대째니까 가업이 된 지 이럭저력 60년 쯤 되나 봅니다. 자식놈도 이어 주었으면 합니다만...”

이병철은 “특별한 뜻이 없는 잡담이었지만, 예삿말로 들리지 않았다. 패전으로 완전히 좌절되어 있어야 할 일본인인데, 참으로 담담하게 대를 이은 외길을 살아가고 있다. 그 투철한 직업의식에 놀랐다”고 적고 있다.   

또 이병철이 매년 새해를 도쿄의 오쿠라호텔에서 보낸 일은 유명하다. 이병철은 1979년 신라호텔을 개관하고 오쿠라호텔에 위탁경영을 맡기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 홍진기 전 장관(법무장관, 내무장관)의 딸인 홍라희 여사와 첫만남(1966년 8월)을 가진 것도 오쿠라호텔이었다.
 
무엇보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일명 프랑크푸르트 선언)도 오쿠라호텔에서 비롯됐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도 일본인이었다. 그 주인공은 교토섬유공예대학 명예교수인 후쿠다 타미오(福田民郞)다. 
 
1948년생인 후쿠다 타미오는 미국 일리노이공과대학원에서 디자인을 공부했고, NEC 디자인센터, 교세라 디자인실 경영전략팀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 그런 그를 1989년 이건희는 일본 전자업체의 선진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삼성전자 정보통신 부문 디자인 고문으로 영입했다. 신경영 선언 발표와 관련해 『삼성가의 사람들 이야기』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993년 1월 이건희는 삼성의 전자 관련 사장단을 이끌고 LA 시내의 가전제품 매장을 둘러보다가 아연실색했다. 매장 중앙에는 GE, 월풀, 필립스, 소니, NEC 등 세계적 브랜드의 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삼성 제품은 눈에도 잘 띄지 않는 구석에 쳐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건희는 삼성의 현주소를 거기서 읽었다.>

신경영 선언 기폭제가 된 ‘후쿠다 보고서
이건희는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센트리플라자 호텔에서 78가지에 이르는 경쟁사 제품들과 삼성 제품을 비교하는 ‘전자부문 수출품 현지 비교평가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책은 이렇게 쓰고 있다. 

<LA에서 비교평가회의를 마치고 난 몇 달 후인 6월 4일,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에서는 이건희 회장 주재로 삼성전자 기술개발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후쿠다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 등 10여 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회의가 끝나자 이건희는 후쿠다 타미오 고문을 포함한 3, 4명의 일본인 고문을 따로 객실로 불러들였다. 이건희는 그날 삼성전자의 문제점을 지적해주는 그들과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후쿠다는 이건희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고 한다. 그는 삼성제품 디자인이 갖는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디자인 개혁을 이루지 않으면 삼성의 성장은 있을 수 없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심지어 후쿠다는 “삼성의 디자인 수준은 한마디로 수준 이하”이며 “자신이 삼성 고문으로 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책 인용이 이어진다. 

<후쿠다의  신랄한 비판은 이건희에게 또 하나의 충격을 안겨 주었다. 후쿠다는 뜻밖에도 이 자리에서 미리 준비한 삼성전자의 문제점을 담은 ‘경영과 디자인’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이건희 회장에게 전달했다. 이것이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이다.>

다음 날인 6월 5일 오후, 이건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후쿠다 보고서’를 펼쳐들고 몇 번이고 정독해 나갔다고 한다. 그 보고서는 ‘삼성이 디자인 개혁을 이루지 않으면 삼성의 성장은 있을 수 없으며 삼성전자가 하루빨리 디자인과 상품 기획 실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지적을 담고 있었다.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켄벤스키호텔에서 200여 명의 경영진들이 모여 비상경영회의가 열렸다. 이날 이건희는 “대변혁의 시대에 하루 속히 글로벌 스탠더드에 적응하지 못하면 삼성은 영원히 이류, 삼류로 뒤쳐지고 만다”며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경영 선언(일명 프랑크푸르트선언)을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후쿠다 보고서’는 ‘신경영 선언’의 기폭제가 됐다. 후쿠다 타미오는 세월이 지나 2015년, 한 인터뷰에서 삼성에  이렇게 주문했다. 

“지금은 1993년의 이야기는 잊어 달라. 신경영을 통해 달성한 지금까지의 성공 사례와 기억은 잊고, ‘리셋’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은 미래에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 삼성 전체가 진심으로 모색해 나가야 할 시기다.”(今は1993年の話は忘れてほしい。新経営を通じて達成したこれまでの成功事例や記憶は忘れて、リセットしなければならない。今では、未来に何をどうすればいいのか、サムスン全体が本気で模索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時期だ)

‘한국 반도체 개척자’ 이건희 회장의 타계는 일본 재계에도 많은 이야기를 낳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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