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영화 ‘명당’의 모티브... 예산 남연군 묘
탐방기/ 영화 ‘명당’의 모티브... 예산 남연군 묘
  • 노운 작가
  • 승인 2020.11.02 1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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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으로 알려진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자락의 남연군 묘.  남연군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다. 

재벌가는 명당에 민감하다. 선대의 묏자리가 기업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풍수지리설 때문이다. 10월 25일 타계한 삼성 이건희 회장은 용인 선영이 아닌 수원 선영에 묻혔다. 수원 선영은 풍수를 신봉했던 선대 이병철 회장이 땅을 매입해 부모와 조부모를 모신 곳. 용인 선영은 용인시 포곡면 호암 미술관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병철 창업주가 잠든 곳이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去龍仁: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라 했다. 용인에 죽은 자에게 편안한 명당이 많다는 의미다. 이병철 창업주 외에 역사적인 인물로는 고려말~조선초의 충신 정몽주, 조선 후기 정조의 개혁 지원자였던 영의정 채제공(용인시 역북동)이 용인에 묻혔다. 

재벌가의 명당지로 하남시 검단산도 빼놓을 수 없다. 검단산 인근에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의 묘가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명당설이 돌고 있다. 실제로 검단산엔 세종대왕능이 들어설 뻔했다. 여기엔 또 한 사람이 묻혀 있다. 

하남시 창우동 애니메이션고 방면에서 시작되는 검단산 등산로. 현충탑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등산로 왼편에 무덤 4기가 자리잡고 있다. 무덤의 주인은 조선 개화기 『서유견문』의 저자인 구당 유길준(초배, 계배 부부 합장묘)과 그의 가족들(부모와 장, 차남). 햇볕이 잘들뿐, 묏자리엔 묘비 외에 다른 석물은 없다. 이따금 등산객들이 무덤을 에워싼 철조망 계단에 앉아 쉬어가곤 한다. 

영화 ‘명당’(2018) 이후 명당에 대한 관심이 더 증폭됐던 게 사실이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곳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묏자리다. 필자도 뒤늦게 여기에 편승해 봤다. 지난 10월, 남연군 묘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를 찾았다. 

 

현대 정주영 창업주의 묘가 있는 하남시 검단산도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진은 같은 검단산 자락에 있는 유길준(조선 개화기 '서유견문'의 저자)과 그의 가족 묘.

<글, 사진=작가 노운> 충남 예산(신암면 용궁리)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고향이다. 김정희는 고종 황제의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과 친척 관계였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사이. 나이로는 김정희가 이하응보다 서른네 살 많다. 김정희에게 이하응은 조카이자 제자였다. 

추사 김정희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카이자 제자 사이
이하응의 아버지 이채중(훗날 남연군 ‘이구’로 개명)은 순조 15년, 후손이 없던 은신군의 아들로 입양됐다. 은신군은 사도사제의 아들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실인 혜경궁 홍씨 사이에 정조를, 후궁 임씨 사이에서 은언군과 은신군을 두었다. 이채중은 그 은신군의 제사를 지내는 아들이 되면서 남연군에 봉해졌고, 이름도 구(球)로 바꿨다. 낮은 벼슬을 지내다 49세에 사망하니, 그 넷째 아들(막내)이 이하응이다. 

김정희와 이하응의 족보 관계를 따져보자면, 이하응 아버지 남연군의 양어머니이자 은신군의 부인 남양 홍씨가 김정희의 어머니인 남양 홍씨(김정희도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실제는 큰어머니인 셈)와 친자매지간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이하응은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다. 김정희는 난초를 잘 그렸던 이하응의 그림을 보고 “압록강 동쪽, 조선에는 이런 그림이 없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당초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다. 그런데 풍수에 경도된 이하응은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것’(二代天子之地)이라는 지관의 말을 듣고 부친의 이장을 결심했다. 1846년 가야산 자락, 지금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묘를 옮겨 온 것이다.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 묘 안내판.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자락의 남연군 묘
이장지는 원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던 자리다. 영화 ‘명당’에서는 이하응이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묘를 쓴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하응이 불태운 절은 가야사가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묘암사와 보웅전이라고 한다. 가야사는 훨씬 그 이전에 폐사가 됐다는 것.   

가야사 논란은 일단 접자. 부친묘를 옮긴 지 7년 후, 이하응은 차남 명복을 얻었다. 철종이 후사가 없자 신정왕후 조씨는 가까운 종손인 12세의 명복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고종이다. 아들(고종)과 손자(순종) 둘이 천자가 되었으니 이하응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망국의 길만 걷지 않았다면 말이다. 

두 사람의 왕이 나온다는 명당을 찾아 상가리의 좁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더 들어가자, 이윽고 자동차의 네비게이션이 도착을 알린다. 꽤나 넓은 평평한 부지 앞이다. 여기저기에 주춧돌 같은 돌들이 산재해 있다. 얼핏보기에도 절터 같았다. 부지 위에 높은 언덕이 자리잡고 있다. 남연군 묘는 그곳에 있었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남연군 묘.
남연군 묘는 좁은 나무 계단길을 지그재그로 올라가야 나온다.

옆으로 난 좁은 나무 계단길을 따라 지그재그로 언덕을 올라가니 큰 봉분이 나타났다. 양쪽에 두 개의 석주(돌기중)와 석양(두 마리의 돌로 만든 양) 석등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다. 주위를 둘러봤다. 멀리 보이는 가야산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봉분으로 돌아왔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느낌이랄까.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도굴을 시도했다가 실패할 정도로 무덤은 견고하게 조성됐다. 1995년 방송된 ‘찬란한 여명’이라는 100부작 드라마에서 도굴 시도 장면이 방송되기도 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철 수만근을 녹여 쏟아부었다고 전하고 있다. 남연군 묘는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연군 묘 인근 마을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묘.
김정희의 묘는 그 자체로 편안하고 아늑해 보였다. 

인근 마을 신암면 용궁리엔 추사 김정희의 묘
차를 남연군 묘 인근 마을인 신암면 용궁리로 돌렸다. 추사 김정희의 묘와 고택이 있는 곳이다. 넓은 잔디밭에 자리잡은 추사의 묘(두 부인과 합장)는 아늑하고 편안해 보였다. 울타리가 없어서 산책 삼아 둘러보기에도 편했다. 뒷산 팔봉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는 추사다. 필자는 수십 년 유배 생활을 하고 고단한 몸을 뉘인 김정희의 묘가 차라리 더 명당에 가까워 보였다. 분명 그리 보였다. 한참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남문 부근의 비석군.
맨 앞에 있는 대장비석이 이하응을 기린 '흥선대원위대감 영세 불망비'.

☞사족/ 남한산성 남문 부근에 있는 '이하응영세불망비'
이하응의 묘는 1897년 고양군에 있다가 1906년 파주로 이장되었고 1966년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다시 옮겨왔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입구 근처. 등산객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비석군(碑石群)이 있다. 선정비와 영세불망비를 모아놓은 디귿자 모양의 비석군은 모두 30기. 남한산성 행궁 복원 작업을 하면서 이전된 11기 비석과 현 위치에 보존된 19기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도열해 있는 맨 앞 ‘대장비석’은 흥성대원군 이하응의 것이다. ‘흥선대원위 대감 영세 불망비’라고 적혀 있다. ‘대원위대감’이라는 높은 존칭을 쓰고 있다. 비석 뒤를 보니 동치(同治) 3년, 갑자(甲子) 10월이라고 적혀 있다. 동치는 청나라 연호, 갑자년은 고종 등극 이듬해인 1864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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