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㊱/ 태양족 스타들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㊱/ 태양족 스타들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0.11.15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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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치사한 놈’(1963). 태양족을 대표하는 이시하라 유지로와 아사오카 루리코.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기왕 다루는 김에 ‘타이요조쿠’(太陽族, 이하 태양족)에 관하여 한번 더 다뤄 보려고 한다. 닛카쓰(日活)의 화려한 반격의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태양족 영화는 이후 닛카쓰 외 영화사들이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위축된 영화계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쇼치쿠 누벨바그의 기수, 일본 뉴웨이브를 잉태한 건 순전히 태양족 영화 때문이었다. 프리 누벨바그는 태양족이라 불리는 문학 경향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을 경험했던 전후 일본은 할리우드 반항물들에 의해 큰 충격을 받았다. 군국주의 시절을 거치면서 획일화된 병영사회를 경험한 일본인들에게 할리우드의 반항물들에 대해 어떻게든 ‘일본식 반응’을 내놓고 싶어 했다. 이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준 배우는 두 사람으로 ‘세계를 매혹 시킨 반항아’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와 ‘반항아의 우상’인 제임스 딘(James Dean)이었다. 

60년대 히피 청바지족 문화 유입으로 태양족 출현
물론 말론 브랜도에게는 라이벌인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위 두 사람이 지존이었다. 1953년 말론 브랜도가 영화 ‘난폭자’(The Wild One, 1953)에서, 제임스 딘이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 1955)에서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당연히 젊은이들이 열광했고 청바지는 반항과 저항을 상징하는 옷이 되었다. 60년대 히피들은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뜻으로 청바지를 찢어 입기 시작했다. 이 문화는 일본에 그대로 유입되었다.

신세대 영웅들이 ‘어리석은 짓들’을 서슴지 않게 하고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에너지를 마냥 소비하는 무위도식형 젊은이들의 반항이 보수적인 일본사회, 더군다나 군국주의를 겪은 기성세대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하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지만 이러한 반항문화와 파격은 훗날 ‘스무살의 사랑’ (Love At Twenty, 1962)이라는 옴니버스 영화로까지 발전한다.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폴란드, 독일(구서독)이 공동제작하고 이시하라 신타로, 마르셀 오필스(Marcel Ophuls), 렌조 로셀리니(Renzo Rossellini),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가 참여한 이 영화는 ‘타이요조쿠의 세계화’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센세이션 했다. 나카히라 야스시라고 잘못 번역되었다는 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은 시대를 앞선 천재로 받아들여졌다. 프랑수아 트뤼포에게 그의 새로운 분위기는 파격이었고 더군다나 그것이 보수적인 나라라고 인식되어 온 일본에서 일어난 경향이라는 사실은 그를 매우 흥분시켰다. 

후루카와 다쿠미(古川卓巳)의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 1956),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청춘잔혹이야기’(靑春殘酷物語, 1960), 다이에이(大映)에 소속된 이치가와 곤(市川崑)의 센세이션 영화 ‘처형의 방’(處刑の部屋, Punishment Room, 1956)이 주목을 받았다. 이중 ‘처형의 방’은 일본열도를 단숨에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카와구치 히로시(川口浩)와 와카오 아야코(若尾文子)가 주연한 이 영화는 이시하라 신타로의 작품 구현 클라이맥스가 ‘강간’이라는 것에 기인하여 처음 만난 여중생(와카오 아야코)의 맥주에 수면제를 타 강간한다. 

젊은이들의 폭력과 성적 일탈에 대한 묘사가 너무 심하여 상영금지가 검토될 정도였다. 청춘잔혹이야기는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50년대의 열혈 학생운동가였고 지금은 불법 낙태수술로 먹고사는 선배 의사, 낙태수술을 받고 탈진해 누워 눈물을 흘리는 여주인공과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사과를 질겅대고 있는 남자주인공이 등장하는 시퀀스만으로도, 전후 일본사회의 모순, 일본공산당이 주도한 50년대 좌파운동의 실패, 청춘남녀의 불안과 비애 등을 모두 보여준다. 

태양족 영화에서 가장 두각을 낸 와카오 아야코

대타로 성공한 다이에이 전속배우 와카오 아야코
지난번 닛카쓰에 대한 챕터에서 주로 남자배우들을 소개했다면 태양족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자배우들이 있다. 이중 단연 선두는 와카오 아야코다. 그녀는 다이에이의 전속 배우였다. 1953년에 코지 시마(島 耕二)감독의 영화 ‘10대의 성전’(十代の性典, 1953)이 대박을 쳐 언론에서는 성전(性典)배우라고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당대의 아이돌이면서 섹스 심벌 같은 존재로 연기력에 대한 검증이 안된 배우로 인식되었다. 처음부터 캐스팅된 여배우가 건강상의 문제로 갑작스레 하차하는 바람에 그 대타(‘죽음의 거리’, 死の街を脱れて, 1952)로 데뷔한 행운아였기 때문에 미조구치 겐지(溝口 健二)의 ‘게이샤 기온바야시’(祇園 子, A Geisha, 1953)에 출연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미조구치 겐지는 그의 유작 ‘적선지대’(赤線地帯, 1956)에서 그녀를 다시 캐스팅하게 되는데 와카오는 기존에 불우하고 가련한 홍등가 여성 캐릭터들과 달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자립하려는 홍등가의 팜므파탈 캐릭터를 맡았다. 이 역할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가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의 영화 ‘여자는 두번 태어난다’(女は二度生れる, 1961), ‘기러기 사원’(雁の寺, 1962), ‘정숙한 짐승’(しとやかな獣, 1962) 같은 영화에 출연하여 명성을 쌓는다. 

그는 태양족 영화의 여성 기수이면서 일본 누벨바그 영화의 ‘반항아’라고 불리우는 마스무라 야스조(増村保造)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어 ‘명랑소녀’(青空娘, 1957)에서는 계모와 이복형제들의 멸시에도 삶을 긍정하는 명랑소녀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매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상을 휩쓸었으며 기존의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파격적 캐릭터를 그만의 매력으로 창조해 나간 배우다.

영화 ‘동경의 망나니’(사이토 부이치 감독,1960)에서의 아사오카 루리코

이시하라 유지로와 호흡이 빛났던 아사오카 루리코
아사오카 루리코(浅丘ルリ子)는 가장 최근까지 스크린에 등장했던 배우다. 주옥같은 작품에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가 있다. 태양족 스타인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郎)가 동반했던 여배우이면서 그 유명한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 시리즈의 ‘마돈나’역을 무려 ‘4회’(11, 15, 25, 48편)나 맡았다. ‘미친 과실’ 狂った果實: Crazed Fruit, 1956년)의 조감독 출신인 구라하라 고레요시(藏原惟繕) 감독의 ‘치사한 놈’(憎いあンちくしょう, I Hate But Love, 1963)은 이시하라 유지로와 아사오카 루리코의 앙상블이 뛰어난 작품이다. 

‘치사한 놈’ 이라는 한국어 제목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붙였는데 썩 좋은 번역이 아니다. 일본어 제목은 ‘憎いあンちくしょう’로, 한국말로 옮기면 “미운(憎い) 저(あン) 새끼 (ちくしょう, 畜生, 축생)”라고 할 수도 있고 ‘미운 그 녀석’으로 순화할 수도 있다. 이렇게 길게 제목을 번역하는 것은 그만큼 영화가 제목만큼이나 거칠고 센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으로는 ‘일본 최초의 로드 무비’다. 

남자주인공 다이사쿠(北大作, 이시하라 유지로)와 여자주인공 ‘노리코’(아사오카 루리코)는 연예인과 매니저 관계이자, 연인의 관계다. 영화의 초반에 벽에 날마다 숫자가 하나씩 늘어가듯이, 사귄 지 2년 정도 된 커플로 둘은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섹스를 하지 않는다. 남자는 스케줄이 많아 피곤해 만사가 귀찮고, 여자는 남자에게 끌리지만 그가 자신을 진정 좋아하는지 자꾸 의심하고 확인하게 된다. 

“사랑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믿는”이라는 대사만큼 두 사람은 ‘도쿄의 번화가에서 규슈의 아소산까지’, ‘휴머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드라이버를 구함. 중고 지프를 규슈까지 배송해줄 것. 단 무보수’라는 신문광고에 끌려 이동하면서 결국은 서로를 신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후 두 사람은 ‘나 홀로 태평양’(太平洋ひとりぼっち, Alone On The Pacific, 1963), ‘붉은 손수건’(赤いハンカチ, Red Handkerchief, 1964) 등의 영화에도 함께 한다. 

또한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의 마돈나는 007 시리즈의 본드걸만큼 중요한 배역이고 주목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녀는 탁월했다. 사이토 부이치(斎藤武市) 감독의 ‘동경의 망나니’(東京の暴れん坊, Rambler in the Sunset, 1960) 역시 그냥 의미 없이 도쿄에서 굴러먹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가 특별한 건 한국에는 무슨 이유인지 포털사이트를 검색하면 사이토 부이치 감독의 필모그래프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양족 여배우의 영화로서 소개할 만하다. 

주목할 것은 역시 사이토 부이치 감독의 ‘기타를 멘 철새’(ギターを持った渡り鳥, 1959)를 비롯, 일본 마카로니 웨스턴 무비인 ‘대초원의 철새’(The Rambler Rides Again, 大草原の渡り鳥) 등에 연거푸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旭)와 출연하게 되면서 결국 동거에 들어가기도 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당시 닛카쓰 황금기를 빛낸 간판스타들이기도 했다.

영화 ‘태양의 묘지’(오시마 나기사 감독, 1960) 등에 출연한 호노오 카요코
 

‘신비주의 컨셉’으로 등장한 배우 호노오 카요코
마지막으로 일본 뉴웨이브로 넘어가기 전 명맥이 비교적 짧았던 ‘타이요조쿠 운동’의 끝자락에 등장한 영화인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태양의 묘지’(太陽の墓場: The Sun's Burial, Tomb Of The Sun, 1960)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오사카의 더러운 슬럼가가 배경인 이 영화는 하층민과 그곳을 거점 삼아 싸움을 일삼는 삼류 깡패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이제 막 조직에 몸을 담은 순수한 청년의 눈에 섹스, 폭행, 강도, 매춘, 불법, 강간이 난무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방황을 겪게 된다. 배반 그리고 살인, 또 배반 그리고 살인, 배신은 폭력으로, 폭력은 살인으로 앙갚음하는 비열한 거리 중간중간에는 오사카 츠텐카쿠와 오사카성이 간간이 비춰지며 암담한 현재와 찬란했던 과거가 교차 된다. 

일본의 찬란했던 과거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재는 너무 다르다는 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신(츠가와 마사히코, 津川雅彦)과 타케시(사사키 이사오, 佐々木功)는 마지못해 신영회라는 갱단에 가입하게 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 여자. 야심이 많은 하나코(호노오 카요코, 炎加世子)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불법으로 혈액은행을 운영한다. 신영회와 하나코는 이권 다툼으로 인해 사사건건 다툰다. 

“주인공의 유약 하면서도 곧 터질 것 같은 불안한 감정이 돋보이고, 묘지 위로 쏟아지는 붉은 석양이 내내 영화를 위태롭게 감싼다.”(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2010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에서 발췌)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이 영화에는 (태평양)전쟁 직후 꿈을 꾸지 못하는 청년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표현 역시 당시의 일본을 잘 묘사한다. 이 영화는 빈번하게 태양을 보여주면서 태양족 영화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작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타이요조쿠’는 뉴웨이브에게 자리를 넘겨준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하나코 역으로 등장하는 호노오 카요코는 지금으로 말하면 ‘신비주의 컨셉’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배우다. 시종일관 영화에서 보여지는 거친 캐릭터와 흡연장면 그리고 도전적 이미지는 예쁜 외모의 태양족 여주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녀는 아주 어릴적부터 극단에 소속되어 연극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살미수를 경험하는 등 방황을 경험하던 중 19세 때인 1960년 쇼치쿠의 오시마 나기사 감독에게 스카우트되어 데뷔작부터 아주 거친 캐릭터를 소화해 냈다.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 감독의 ‘마른 호수’(乾いた湖, 1960), 타무라 맹(田村孟) 감독의 ‘악인 지원’(悪人志願, 1960), 오자와 히게시로(小沢茂弘) 감독의 ‘타락천사’(ずべ公天使, Fallen Angel, 1960) 등 6편에 출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중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 감독의 영화 ‘석양의 붉은 얼굴’(夕陽に赤い俺の顔, Killers on Parade, 1961)에서는 무표정으로 권총을 난사하는 여자 킬러로 나와 강렬한 캐릭터를 선보였다. 그러나 너무 강렬한 인상 탓인지 이후 주연급 섭외는 들어오지 않았고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의 영화 ‘일본 곤충기’(にっぽん昆虫記, The Insect Woman, 1963)에 얼굴을 비친 후 1964년 결혼 후 간간이 1969년까지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다가 종적을 감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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