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김시습이 잠든 ‘무량사’ 절 마당을 돌다
탐방기/ 김시습이 잠든 ‘무량사’ 절 마당을 돌다
  • 노운 작가
  • 승인 2020.12.01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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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부도군. 

<글, 사진=작가 노운>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더니 2년 뒤 조카를 쫓아내고 기어이 보위에 올랐다. 당시 서울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왕위찬탈 소식을 들은 스물한 살의 사내가 있었다. 훗날 매월당(梅月堂)으로 불리는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다. 방에 틀어박혀 사흘 만에 뛰쳐나온 그는 책을 불태우고 머리를 깎았다. 모두들 두려워 손대지 못하던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서울 노량진에 묻어주었다. 그러곤 긴 방랑길에 올랐다. 그 여정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충남 부여 ‘홍산 무량사’를 찾아가던 날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만큼 다양한 호를 지닌 이도 드물 것이다. 대표적인 매월당(梅月堂)을 비롯해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찬세옹(贊世翁), 벽산(碧山), 청은(淸隱) 등이다. 그런데 정작 그의 묘에는 다른 별칭이 적혀 있다. ‘5세 김시습의 묘’(五歲金時習之墓). 충남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가면 김시습의 묘(부도: 덕이 높은 스님을 기리는 탑)를 만날 수 있다. 초상화와 함께.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설잠(雪岑: 눈 덮인 봉우리)이라는 법명으로 세상을 떠돌던 김시습이 눈을 감은 곳, 최근 그곳 무량사(부여군 외산면)를 다녀왔다. 절은 보령시와 맞붙은 외산면 만수산 자락에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엔 홍산현 관할 지역이었다. 지금도 무량사를 ‘홍산 무량사’라 부르는 이유다. 무량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멀리서 ‘만수산 무량사’(萬壽山無量寺)라 적힌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세월을 견딘 일주문 기둥이 마치 김시습의 이야기를 객에게 미리 들려주는 듯하다. 

무량사 전경

통일신라시대 세워졌다는 경내로 들어가 사찰을 둘러보았다. 본전은 대웅전이 아닌 극락전(보물 제356호). 극락전은 보기 드물게 2층 불전(佛殿)으로 되어 있어 그 위용이 남달랐다. 발길을 옮기다 ‘설잠 스님(김시습) 영각(사당)’과 만났다. 김시습의 초상(보물 제1497호)이 걸린 영각 앞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김시습(설잠 스님) 영각 안내판
김시습의 초상화. 

 

영각 정면에는 김시습(설잠 스님)의 초상화
<얼굴은 전체적으로 살구색과 진한 갈색을 사용해서 대비되게 표현하였고, 수염은 검은색으로 섬세하게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 어린 총명한 기운에서 김시습의 내면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은 세상을 향한 김시습만의 표정이 아니었을까. 유교, 불교, 도교에 능통한 기인은 그런 본노와 체념의 낯빛을 승화해 냈을 것이다. 59세로 죽었을 때다. 화장하지 말라고 유언해 임시로 매장했다. 3년 뒤 장사를 지내려고 유해를 꺼냈는데 마치 얼굴이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스님들이 부처로 여겼다고 한다. 

종전 부도에서 사리 옮기고 새 부도 만들어
마침 경내를 지나가던 한 스님에게 “설잠 스님의 부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절 입구 오른쪽에 있다”고 손짓을 하였다. 다시 절을 나갔다. 조금 떨어진 기슭에 ‘5세 김시습의묘’(五歲金時習之墓)라 적힌 비석과 부도, 그리고 시비가 마련돼 있었다. 그런데 부도가 너무 새 것이었다. 웬일인가 싶어 다시 절 안으로 들어가 종무소에 물었다. 

구 부도군에 '5세 김시습의 묘'라고 적혀 있다. 
김시습 구 부도군의 모습

 “기존 부도에서 김시습의 사리를 옮겨 무량사 입구에 새 부도를 만든 지 채 열흘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원래 있던 부도는 절 바깥 암자 쪽에 있었다. 10분 정도 걸음을 옮겼다. 비석과 부도 등 10여 개의 돌 장식으로 이뤄진 부도군이 나타났다. 안내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에 부도 안에서 김시습의 사리를 넣은 사리기(사리를 담은 함)가 발견되었다. 현재 사리는 무량사로 모셨고, 사리기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시습’이라 이름 지어줘
오래된 부도와 새로 조성된 부도를 함께 본 객은 그 앞에서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었다. 비석(五歲金時習之墓)에 매월당 대신 ‘오세’(五歲)라는 말이 적힌 건 세종과의 인연 때문이다.  신동이라는 소문을 듣고 세종이 다섯 살 김시습을 궁궐로 불렀고, 신동은 임금 앞에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오세’(五歲)라는 별명을 얻은 연유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은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배우고 나서 수시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을 따 '시습'(時習)이라고 이름 지어줬다고 전해진다. 

기존 부도에서 사리를 옮겨 온 김시습의 새 부도.

김시습은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의 후손이다. 서울 태생인 김시습에게 강릉은 관향(貫鄕)인 셈이다. 1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강릉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그런 탓에 2007년 무렵 강릉 경포대에는 김시습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경주 남산(금오산)에서 ‘금오신화’ 탄생...설잠교 조성
객은 올해 7월 경주 남산에서 김시습의 흔적을 목도할 수 있었다. 김시습이 살았던 당시, 경주 남산은 금오산(金鰲山)으로 불렸다. 김시습이 경주 남산에 들어간 것이 31세 때인 세조 10년 1465년. 금오산 용장사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7년 정도 기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썼다. 대표적인 호인 매월당은 자신의 한시 ‘매화 그림자 가득한 창에 달이 막 밝았구나’(滿窓梅影月明初)라는 문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경주 남산(금오산)에 있는 설잠교.

남산에 김시습의 흔적은 또 있다. 산 정상에서 용장계곡을 지나 용장리 마을로 내려가다 보면 작은 아치형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설잠교(雪岑橋)다. 법명이 ‘설잠’인 김시습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다리라는 걸 알 수 있다. 김시습은 금오산을 떠난 이후, 서울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짓고 10년간 생활했다. 현재 수락산에는 김시습을 기리는 정자 매월정이 세워져 있다. 

서울 수락산 8부 능선 쯤에 있는 정자 매월정.

서울 수락산엔 ‘매월정’ 정자가 있다
지난 8월 수락산을 등산하면서 매월정을 찾아 보기로 했다. 정자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 표시가 없어서 포기하려는 순간. 8부 능선 깔딱고개를 더 지난 고지대에서 산의 전경을 바라보다가 한곳에 시선이 꽂혔다. 멀리 ‘작은 게’ 하나 보였다. 정자인 듯했다. 서둘러 가보니 매월정이 아닌가. 정자에 앉아 김시습의 시를 감상하며 땀을 훔쳤다. 정자에서 결심을 했다. 

“무량사에 가보자”고. 3개 월 뒤인 11월의 끝자락, 객은 충남 홍산의 무량사에서 매월당 초상을 바라보며 절 마당을 돌고 있었다. 매월당에 꽂힌 이유를 객도 모른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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