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석유자본에 맞선 ‘일본의 석유왕’
영국 석유자본에 맞선 ‘일본의 석유왕’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0.12.1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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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쇼마루(日章丸) 사건'(이란의 석유 국유화에 반발한 영국의 해상 봉쇄령을 뚫고 석유를 일본으로 들여온 일)으로 국제사회에 큰 주목을 받았던 석유기업 이데미쓰흥산(出光興産)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동 석유자본의 태동 역사를 더듬어 봐야 한다. 이야기의 배경엔 이란과 영국, 그리고 영국 석유회사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 The British Petroleum Co)의 관계가 서로 얽혀 있다.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은 이란(페르시아) 석유자본을 먹고 자란 대표적인 석유 메이저다. <편집자주>

광산업자 윌리엄 크녹스 다아시 중동 최초 석유 발견
윌리엄 크녹스 다아시(William Knox D'Arcy:1849~1917)라는 영국인이 있었다. 변호사 출신의 광산 사업가 다아시는 호주 금광에서 얻은 재산을 기반으로 1901년 페르시아(이란) 정부와 석유 채굴 독점계약을 맺었다. 그런 그는 지질학자 조지 버나드 레이놀즈(George Bernard Reynolds:1853-1925)를 고용해 석유 찾기에 나섰다.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7년 동안 전 재산을 쏟아부었지만 석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1901년부터 시작된 작업은 1908년 5월까지 이어졌다. 

돈이 거의 바닥나고 탐사를 중단하려던 5월 26일, 레이놀즈가 이란 남서부 마스지드 슐레이만(Masjid Sulaiman) 지역에서 마침내 유정(oil well)을 발견했다. 닷새 후 유정이 발견됐다는 전보를 받은 다아시는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 고생은 끝났다”(If this is true, all our troubles are over)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다아시는 중동지역에서 최초로 석유를 개발한 영국인 사업가로 이름을 올렸다. 이런 다아시는 1909년 앵글로-페르시안 오일 컴퍼니(Anglo-Persian Oil Company: APOC)를 설립했다.

1935년 페르시아, 이란으로 국호 변경...1951년 석유 국유화
석유가 발견되면서 경제적 가치가 높아진 페르시아는 열강들이 눈독을 들이는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중 같은 연합군인 러시아와 함께 페르시아 일부를 점령했다. 1918년 ‘페르시아-영국 조약’으로 페르시아는 영국의 보호령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1921년 페르시아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페르시아 여단 장교 레자 칸(Reza Kha)이 쿠데타를 일으켜 카자르 왕조를 몰아냈던 것. 레자 칸은 1925년 ‘레자 샤 팔레비’(Reza Shah Pahlavi)라는 이름으로 팔레비 왕조를 열었다. 

쿠데타 전에 영국 지원을 받았던 레자 칸은 즉위 후엔 영국 세력에 대항했다. 카자르 왕조가 영국과 맺었던 조약을 폐기하고 영국의 석유 특권을 없애버렸다. 당시 영국인 다아시의 회사는 이익의 10%만 페르시아 정부에 주고 석유를 독점 판매하는 특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레쟈 샤는 1931년 이를 폐지하고, 1935년에는 페르시아 국호를 오늘날의 이란으로 바꿨다. 나라 이름이 바뀌면서 다아시의 회사는 앵글로-이라니안 오일 컴퍼니(Anglo-Iranian Oil Company: 이하 AIOC)로 개칭됐다. 

이란의 석유 국유화에 영국은 해상 봉쇄령으로 맞서
이란의 석유자본을 야금야금 빼먹던 영국의 ‘잇속 장사’는 1950년까지 이어졌다. 여기까지였다. 돌연 이란이 석유자본을 꽁꽁 묶어버린 것.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1882-1967) 총리와 의회는 1951년 3월 전격적으로 석유 국유화를 단행했다. 당시 AIOC는 유럽에서 사용되는 석유의 90%를 공급하고 있었다. 

이란의 국유화에 반발한 영국은 중동에 군함을 파견, 사실상 경제 제재 금수 조치를 취했다. ‘아바단(이란의 항만도시) 위기’로 불렸던 이 사건은 전쟁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유발했다. 영국은 ‘이란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하는 나라의 유조선은 격침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감히 영국의 봉쇄령을 뚫고 원유를 가져가리라곤 상상도 못할 상황, 그런데 일본의 한 석유기업이 맞서고 나왔다. 이데미쓰 사조가 이끄는 이데미쓰흥산이었다.

일본은 패전 후 연합국의 점령을 받았고, 점령이 끝난 후에도 독자적인 루트로 석유를 자유롭게 수입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것이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터였다. 이데미쓰흥산 사장 이데미쓰 사조는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가 국제법상 정당성이 없다고 판단, 1953년 3월 23일 극비리에 유조선 ‘잇쇼마루’(日章丸)를 이란으로 파견했다.

유조선 잇쇼마루 봉쇄령 뚫고 일본으로 오일 들여와
고베항을 떠난 1만9천톤의 잇쇼마루에 전 세계가 숨죽이며 관심을 보였고, 매스미디어의 주요 기사로 보도되었다. 잇쇼마루가 이란의 석유산업 요충지 아바단(Abadan)을 출발한 건 4월 15일. 가솔린과 경유를 가득 싣은 배는 영국 봉쇄령을 뚫고 5월 9일 가와사키항에 도착했다.  그러자 다아시의 회사 AIOC는 화물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AIOC는 제소를 취하, 결국 이데미쓰흥산이 승리를 거뒀다. 

이데미쓰 사조의 도발적인 잇쇼마루 사건은 전 세계 석유자본에 대한 자유무역의 시발점이 됐다. 이 사건으로 이데미쓰 사조는 ‘석유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일본에 일격을 당한 AIOC는 1954년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 Company: BP)으로 상호를 바꿨다. 세계 7대 석유 메이저(Oil Majors) 중 하나인 BP는 1998년엔 미국 아모코(Amoco)와 합병해 BP Amoco가 되었다.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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