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숨비소리길’ 해녀와 ‘슬픈 군주’ 광해군
탐방기/ ‘숨비소리길’ 해녀와 ‘슬픈 군주’ 광해군
  • 노운 작가
  • 승인 2020.12.30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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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들이 밭일 하러 나가던 숨비소리길. 2018년 12월 구좌읍 일대에 조성됐다. 

해녀 사진작가 준초이의 작품을 소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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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작가 노운> 6년 전의 기억 하나를 소환한다. 2014년 5월의 어느 날, 서울 강남구 포스코미술관에서 사진작가 준초이의 ‘바다가 된 어멍, 해녀’ 사진전을 둘러보고 있었다. 유명한 광고 사진작가 준초이는 광고 촬영을 위해 제주를 찾았다가 제주해녀에 빠졌다. 그러곤 우도로 이주, 10년 가까이 제주해녀를 카메라에 담았다. 당시 전시장 작품 중, 나이든 해녀 사진 하나가 유독 인상적이었고, 깊은 여운을 남겼다.(아래 사진) 주름지고 검게 탄 그 얼굴에서 제주의 바다를 보았다. 

2014년 포스코미술관에서 전시됐던 사진작가 준초이의 ‘바다가 된 어멍, 해녀’ 사진전 작품. 

‘바당’(제주 방언으로 바다). 제주에서는 바다를 그렇게 불러야 제맛이다. 그런 바당에서 ‘아등바등’ 억척스런 삶을 살았고, 현재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녀다. 그들에게 ‘바당’은 공포인 동시에 사랑이다. 제주시인 허영선은 시집 『해녀들』에서 “사랑을 품지 않고 어찌 바다에 들겠는가”라고 했다. 한 토막 소개하면 이렇다. 

<하루 다섯 번
파도 면벽수도하는 저 바다 젊은 바위처럼
끄떡없이 자리 지켜 앉아 있다보면
서서히 가슴엣 불 조금씩 졸여지는 것 느껴지지
사랑을 품지 않고
어찌 바다에 들겠는가>
(이하 생략)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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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의 ‘물질 돈벌이’를 두고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고들 말한다. 바당은 언제든 사람을 집어삼키는 ‘예고된 저승’과 같다. 그런 저승은 ‘돈밭’이다. 돈밭이되, 더없이 위험한 돈밭인셈. 바당은 해녀를 부른다. 뿌리칠 수 없는 해녀는 잠수복을 입고 매일 바당으로 출근한다. ‘태왁’(스티로폼을 깎아 만든 부력 도구)에 생명을 맡긴 채.

제주해녀박물관의 내부.

물속. ‘빗창’(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는 쇠갈고리)을 쥔 손이 쉴 틈 없다. 그럴수록 태왁과 한 세트를 이룬 망사리(채취한 해물 따위를 담아 두는 그물망)가 부풀어 오른다.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 그럴수록 숨은 더 차오른다. 

마침내 물 밖으로 나와 가뿐 숨을 내뱉는다. 호오이~ 호오이~. 휘파람 같은 숨비소리가 바람을 타고 바당을 맴돈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사는 그런 제주해녀는 2016년 12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 등재를 계기로 2018년 12월 제주시 구좌읍에 ‘숨비소리길’이 조성됐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세밑, 이곳 숨비소리길을 걸었다. 

숨비소리 돌담길에 바람이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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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4등분 하면, 시계바늘 2시 방향이 구좌읍이다. 사진작가 준초이가 해녀사진을 찍으며 머물렀던 우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우도가는 배는 성산읍 성산항과 구좌읍 종달항(종달리)에서 출발하는데, 종달항이 직선거리다. 

종달리에서 좀 더 올라가면 하도리다. 제주해녀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제주해녀박물관이 있다. 종달리~하도리~세화리~행원리로 이어지는 구좌읍의 해안도로는 숨비소리길, 해녀박물관, 불턱(해녀들의 바다쉼터) 등 해녀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이외에 별방진, 세화 5일시장, 행원리 풍력발전단지도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게 한다.   

숨비소리길의 일부.

해녀들이 ‘물질’만 했던 건 아니다. ‘물질’이 없는 날은 밭일도 그들의 몫. 밭일 하러 오가던 길이 ‘숨비소리길’이다. 세화리와 하도리 일대에 숨비소리길이 만들어진 건 2018년 12월. 제주해녀박물관~밭길~별방진성~해안길~제주해녀박물관까지 4.4km 코스로 조성됐다.

놀멍쉬멍 느긋하게 숨비소리길을 걸었다. 세월이 내려앉은 돌담을 어루만지며. 세찬 바람에도 돌담은 어찌 무너지지 않는 걸까. 돌담 너머의 이집저집을 고개 빼들고 들여다 본다. 바람은 돌담길을 돌고 돌아 저만치 빠져나간다. 여기저기 보이는 밭에 아낙들(해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선가 자잘한 수다가 들리는 듯하다. “어젯밤에 누구누구네 집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군”. 어느 아낙의 말을 바람이 실어 나른다. 

높이 3.5m, 총길이 1000미터의 별방진성.
별방진성은 이젠 마을로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는 역할을 한다.

제주해녀박물관에서 본 ‘의로운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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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소리길을 돌아 나오며 별방진으로 향했다. 하도리의 옛 지명인 ‘별방’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한다. 왜적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높이 3.5m, 총길이 1000미터. 지금은 마을로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아주는 ‘어머니의 거대한 품’과도 같다.

제주에 박물관과 기념관이 많지만 제주해녀박물관은 그 의미가 좀 남다르다. 준초이의 전시장에서 보았던 늙은 해녀가 다시 떠올랐다. 해녀박물관은 숨비소리길의 시작과 끝이다. 입장료 1100원을 내고 잠시 둘러보았다. 

돌담으로 에워싼 불턱(해녀들의 쉼터), 잠수 장비, 생활 도구 등 해녀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는데, 한눈에 봐도 그들의 삶이 녹록치 않다는 걸 실감한다. 해녀박물관 밖엔 제주해녀 항일운동기념탑이 서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1월 구좌읍, 성산읍, 우도면 일대의 해녀들이 수탈에 항거해 들고 일어났다. 그뿐이던가. 이후 4·3항쟁을 겪으며 남자들이 없어진 ‘무남촌’을 지키며 살아온 그들이 아닌가. 의로운 여자들이고, 굳센 엄마들이었다.

유독 바람이 많은 행원리 포구의 풍차.
행원포구는 유뱃길에 오른 조선 광해군이 도착한 곳이다.

행원포구로 유배온 조선 군주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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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간다. 행원리 풍력발전단지. 곳곳에 거대한 발전용 풍차가 돌아간다. 해안가, 심지어 바다 속까지. 바람이 많은 제주지만, 예로부터 이곳은 유독 바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런 탓에 ‘지나가던 물고기도 포구로 올라온다’고 해서 어등포(魚登浦:어등개)라 불렸다. 그러다가 살구나무 마을이라는 뜻의 행원리(杏源里)로 바뀌었다. 

이곳에 발길이 멈춰선 건 한 사내 때문이다. 1637년 6월 사방이 막힌 배를 타고 누군가가 유배를 왔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당시 63세)이다. 그가 도착한 곳이 바로 행원포구다. 제주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 두른 곳에 가둠)된 광해군은 4년 유배 생활 뒤인 1641년 7월, 제주에서 죽었다. 

380년 전 ‘슬픈 군주’의 죽은 몸이 제주를 떠날 때도 바람이 많았을 터. 지금처럼 말이다. (광해군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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