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목숨과 맞바꾼 제주 유배지의 ‘찐’사랑
탐방기/ 목숨과 맞바꾼 제주 유배지의 ‘찐’사랑
  • 노운 작가
  • 승인 2021.01.04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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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의녀’(義女) 훙윤애의 묘. 오른쪽은 후손의 묘.

<글, 사진=작가 노운> 제주시 중심가에서 애월읍으로 향했다. 낯설지 않는 지명, 소길리 표지판이 보였다. 이제는 거기 살지 않는 ‘소길댁’이라 불리던 유명 연예인을 잠시 떠올렸다. 소길리를 지나 유수암리(예전의 금덕리)로 접어 들었다. 네비게이션에도 나와 있지 않는 곳을 찾아 가는 길. 목적지는 한 여자의 무덤. 주유소 근처라는 정보만 듣고 길을 나섰다가 유수암리 일대를 몇 번이나 뱅뱅 돌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엄동설한, 무덤 위에 핀 민들레 홀씨
좁은 길, 작은 언덕, 바람에 햇살이 날린다. 사각 돌담 안에 소박한 무덤이 들어 앉아 있다. 엄동설한 12월 중순에 어찌 무덤 위에 민들레 홀씨가 하나 피었을까. 신기하기도, 거짓말 같기도 한 장면. 억새들이 밀어다 준 바람에 홀씨의 가녀린 몸이 파르르 떨린다. 

낡은 비석 하나가 무덤을 지키고 있다. 비석을 어루만지며 한자한자 짚어본다. ‘홍의녀지묘’. 정조 5년, 1781년에 죽은 스무살 의녀 홍윤애의 묘다. 무덤 앞엔 어른 키 높이의 표지석이 서 있다. 읊어본다. 

12월 중순, 무덤에 한 송이 밀들레 홀씨가 솟아 있었다.

홍윤애는 조선 영·정조 때 제주목에 살던 여인으로 일명 홍랑이라고도 한다. 조정철(1751~1831)은 1777년(정조 1년) 정조 시해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되어 온갖 고초를 겪는 가운데 시중을 들던 20살 홍윤애와 서로 사랑하게 되어 딸을 낳게 된다.

여기까지는 알량한 사대부의 로맨스 정도로만 보인다. 아전의 딸 홍윤애는 스물 일곱 젊은 나이에 제주로 유배 온 사내, 조정철을 돌보다 정이 들었고, 그 남자를 위해 죽었다. 표지석 글을 더 읽어 내려간다

1781년(정조 5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소론의 김시구는 정적이었던 노론의 조정철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딸을 낳은 지 채 백일도 안된 홍윤애를 잡아들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려고 모진 고문을 한다. 그러나 홍윤애는 ‘공(조정철)의 목숨은 나의 죽음에 있다’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고 형틀에 매달려 순절하였다.

스물일곱에 제주로 유배 온 조선 문신 조정철
이쯤되면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무덤 주위를 돌며 까슬한 잔풀들을 쓰다듬어 본다. 애처로운 스무살 처녀의 사연이 손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홍윤애가 목숨 바쳐 구하고자 했던 조정철은 어떤 사내였을까. 

홍윤애 묘소 안내 표지석. 

훗날 제주목사가 되는 조정철(1751~1831)은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1786~1856)와 동시대 인물이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긴 유배생활을 했다는 것. 하지만 정약용과 김정희는 조정철에겐 명함도 못 내민다. 정약용은 18년(경북 포항 장기 8개월, 전남 강진 17년) 김정희는 약 10년(제주도 8년 3개월, 함경북도 북청 1년 1개월)간 유배를 살았다. 

양주 조씨 조정철은 어떨까. 무려 총 29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그런 그는 조선 최장기 유배자로 남아 있다. 1777년 9월 제주로 유배 와서 1803년 2월까지 제주(제주목, 정의현, 추자도)를 옮겨 다녔다. 이후 제주를 떠나 1805년 7월까지 전라도, 황해도에서 유배생활을 계속했다. 제주 도착 당시 27세의 젊은이였지만 유배에서 풀려났을 때는 55세의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부터 집안 3대가 제주로 유배 
흥미로운 건 증조부~본인까지 집안 4대가 유배를 살았다는 것이다. 우의정을 지낸 증조부 조태채는 노론의 주요 인물이었다. 조태채는 훗날 정조가 되는 연잉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었는데, 당쟁 싸움에 휘말리면서 진도로 유배,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영향으로 조태채의 두 아들(조정철의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도 제주 정의현과 대정현에 유배됐다. 그게 다가 아니다. 이조참판을 지낸 조정철의 아버지 또한 영조 30년(1754) 탕평책을 거론하다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진도 유배를 산 증조부 조태채를 빼면, 집안에서 네 사람(조정철의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아버지, 본인)이나 제주에 유배 오는 진기록을 남긴 셈이다. 

‘홍의녀지묘’(洪義女之墓) 글자 중 묘(墓)는 풀에 묻혔다. 

조정철이 제주로 유배 온 건 1777년 9월. 그 보름 뒤 그의 아내 남양 홍씨가 자결했다. 친정 쪽이 연루된 정조 시해 음모 사건(남양 홍씨 홍술해가 주도)의 불똥이 시댁까지 미치면서 죄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유배에 더 참혹한 상황이 겹쳤다. 당파가 달라 집안 대대로 견원지간이던 소론 김시구(金蓍耉: 1724∼1795)가 1781년 3월 제주 목사로 부임했기 때문. 같은 해 8월 파직될 때까지 김시구는 조정철을 끈질기게 추궁하기에 이르렀고, 조정철의 집안을 드나들던 홍윤애까지 잡아 고문했다. 

환갑 나이에 제주목사로 유배지 자청해 부임
조정철은 제주 유배생활 중 홍윤애와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다. 그녀는 문초를 받기 전, 딸을 언니에게 맡기고 죽었다. 조정철은 자신을 변호하다 죽은 홍윤애에 대해 훗날 “어제 미친 바람이 한 고을을 휩쓸더니 남아 있던 연약한 꽃잎을 산산이 흩날려 버렸네”(昨日狂風吹大樹 殘花嫩葉落紛紛)라는 문장으로 비통함을 표현했다.

마침내 조정철은 29년이란 한 많은 유배생활을 끝냈다. 그의 드라마 같은 인생은 그때부터였다. 관직에 재등용되면서 1811년(순조 11) 제주목사를 자원해 부임했다. 환갑의 나이였다. 조정철은 가장 먼저 홍윤애의 무덤을 찾았다. 그녀가 죽은 지 31년만에 무덤에서 해후했다. 홍윤애의 묘비(‘홍의녀지묘)를 세우고 묘비명을 썼다. 홍윤애가 죽던 해 태어난 딸은 31세가 되어 있었다. 

비석의 앞뒷면. 뒷면의 문장은 조정철이 직접 썼다. 

조정철은 잊혀진 딸과도 상봉했다. 그런 딸과 사위를 호적에 올리고 봉급을 털어 딸에게 집과 밭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조정철은 1812년 동래부사로 떠날 때까지 1년간 제주에 머물렀다. 이후 충청도 관찰사, 이조참판, 형조판서,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등의 벼슬을 두루 지내다 1831년(81세) 세상을 떠났다. 

양주조씨, 훗날 홍윤애를 정식부인으로 배향
드라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1997년 11월, 양주 조씨(楊州趙氏) 문중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경북 상주에 있는 사당 함녕재(咸寧齋)에 조정철과 홍윤애를 함께 배향한 것.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사당에 봉안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홍윤애의 묘는 원래 제주 중심 전농로에 있었는데, 현재의 애월읍 유수암리(1995년 금덕리가 유수암리로 행정구역 변경)로 이장됐다고 한다. 무덤을 떠나며 '홍윤애 표지석' 뒤에 적힌 조정철의 연시(戀詩)를 다시 한번 읽어본다.

유수암리 좁은 언덕에 위치한 홍윤애의 묘.

옥 같이 그윽한 향기 묻힌 지 몇 해인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었으리
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하여 돌아갔을까
진한 피 고이 간직하니 죽더라도 인연으로 남으리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고 
일문에 높은 절기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한 떨기 꽃 글론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엄동설한에도 무덤에 핀 민들레 홀씨. 혹시 조정철, 홍윤애 두 사람의 ‘일편단심’을 후대에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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