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㊲ / 황금기 감독열전(1)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㊲ / 황금기 감독열전(1)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1.0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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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의 거장 미조구치 겐지 감독.

[‘여자의 일생’에 주목한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미국 LA=재팬올 미국대표> 전후 황금기를 다루면서 너무 배우들과 영화제작사에 집중된 이야기들을 이제는 감독으로 옮겨가 보겠다. 1950~60년대 일본 거장 감독들의 작품세계를 다루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중 주저 없이 가장 먼저 필자가 언급하는 감독은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이다. 다른 거장들도 많지만 미조구치 겐지를 가장 먼저 꺼내든 것은 그의 작품세계가 당시에는 앞서가는 시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한 많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기본이고, 사회적 모순이나 여성들에 대한 왜곡된 정서에 의해 희생되며 때로 봉건시대의 악습으로 희생될 지라도 그의 작품에서는 대부분 악인들은 심판을 받으며 막을 내린다. 그러한 까닭에 제목이 ‘000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와 함께 일본 영화의 3대 거장 중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미조구치 겐지는 메이저 영화사인 닛카츠(日活)에서 감독 데뷔 후 1956년 ‘적선지대’(赤線地帶, 1956)에 이르기까지 90편의 작품을 남겼다. 

‘다음 백과’에 나온 감독에 대한 작품세계 요약을 보면 수긍이 간다. 대체적으로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의 갈등 ▲여성의 본질적 애정을 생생하고 아름다운 영상으로 구현으로 요약되어 있는데 필자가 본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들은 새로운 시도나 변화 없이 대체적으로 이 기조를 지켜나가고 있다. 그리고 원작이 있는 작품들을 선호했다.

겐지 감독은 '독특한 미장센'과 ‘일본적 미학’을 강조했다.

▲미학(美學)
미조구치 겐지에 대해서는 미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각종 포털 사이트를 보면 ‘탐미적(耽美的)’ 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영화들은 테크니컬한 면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의 감독들도 해내지 못한 미학적 완성도를 보였다. 미조구치 겐지에게 있어서 미학은 ‘일본적 미학’이라는 평가가 잘 어울릴 것 같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일본 특유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따지고 보면 현대영화의 여러 기법들을 잘 조화해 낸 것으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흑백’의 미학만을 추구한 감독(요절 하였기에 더더욱)이었고, 이후 많은 감독들이 흑백 속에서 찾아낸 그의 절제된 빛의 묘사에 열광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미조구치 겐지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감독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테크닉을 시도했었고 지금처럼 감독과 촬영감독의 위치가 확고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던 시대였다. 현대의 영화들은 촬영감독들의 다양한 테크닉과 미리 작성된 ‘콘티’에 의하여 감독이 의도한 바를 구현해 내고 더 나아가 편집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여러 시도를 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전적으로 감독의 역량에 따라 좌지우지 되었다. 촬영감독들은 그저 감독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촬영기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영화적 특성으로는 롱테이크와 롱쇼트, 딥포커스 등의 리얼리즘적인 화면구성과 더불어 움직이는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화면 등을 들 수 있다. 지금이야 롱테이크나 롱쇼트. 딥포커스 등이 낯설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정적인 카메라가 멀리서 모든 풍경을 바라보고 롱테이크로 계속 비춰지는 미조구치 겐지의 시선은 새로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갈대밭이나 바닷가가 등장하고 그 아름다움과 고요가 스크린에 비춰지게 되면 어느새 관객들은 더욱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게 특징이다. 서구의 영화제에서 주목한 것은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바로 이 미조구치 겐지만의 톡특한 ‘미학’에 끌린 것이다. 

'오하루의 일생'과 '산쇼다유' 포스터

▲여자(女子)의 일생(一生)그는 기승전 ‘여자의 일생’에 관해 다룬 감독이기도 하다. 1952년 ‘오하루의 일생(西鶴一代女)’, 1953년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에 이어 1954년 ‘산쇼다유’(山椒大夫)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3년 연속 수상하면서 미조구치 겐지는 일본을 대표하는 명감독으로 알려지게 된다. 특히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노장’ 미조구치 겐지의 연출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을 대표하는 바로 이 ‘여자 3부작’으로 받은 수상이었기에 더욱 뜻이 깊었다. 

공통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여자의 희생이며 그의 불우한 성장 과정을 빗대어 ‘미조구치 픽션’(溝口- fiction)이라고도 불렀다. 비록 실화는 아니지만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하나의 스토리텔링은 픽션이면서도 왠지 ‘논픽션’(nonfiction, 실화)같이 느껴진다. 평소 독설가이면서 도쿄 아사쿠사에서 누이마저 게이샤로 팔아넘길 만큼 가난한 아버지의 학대 등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탓이 컸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아버지의 학대 사이에서 반항아적 기질을 키운 그는 내연의 여자에게 면도칼로 찔리는 사건을 경험한 이후 독특한 시각으로 ‘여자’에 관한 이야기들을 영화 속에서 풀어나갔다. 반면에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속에 나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우유부단하거나 단순한 조연에 불과하며 어쩌면 면도칼에 찔리기까지 한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

모든 포커스는 ‘여자’에게 맞춰져 있으면서 철저하게 ‘여자’만을 관찰하기 때문에 그 틈바구니에서 남자 캐릭터들은 존재감이 없다. 그는 작품 속에서 사회적, 시대적 모순 속에서 희생되는 여자와 그 언저리의 남자들을 등장시키고 있으며 공통점이라면 여자 캐릭터들의 행복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짧은 행복 이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듯 비극과 운명에 휩싸여 버리고 그 원인을 여자 자신 혹은 언저리의 남자들에게서 찾고 있다. 

배우(카가와 교코)에게 지도(지적)하는 겐지 감독.

▲절제된 감정
미조구치 겐지의 파란만장한 여성편력과 기구한 삶 탓인지 등장인물들의 삶이 대부분 파란만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거나 주인공이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무수한 희생을 통한 ‘상처뿐인 영광’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겐지의 여주인공들은 신파나 감상주의를 거부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등장할 정도였다. 

겐지의 초기 작품들은 유진 오닐이나 톨스토이 등의 작품들로 문예영화를 만들거나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을 따라해 보는 것들이었다. 그의 작업속도는 매우 빨라서 몇 주만에 영화 한편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흥행성적도 좋았다. 겐지는 종종 사회참여적인 경향을 드러내었고 남성중심사회에 반한 여성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였다. 

또한 지다이게키(時代劇)를 접하다 보면 헤이안시대 등에 있었던 일본사회의 모순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법과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이지만 그 속에서 권선징악과 희생된 여성 그리고 해체된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비련의 여주인공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들은 일본인들의 두 특징인 ‘국화와 칼’이라는 명제와도 맞아 떨어진다. 

어떤 형식을 극단적으로 추구하지만 결국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미의식(문화 인류학자 루스 베네틱트의 ‘국화와 칼’에서 언급)이라고 볼 수 있는데 흔히 ‘일본적 미학’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다. 죽음 앞에 놓여진 꽃 국화와 죽음이 폭력과 잔인함으로 결합 된 칼의 상징성까지도 두루 내재 된 일본적 미학이 그의 지다이게키에는 어김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면서 클라이맥스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서 흑백논리에 빠지지 않고 선과 악의 싸움을 냉혹하고 담담하게 ‘정의의 승리’로 이끌어 나간다. ‘치카마츠 이야기’(近松物語. The Crucified Lovers. 1954)는 가장 절제된 감정의 영화다. 자유롭게 연애할 수 없는 시대가 배경인데 처형당할 그 순간에도 주인공들은 ‘사랑’만을 맹세한다.

▲미조구치 정신
미조구치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요다 요시카타(依田義賢)의 ‘미조구치 회상록’ 이라든지 신도 가네토(新藤兼人)의 다큐멘터리 ‘한 영화 감독의 생애 -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ある映画監督の生涯 私家版 溝口健二の記録, 1975, 한국에서는 미조구치 겐지: 더 라이프 오브 어 필름 디렉터로 알려짐) 등을 보면 그가 다나카 기누요(田中絹代)에 대해 치졸한 복수극(청혼을 거절한데 대하여 여성감독이 되는 것을 방해한)을 벌인 것과 유사하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여배우들을 다그치고 자극하였다고 알려진다. 

요다 요시카타는 이러한 관계를 ‘모순 관계’로 정의하였는데 그는 미조구치 겐지와 많은 작품을 함께 했던 터라 신빙성을 더 해준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의 견해는 미조구치 겐지의 태도이다. “피에 굶주린 악마처럼 냉혹하게 그들(여배우)을 채찍질 하였지만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괴로워 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논리를 원했고 이후에는 논리를 뛰어 넘는 도약을 요구했다고 기술했다. 

야마지 후미코

미조구치 겐지의 모든 배우들이 고통으로 울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고통 받은 여배우는 ‘오사카 엘레지’(浪華悲歌, Osaka Elegy, 1936)의 야마지 후미코(山路ふみ子)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미조구치 겐지를 만나기 전에는 은막의 공주로 특별대우를 받았으나 그 앞에서는 처절하게 채찍질을 받았다. 물론 지금도 ‘야마지 후미코 영화상’이 제정 되었을 만큼 대배우지만 미조구치 겐지 특유의 채찍질을 통해 잠재력을 폭발시켰음이 분명하다. 

'기원의 자매' 장면들.

우메무라 요코(梅村蓉子)역시 혹독했다. 그녀는 야마지 후미코와 함께 ‘기원의 자매’(祇園の姉妹, 1936)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다. 오사카 엘레지에서 야마지 후미코와 함께 한 ‘야마다 이스즈’(山田 五十鈴)도 예외가 아니었다. 위에 언급한 여배우들이나 작품들은 일본영화 역사상 걸작 중 걸작들이고 여배우들 역시 최고였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희생은 그의 뮤즈였던 ‘다나카 기누요’였을 것이다. 물론 시나리오 작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가장 많은 시나리오 작업을 했던 요다 요시카타의 경우 미조구치 겐지가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말을 안 했다고 한다. 두 번, 세 번 고쳐쓰기를 반복하고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오면 그때 서야 비로소 말을 했다고 한다.

▲영화사적 평가
미조구치 겐지는 베니스영화제가 낳은 스타이기도 했지만 프랑스 평단의 경쟁 때문에 더 유명해진 감독이기도 하다. 프랑스 비평계에서 나중에는 입장을 바꾸기는 했지만 까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가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를 혹평하면서 미조구치 겐지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프랑스 평단에서 유독 유명했던 겐지 감독.

반면 지금까지도 앙숙관계인 뽀지티프(Positif)는 반대급부로 구로사와 아키라를 신격화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유럽 평단에서 양강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자 그는 사극과 현대극을 넘나들며 요다 요시카타와 함께 일본 사회에 대한 분석을 지속해 나갔다. 그가 정말 ‘최선을 다해’ 만든 작품은 세계 100대 영화 중 하나인‘오하루의 일생’(西鶴一代女, The Life Of Oharu, 1952)이다. 

일본 에도 시대의 작가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가 1686년에 쓴 고전 서민문학 ‘고쇼쿠 이치다이 온나’(호색일대녀, 好色一代女)를 바탕으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여배우 다나카 기누요를 주연으로 만들어졌는데 부인이 아이를 못 낳는 성주에게 아이를 낳아주고는 창녀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는 여인을 엄격한 연출과 절제된 감정으로 완벽에 가깝게 그려냈다. 

말이 ‘서민문학’이었지 우키요조시(浮世草子)라 불리던 현실주의 서민문학은 에도시대 교토 지방을 중심으로 출판된 호색(好色 : 고쇼쿠)물들이었다. 우키요조시의 시초였던 성애소설 ‘고쇼쿠 이치다이 오토코’(호색일대남, 好色一代男, 1682)가 주인공 남성이 전국을 떠돌며 온갖 방탕한 행위를 일삼는 내용이었다면 ‘고쇼쿠 이치다이 온나’(호색일대녀, 好色一代女)는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미조구치 겐지는 사실주의 문학가들에 의해 재평가되어 오늘날 일본 근대 문학의 시조로 평가 받는 에도시대의 호색물을 ‘내용과 형식’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재해석하여 베니스 영화제의 은사자상을 수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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