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한줄 어록/ 재미는 ‘일의 중요한 엔진’이다
CEO 한줄 어록/ 재미는 ‘일의 중요한 엔진’이다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1.01.29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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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고바야시 요우타로(小林陽太郎)
▶경력: 후지 제록스 전 사장, 회장
▶태생: 런던
▶나이: 1933~2015

“이런 경영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こんな経営者はもう出ない)

만나 이야기하면 팬이 된다는 고바야시 요우타로
일본 시사매체 슈칸겐다이(주간현대)는 2015년 9월 23일자 발행 기사에서 고바야시 요우타로(小林陽太郎:1933~2015) 전 후지 제록스 회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슈칸겐다이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이야기하면 이야기 할 수록 그의 팬이 되었다. 취재에 응해준 감사 표시로 화과자를 보내면 며칠 후 지나칠 정도로 공손한 감사의 손편지가 도착했다. 몇십 년 연하의 젊은 상대에게도 항상 경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또 다른 온라인 경제매체 프레지던트(2015년 9월 8일)는 고바야시 요우타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진지하게 말하는 성실한 자세와 댄디한 행동거지. 한번 보기만 해도 팬이 되고 만다. 남자가 남자에게 반하는, 그런 매력을 가진 경영자다. 실제로, 그의 밑에서 일했던 부하들은 정이 많고 상대를 진심으로 신뢰하는 그런 인품에 심취해, 추억을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들이 많다.”

두 매체의 평가가 거의 일치한다. 경영자는 실적으로 평가받기 마련이지만, 죽어서 이런 ‘인간 됨됨이’를 남겼다면 이 또한 성공한 삶이 아닐까. 

영국에서 태어난... ‘국제파 경영자’-‘사회파 경제인’
고바야시 요우타로는 193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게이오대학 경제학부 졸업 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에 유학, 당시 일본에서는 드물었던 MBA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곧바로 아버지가 부사장(그 후 사장으로 취임)으로 있던 후지사진필름(지금의 후지필름)에 입사, 5년간 일했다. 

1963년 후지 제록스로 이직, 마흔네 살 되던 1978년 사장에 취임했다. 1992년엔 회장에 올랐고 2009년 퇴임 후엔 경제단체 ‘경제동우회’ 대표 간사와 종신 간사를 맡았다. 외국 사정에 밝아 ‘국제파 경영자’, 기업의 사업공헌을 강조해 ‘사회파 경제인’로 평가받았다.

그런 고바야시 요우타로는 버블 붕괴 직후인 1992년 ‘좋은 회사 구상’(よい会社構想)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회사의 사업활동과 사회공헌 외에 직원들의 일에 대한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경영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こんな経営者はもう出ない).  시사매체 슈칸겐다이(주간현대)는 2015년 9월 23일자 발행 기사

“재미없이 일하면 사회공헌도 없다”
고바야시는 사회공헌은 ‘재미’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일은 잘되지 않는다. 일이 잘되지 않으면, 회사는 강해지지 않고, 사회 공헌도 할 수 없다.” (面白いと思えなければ、仕事はよくならない。仕事がよくならなければ、会社は強くならないし、社会貢献もできない。)

고바야시는 또 한 인터뷰에서는 “재미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일은 오래 가지 못한다. 재미있다는 건 중요한 ‘엔진’이다.”(おもしろいと思えない仕事は長続きしない。おもしろいということは重要なエンジンです。)고 말했다.  

그런 고바야시는 1998년 젊은 일본 리더들을 육성하기 위한 비영리기구 ‘일본 아스펜 연구소’(The Aspen Institute Japan)를 설립하기도 했다. ‘미스터 후지 제록스’로 불린 그는 2015년 9월 5일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필름 일본 국산화에 기여한 그의 아버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좀 아쉽다. 그의 아버지 고바야시 세츠타로우(小林節太郎:1899~1977))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후지필름 3대 사장을 지낸 세츠타로우는 일본의 필름 국산화에 기여한 인물이다. 

당초 무역상사 이와이상사(岩井商店)에 입사한 그는 1927년부터 런던지점에서 7년간 근무하다 1933년 ‘대일본셀루로이드사진필름’으로 이직해 영업부장 등 중역을 거쳤다. ‘대일본셀루로이드사진필름’은 어떤 회사일까. 

‘대일본 셀룰로이드’(주)가 설립된 건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이 회사는 셀룰로이드의 새로운 수요처로 영화 필름의 장래성에 주목했다. 대일본셀룰로이드는 먼저 필름 기반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사진 필름은 일본에서는 미개척 분야였다. 

그래서 미국 코닥과 제휴를 제안했다. 하지만 코닥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대일본셀룰로이드는 자력 개발을 결심하고 1926년 ‘필름 사업 자립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훗날 대일본셀룰로이드 사진필름부가 독립해 ‘후지사진필름’(지금의 후지필름)가 탄생했다. 

이 후지사진필름의 노력으로 필름의 일본 국산화가 이뤄졌다. 이를 기반으로 1951년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 木下惠介)가 제작됐다. 후지사진필름은 영화 제작 등 실적 확대를 통해 미국 코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필름메이커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이런 과정의 중심에 있었던 이가 고바야시 세츠타로우였다.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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