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㊳ / 황금기 감독열전(2)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㊳ / 황금기 감독열전(2)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1.3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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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서사’(敍事)의 장인 구로사와 아키라]

“하필 구로사와가...”.
이 말은 1950년 일본에서 흑백으로 제작된 범죄 미스테리 영화 ‘라쇼몽’(羅生門, Rashomon, 1950)이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의 유명한 탄식이다. 

당시 이 영화의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는 미조구치 겐지나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나루세 미키오(なるせみきお)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제작자가 “이건 영화가 아니다”고 일갈하며 시사회장을 떠난 일화로 유명했던 데다가 통상적인 지다이게키(時代劇)에 익숙해 있던 다이에이(大映) 지도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다이에이의 대표이자 명제작자인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마저 이 영화의 실험적 측면에 어의없어 하며 “도대체 뭐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었는데, 베니스영화제 수상이라니 충격에 가까웠을 것이 분명하다. 

▲“공짜 손님의 입선전을 조심하라”
그 옛날 영화평론가 정영일 선생이 했다는 유명한 말이다. 물론 나가타 마사이치가 이전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마음대로 주제를 선택’해 영화를 1편 제작해 달라고 의뢰한 것은 100% 팩트였다. 하지만 막상 다이에이의 지도부는 ‘라쇼몽’을 기획 단계부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주제를 이해하기 어렵고 제목(유명한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에서 따왔음에도 불구하고)이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촬영개시의 허가를 내주지 않다가 ‘저렴한 배경 설치 비용’과 야외촬영 위주의 계획을 내고 나서야 비로소 승인이 난 영화였다. 

그런데 모두가 외면하던 이 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서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 영화상까지 거머쥐게 되자 일본 영화계는 비로소 구로사와 아키라를 주목하게 되었고, 나가타 마사이치는 역설적이게도 베니스 영화제의 공을 자기 스스로에게 돌리는 기민함을 보였다. 

구로사와 감독의 촬영 현장들.

그러나 전적으로 이 공은 이탈리아 영화사의 도쿄 지사장인 줄리아나 스트라미졸리(Juliana Stramijolie)의 몫이었다. 그녀의 열렬한 베니스영화제 추천 결과였던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역설도 숨어 있었다. 부정적인 비평과 달리 일본에서는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한국 영화계의 속설에는 ‘씨네21’의 평과 정반대로 생각하고 영화를 선택하면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당시 일본영화계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공이 남달랐던 아티스트
물론 하루아침에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가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문학과 존 포드(John Ford)의 미국 무성 영화에 영향을 받았고 특히 프랑스의 아벨 강스(Abel Gance)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수업을 했다는 점이다. 아벨 강스는 시대를 앞서간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시, 희곡을 쓰다가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한 이력에다가 ‘플래시 백’(flashback, 과거 회상 기법)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영화 ‘바퀴’(LA ROUE, 1922)가 교과서였다고 하는데, 컷과 컷이 빠르게 교차하며 열차가 충돌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시작하여 장장 9시간의 러닝타임에 문학적 인용이 많았고 순환적인 패턴을 반복하였다. 

아벨 강스는 광대한 서사시의 형식을 빌려 영화를 완성했다. 때문에 이쯤 되면 구로사와 아키라가 왜 ‘라쇼몽’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 도제(徒弟)시스템에 가깝던 일본 영화계에서 그의 독보적인 내공은 단숨에 돋보였다. 그는 무성영화의 빛나는 유산을 계승하면서 특히 1920년대 프랑스 전위 영화들의 바탕을 이루었던 ‘방식들’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고 믿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게다가 전쟁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고 트라우마도 없었다. 오즈 야스지로처럼 2번의 참전으로 인해 전쟁 전 그가 보여줬던 ‘유머스러운 달관’을 회복하지 못하는 일도 없었다. 1948년의 ‘만취의 천사’(醉いどれ天使)를 통해 고독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를 통해 신인인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가 발굴되었는데 ‘붉은 수염’(赤ひげ:あかひげ, 1965)까지 그의 영화에서 단골 주연 배우로 활약했다. 

따라서 미후네 도시로 역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작품이 유명해짐에 따라 이름이 널리 알려져 일찌감치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 케이스였다. 또한 사무라이 역할이 큰 인기를 얻어 ‘일본 사무라이’는 곧 미후네 도시로라는 이미지가 고정 되었다.

▲수출을 겨냥해 만든 일본영화
되돌아가서 나가타 마사이치는 라쇼몽의 성공 이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라쇼몽으로 우리는 모든 일본 영화가 다른 나라 영화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영화가 언어, 풍습, 정서의 차이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본 제작진들은 또한 이제 외국 시장에서 그들에게 펼쳐진 가능성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영화의 수입자이기만 했던 일본이 곧 수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성공은 일본영화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고 1957년 ‘유니 재팬 필름’(Uni Japan Film)이 출범하여 자국의 영화를 수출하는 중앙기구까지 설립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성공으로 인해 사무라이, 게이샤, 기모노로 요약되는 ‘풍속영화’가 선호되면서 지다이게키들이 칸, 베니스, 베를린이라는 3대 영화제의 단골 초청 손님이 되어버린 까닭에 반대로 겐다이게키(現代劇)들은 희생되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주요 영화 포스터.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이 때문에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는 그만큼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고 만다. 반면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에게는 기회가 되어 지다이게키는 물론 러시아나 영국의 고전 문학을 원전으로 한 문예물들(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맥베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을 만들기도 한다. 

한때 제작사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독립 프로덕션을 차렸으나 자금난 때문에 사무라이 오락영화를 다수 내놓기도 한다. 독립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긴 러닝타임(상영시간) 때문이었다. 대표적 영화로는 쇼치쿠와 작업한 ‘백치’(白痴, 1951)로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의 소설이 원작이었는데 처음 4시간 30분용으로 편집했지만 후에 2시간 30분용으로 재편집되었다가 다시 2시간 45분용 새필름으로 편집되어 현재까지 상영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4) 역시 러닝타임이 205분이며 한국 최초 수입 일본영화인 결작 ‘카게무샤’(影武者, 1980)는 179분,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원작이라는 ‘란’ (乱, Ran, 1985)이 그나마 짧은 162분이다. 특히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7인의 사무라이’의 경우 도호(東宝)를 질리게 만들었는데 서사적 영화로 기획하여 1년 이상 촬영하였고 처음 예상한 제작비 초과로 촬영이 수차례 중단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는 좀 이기적인 면이 있었다. 할리우드에 정착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늘 현장에서 역동성 있는 편집을 위해 과도할 만큼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원했다. 당시는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시대였으니 제작사의 공포는 엄청났을 것이다. 지금은 디지털이 대세라 되도록 러닝타임 보다 많은 분량을 촬영해 오도록 제작사들이 주문 하지만 필름 시대에는 NG가 나도 ‘역적’ 취급을 받았다. 필름을 아끼는 감독이야말로 제작사 입장에서는 최고였기 때문이다. 

▲겐다이게키도 성공하다
그가 매번 지다이게키만 만든 것은 아니다. 겐다이게키에서도 걸작 중의 걸작들이 있다. 그중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세 작품인데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郎, 1943) ▲‘이키루’(生きる, Living, 1952)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 High and Low, 1963년)이 구로사와다운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다. 

‘스가타 산시로’

먼저 ‘스가타 산시로’는 2편까지 제작이 되었는데 이른바 ‘도장깨기’영화의 원조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일본 유도 초창기 ‘자신이 행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배워 가는 인물’이 주인공인데 당시 영화법상 80분이 제한시간이어서 97분으로 제작된 원본이 편집되고 소실되었다가 구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서 원본이 발견된 영화다. 

무협지의 전형적인 걸개라 스가타 산시로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진정한 유도인의 길을 걸으면서 도장깨기를 하고 최후의 결전도 치르는데 신사에서 만난 아름다운 처녀 사요가 숙적 유술가 무라이의 딸임을 알고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보면 최배달 선생이나 부루스 리(李小龍, Bruce Lee) 그리고 엽문(葉問) 시리즈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이키루’

‘이키루’는 인생 영화로 권하고 싶을 만큼 깊은 울림을 준다.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50개가 넘는 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1997년에는 세계 10대 고전영화로 선정되었다. 시청 시민과 과장인 와타나베는 위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수술은 불가능하고 수명도 몇 달 밖에 안 남은 그는 처음 유흥으로 마지막 시간을 보내려 해 보지만 이내 자신의 마지막 삶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단 하나라도 끝마치고 죽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면서 비만 오면 물웅덩이로 변하고 온갖 벌레들이 우굴거리는 공터를 어린이 공원으로 재개발 하는 것이다. 온갖 냉대 속에서도 결국 완성하고 개장하게 된 그는 개장식 전날 눈 내리는 공원의 그네에 앉아 노래를 부르다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극중 대사처럼 뜻깊게 ‘살고 싶어’진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은 현대극 스릴러로 사족이 필요 없는 걸작이다. 에드 맥베인(Ed McBain)의 소설 ‘왕의 몸값’(Kings Ransom)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휴머니즘’이 전반적으로 영화를 지배한다. 신발제조회사의 중역인 곤도와 유괴범의 이야기로 보면 되는데 회사의 경영권 장악을 앞두고 돈을 마련해 승리를 목전에 둔 그에게 느닷없이 자신의 아들이 유괴되었으니 몸값 3천만엔을 내라고 하는 전화를 받게 된다. 그는 경영권을 포기하고 몸값을 지불하기로 하지만 이내 그것이 자신의 아들이 아닌 운전기사의 아들임이 밝혀지고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마침내 그는 고민 끝에 몸값을 지불하고 아이를 구한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모든 부를 잃게 되고 명성만 얻지만 이때 극적으로 범인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쉽게 범인을 검거하지 않는다. 요코하마의 뒷골목을 무대로 ‘징역 15년’으로 끝날 범인을 경찰들과의 공조로 ‘사형수’로 만들어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몸값도 대부분 되찾는다. 다만 흥행 후 유괴사건 빈도가 높아지고 이 영화에서 나온 몸값 전달 수법을 모방한 범죄 등의 부작용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유괴범에 대한 ‘형법 개정’도 이끌어 냈다.

1990년 3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팔순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동양인 최초로 공로상을 받았다. 좌우에 선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는 아키라를 스승으로 모셨다.  

▲에필로그 – 오마쥬(hommage)
세계적인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를 단 몇 장의 원고로 소개하기에는 세계 영화사에 끼친 영향력이 너무 크다. 특히 서양의 영화계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에 대한 찬사와 오마쥬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할리우드에서는 정착에 실패했지만 수많은 리메이크 작품들을 남겼다.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클린트 이스트 우드(Clint Eastwood)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스타워즈(Star Wars)시리즈의 제다이(Jedi) 캐릭터는 당연히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다. ‘요짐보’(用心棒, Yojimbo, 호위무사, 1961)는 ‘황야의 무법자’의 원조 영화인데 이후 ‘Body Guard’ 영화의 원전이다.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4)는 ‘황야의 7인’(The Magnificent Seven, 총 4편에 2016년 리메이크 등)의 원전이면서 ‘벅스 라이프’(A Bug's Life, 1998),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 1981) 등은 아예 오마쥬를 했다고 밝힌 작품들이다. 

심지어 냉전시절 구 소련과 합작하여 ‘데르수 우잘라’(Dersu Uzala, 1975)로 1976년 아카데미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이력도 있다. 마지막으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들 속 배경은 항상 날씨 효과를 동반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은 한국의 많은 영화들에서도 발견 되는데 비가 오는 장면에서 결투를 벌이거나 추격하는 씬(scene) 등이 대표적이다.<미국 LA 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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