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쿠데타와 거제 조선소 노동자 Y
미얀마 쿠데타와 거제 조선소 노동자 Y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1.02.08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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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에 저항한다는 의미의 ‘세 손가락’ 인사 표시를 하며 평화 시위를 벌이고 있는 미얀마인들. 사진 출처=미얀마 독립저널리즘 매체 ‘프런티어미얀마’(frontiermyanmar) 

[발행인 칼럼]

기자에게는 미얀마인 동생(Y로 익명 처리)이 한 명 있다. 물론 혈연 관계는 아니다. 기자가 다른 매체에서 일했을 때 취재 관계로 알게 됐다.

Y는 경남 거제시 대우해양조선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다. 요즘 그의 페이스북엔 고국의 군부 쿠데타를 항의하는 사진들이 자주 올라온다. 한국이라는 외국 땅에서 쿠데타를 바라보는 Y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할까. 그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2015년 거제에서 만난 미얀마 청년
다른 매체에서 일하던 2015년 추석 무렵, 기자는 조선경기 불황을 취재하기 위해 경남 거제시를 두 차례 방문했었다. 거제엔 굴지의 대우해양조선과 삼성중공업조선소가 지역 경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한때 ‘부자 도시’였던 거제는 조선 경기가 장기간 침체되면서 휘청이고 있었다. 

당시 대우해양조선의 노조 간부, 길거리 트럭 양말 장수, 식당 주인 등을 만나 바닥 경제 이야기를 들었다. 취재를 마친 어느 저녁 날, 옥포 외국인 거리로 향했다. 저녁을 먹을 참이었다. 식당엔 외국인 노동자 몇몇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서로 힐끗힐끗 보다가 합석을 했다. 소주도 몇잔 곁들였다. 

대학에서 법학 전공...거제 조선소에서 ‘용접’일
그 자리에서 한눈에 봐도 심성이 착해 보이던 Y를 처음 만났다. 한국말을 곧잘 하는 그는  기자를 ‘혀응’(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붙임성이 좋았다.

Y는 미얀마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우해양조선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2011년부터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미안마 ‘삐에’(pyay)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는 말을 듣곤 놀랐다. 그런 그가 조선소에서 하는 일은 용접이다. 

그날 이후 Y와 기자는 페이스북과 전화로 가끔 연락을 주고 받았다. 시간이 지나 2017년 5월, Y의 페이스북에 “미얀마로 간다”는 글이 올라왔다. “조선소 사정이 어려워 귀국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회사가 경비 절감을 위해 무급휴가를 실시하고 있는데, 한달간 고향에 갔다 온다고 했다. 그러곤 얼마 후 페이스북에 그의 어머니 사진이 올라왔다.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을 터. 그 몇 개월 뒤, 다른 조선소에서 크레인 사망(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다쳤다) 사고가 나면서 잠시 Y와 통화했다.

“형, 한국 같은 선진국에서 왜 이런 사고가 나?” 
“글쎄다.” 
당시 기자는 Y가 한국에서 다치는 일 없이, 나중에 건강한 몸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길 바랐었다. 

Y의 페이스북을 통해 본 미얀마 분위기
Y는 이후 가끔 작업 중인 사진 등 일상의 모습을 페이스북에 올리곤 했다. 그러다 최근 미얀마 군부가 주도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Y의 페이스북은 바빠졌고, 현지 사진의 분위기에선 긴장감이 돌았다.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았다. 

Y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쿠데타 반대 시위 사진들. 

“너무 걱정말고 기운내.”
“OK~ 혀응.”

미얀마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외신 기사를 보면, 옛 수도 양곤 등에서 미얀마 시민들의 쿠데타 반대 시위가 더 확산되고 있다. 시위대는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집권 여당 민주주의민족연맹(NLD)의 상징색인 빨간색을 입는가 하면, 독재에 저항한다는 의미의 ‘세 손가락’ 표시를 하며 평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의 불길이 어디까지 번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착한 심성의 동생 Y의 나라가 다시 평온을 되찾길 희망한다. <발행인,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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