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미국 리포트/ LA 한인타운의 ‘따로 국밥’(?)
생생 미국 리포트/ LA 한인타운의 ‘따로 국밥’(?)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3.11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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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한인타운 이정표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가장 연구대상의 민족이 있다면 바로 ‘한국인’(KOREAN)들이다. 지금 미국에는 다양한 종류의 한국인들이 서로 갈등하며 때로는 화합하고 견제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분단이 고착화 되는 동안 한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자의반, 타의반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치 하나의 용광로처럼 다시 모이는 곳이 미국이었다. 

이러한 역설은 다양한 종류의 한인사회 분열을 가져왔다. 우선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다고 해도 호남과 비호남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물론 그럴 리가 있느냐 반문하겠지만 외국에 이민 와서도 ‘지역감정’이 존재한다. 그건 이민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더욱 심화 되어 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의 ‘조선족’이 있으며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국가 출신(구소련)의 ‘고려인’이 있다. 

일본계에서도 ‘거류민단계’와 ‘조총련’ 그리고 귀화한 ‘일본국적’의 한인들이 있다. 북한을 탈북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부류와 탈북자 출신이지만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경우 그리고 극소수이지만 ‘북한’ 국적의 한인들이 있다. 이런 복잡한 한인사회의 DNA는 때로 미국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같은 언어를 쓰고 뿌리도 같은 것 같은데 하나가 되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의 이야기는 복잡하고 서글픈 ‘한인’들의 분열사에 대한 것이다.

LA 한인타운 전경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역사
필자는 우선 로스앤젤레스에 대해서만 다뤄 보겠다. 다른 지역에도 코리아타운(일명 K타운)이 있지만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미주지역에서 많은 (범)한인들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범’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양해하기 바란다. 다양한 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70년대 LA한인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1만명으로 통칭했던 남가주(남캘리포니아) 한인 인구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12만~15만명으로 불어났고, 첫 번째 (한인)업소록에 69개에 불과했던 한인업소는 10년이 채 못돼 ‘올림픽’(Olympic Boulevard)과 8가에만 300여개로 늘어났다. 

사실 한인 이민의 역사는 기구하다. 사탕수수 노동자와 유학생들이 소수 유입되던 시대를 거쳐 한동안 미국 이민은 ‘기지촌 여성’들의 국제결혼으로 인한 유입이 컸다. 따라서 인구증가가 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산업연수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영화 ‘미나리’처럼 유대인들도 포기한 우범지대를 스스로 찾아가 일터를 만들었다. 단순한 공업인구도 있었지만 ‘병아리 감별사’ 같은 직종도 있었고 세탁소나 리쿼스토어(Liquor Store, 편의점이 없는 미국에서 술과 담배 등을 파는 상점)를 경영하거나 핸디맨(Handy Man, 전기 일이나 페인팅, 잔디깎기, 풀장 청소 등 다양한 일을 담당)으로 일하기도 했다. 

서독에 갔던 광부나 간호사들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온 경우도 있었는데 ‘올림픽’(Olympic Boulevard)과 8가에 모여 들었다. 이때만 해도 지금의 코리아타운 지대는 ‘우범지대’로 불렸다. 주로 히스패닉들이 거주하는 동네였는데 집값이 매우 쌌고 일본인들의 타운인 ‘리틀 도쿄’(Little Tokyo)나 ‘차이나타운’(China Town)과도 거리가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1973년 한인들의 구심점이 될 ‘코리아 타운’ 건립을 구체적 목표로 한국타운 번영회가 2월 21일 정식 발족했다. 올림픽가 한인업소 주인 10여 명이 창립회의에서 놀만디 애비뉴와 웨스턴 애비뉴 사이를 1차 코리아타운 후보지로 구상했으며 한 달 후 올림픽과 8가, 웨스턴과 벌몬 구간으로 타운 규모를 확대 추진키로 하고 한글간판달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LA 한인타운이 드디어 태동하게 된다. 이때 생겨난 말이 ‘미국은 먼저 와서 말뚝을 박으면 임자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는데 훗날 한인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게 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1974년 11월 3일 올림픽가에서 코리아타운 번영회가 주최하고 한국일보 LA지사 주관으로 벌어진 제1회 코리안퍼레이드에 3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면서 본격적으로 한인들의 존재감이 알려졌다. 인구는 40만으로 통칭 되었고 업소 수는 2만을 넘어섰다. 1981년 8월 ‘코리아타운’ 표지판이 올림픽과 벌몬, 웨스턴과 올림픽 코너에 등장, 코리아타운이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고, 10월에는 8가에 한인파출소가 출범, LA경찰국과 한인 커뮤니티가 범죄퇴치를 위해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1970년대 초창기 한인타운 축제

특이한 것은 미국 언론에서조차 놀랄 만큼 한인들의 높은 주택 보급률이었는데 그만큼 투자 열기가 과열되어 결국 한인 경제의 핵심은 부동산 취득이라는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겼다. 가격이 폭등하는 것은 물론 경쟁까지 붙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미국은 원래 집을 사기보다는 렌트(rent)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너도나도 아파트와 상가를 다투어 매입했고 순수한 한인 자본뿐만 아니라 한국 대기업까지 가세하는가 하면 미국 외 재외동포들까지 끌어들이게 되어 결국 1990년대 코리아타운 경제 불황을 가져오게 된다. 유지할 능력도 없이 일단 사고 보자는 풍토가 불러온 비극이었다. 

또한 한국의 민주화로 한인들의 구심점이었던 ‘교민회’가 정치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교민회장이 되면 한국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차출되었고 앞다투어 출마하기 시작했다. 또한 코리아타운의 비대화는 유흥업소와 투기 등으로 만만치 않은 후유증이 생겨났는데 이때 소위 말하는 한국의 조폭들이 유입되어 미국에는 없었던 ‘권리금’이 생겨나고 이권다툼으로 인한 구역(일명 나와바리) 싸움까지 전개되었다. 

이때부터 호남 출신들과 비호남 출신들간의 라이벌 의식으로 인한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냉전시대의 종식은 구소련 지역의 고려인들과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의 조선족들까지 타운으로 몰려들게 하면서 결국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1990년대 후반~현재
한인들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L.A 흑인폭동이 일어난 후 하루 6명꼴로 주택차압을 당하던 한인 파산이 1년 450명을 기록하는 등 1990년대 중반 넘게 불경기가 계속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내막이 있었는데 흑인폭동의 피해를 받지 않은 한인들도 스스로 자기 자산을 파괴한 후 보상금을 탄 것이다. 

그러나 한인들 사이에 ‘한국인은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말이 돌면서 서로서로 그 사실을 밀고했다. 또한 당시에는 인터넷 등이 발달 되어 있지 않아 ‘과거’를 알 길이 없으니 많은 한인들이 한국에서의 삶을 ‘뻥튀기’하는 경우가 속출해 사기꾼들이 넘쳐났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이민을 왔다면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IMF로 인한 도피성 이민과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위한 이민이, 그리고 동기가 불순한 도주 이민(부도, 사기 등)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인타운 축제

이때부터 한인사회의 헤게모니(hegemony)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졌다. 한인회장 선거에서 불복이 잦았고 영호남 회장이 따로 뽑혀 L.A시장이 오전에는 영남 오후에는 호남 회장을 찾아간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교회와 성당, 사찰마저도 호남과 비호남으로 나뉘어 다녔다. 또한 한국경제의 지나친 의존으로 입은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인들의 편법이민 사례가 급증하여 결국 미국의 이민법이 한인들 때문에 개정되기도 했고 분열된 한인사회로 인해 한인 통역관이 상주해 오던 ‘8가 파출소’가 정상운영이 되지 않기도 했다. 심지어 한인경제가 한국 정치인들의 비자금 세탁 창구가 되는가 하면 온갖 추문이 일어나면서 위상이 추락하는데도 하나가 되지 못하여 중국인들이 부도난 코리아타운의 건물들과 주택들을 대거 매입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 모든 것이 단합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견제하는 풍토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로 한인사회는 또다시 갈라졌다. 또한 재일교포들에게는 ‘쪽발이’로 폄훼하고 조선족들이나 고려인들은 아예 하대를 하였다. 선이민자들과 후이민자들간의 세대차이도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한인들을 대하는 미국 주류사회는 착잡하기만 하다. 대화창구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결국 내놓은 해법은 한인들이 거주하는 카운티(county)마다 한인회를 분리하는 것이었는데 이마저도 또 동서남북으로 갈라졌다. 

▲방글라데시와 영토전쟁?
이러한 한인커뮤니티가 기적처럼 하나로 똘똘 뭉친 ‘웃픈’ 사례가 딱 세 번 있었다. 사실 코리아타운은 한인들의 주거 밀집이 아닌 ‘비즈니스 밀집’지역이다. 주거지역에는 히스패닉들이 더 많이 산다. 낮에는 활기차지만 종종 밤에는 우범지대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방글라데시인들이 이점을 노려 코리아타운 내의 핵심지역을 ‘리틀방글라데시’로 지정해 달라는 청원서를 전격 제출한 것이다. 

지난 2008년의 일이었는데 한인들이 빠져나간 틈새를 이들이 발 빠르게 메꿔서 1만5천명(당시 인구로 현재는 5만명으로 불어났다) 가량이 코리아타운의 특정 지역에 밀집하여 거주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방글라데시 축제까지 열면서 버젓이 코리아타운을 가로질러 행진을 하는 만행(?)을 저지르더니 급기야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리틀방글라데시를 막아내자!'. 한인유권자 등록 광경.

어처구니 없지만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리틀 도쿄’와 ‘차이나타운’과 달리 ‘시의회 의결 구역 명명’절차를 거치지 않아 공식적인 ‘코리아타운’이 아닌 그냥 한인들이 임의대로 부른 ‘코리아타운’이었던 것이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법대로 하면 L.A 한인타운이 공식적으로 반토막이 나려는 순간 유권자 투표를 이끌어 냈고 이 과정에서 한인들의 묻지마 단결이 일어난 것이다. 

만일 청원이 받아들여지면 코리아타운 내에 ‘방글라데시 주민의회’가 시가 인정한 공식 기구로 지정되려는 순간에 시청 앞에서 한인들의 24시간 릴레이 ‘1인시위’가 일어났다. ‘윌셔 주민센터’에는 투표로 이기기 위해 유권자 등록 붐이 일었다. 출신지도 종교도 모두 따지지 않았고 김밥, 생수, 빵 등 응원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코리아타운의 '든든한 지킴이' 올림픽경찰서(OLYMPIC POLICE STATION) 폐지를 막자는 운동. 

결국 한인들의 일방적인 승리(LA 한인타운 분리안 반대투표 98.5%)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신기하게 바라본 것은 방글라데시인들이었는데 똑같은 이민자 신세 임에도 ‘쪽수’에서 현저히 밀렸지만 평소의 코리언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절대 단결이 안 되리라 확신했던 그들은 혀를 내둘렀다. 

리틀방글라데시(위 왼쪽 사진)와 올림픽경찰서 모습. 

또 하나의 사건은 ‘한인타운 홈리스 셸터(노숙자 쉼터) 설치’를 똘똘 뭉쳐 막은 것이고 코리아타운의 든든한 지킴이 올림픽경찰서(OLYMPIC POLICE STATION) 폐지를 막은 것이다. 모두 다 ‘자발적인’ 한인들의 단결로 이뤄낸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를 지켜 본 미국 주류사회의 반응은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시라. 또 이 사건 이후 코리아타운은 화합을 이뤄냈을까 하면 다시 평소대로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어글리 코리언’(Urgly Korean)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를 피해 코리아타운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점점 늘어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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