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㊵/ 황금기 감독열전(4)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㊵/ 황금기 감독열전(4)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3.28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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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감독

여성영화의 명수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여성영화의 명수’(女性映画の名手). 이 말은 일본 영화계에서 나루세 미키오에게 정식으로 붙여준 별칭이다. 지난 회에 언급했던 바와 같이, 당시 일본 영화계의 쌍벽은 쇼치쿠(松竹)의 간판이었던 오즈 야스지로와 도호(東宝)의 나루세 미키오(成瀨巳喜男)라는 것이 정설이다. 비록 해외 영화제의 굵직한 수상 경력은 없다 하더라도 ‘키네마준보'(キネマ旬報) 1위라는 일본 관객들과 평단의 지지가 있었고 흥행이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솔직히 영화가 아무리 해외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고 해도 정작 국내 관객들에게 외면을 받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해외 영화제 수상을 계기로 ‘역주행’ 흥행을 한다고 해도 그건 ‘컨벤션 효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루세 미키오는 흥행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감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 흥행의 요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하면 그 시절 어떤 감독보다도 ‘쇼민게키(庶民劇, 서민극)’의 대가였다는 점이다. 물론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한 감성 멜로 드라마를 아주 많이 다뤘지만 여성 관객들의 심금을 울릴 만한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아 종종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작품들과 비교하는 경향이 많다.

일본 근대 여성 작가 하야시 후미코.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일본 근대 여성 작가인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다. 그녀의 소설을 여러 편 영화로 옮겼고 흥행에 성공했으며 ‘방랑기’(放浪記, 1962) 같은 영화는 아예 헌정되기도 했다. “악평을 들으면 넋이 홀라당 나가서 썩은 생선처럼 이삼일 이불을 덮어쓰고 자버린다”라거나 “나에게 종교가 있다면 그저 꾸준히 쓰는 것이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 기분이다.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결국 ‘만년 문학소녀’다.”라는 유명한 마감사를 남긴 그녀다.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난한 부모를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돌아 다니다가 여학교 졸업 후 도쿄에 올라와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했던 그녀였기에 당연히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들 속 여주인공들 역시 하야시 후미코의 체험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1930년 자신의 자전적 소설 ‘방랑기’를 출판해 당시로는 엄청난 부수인 60만부를 판매,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그녀의 작품은 생생하게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자전적이면서도 여성의 자립과 가족관계, 사회 문제를 다뤘던 그녀였기에 ‘방랑기’에 등장하는 후미코 역시 값싼 동정을 베풀며 접근하는 남자들에게는 철벽녀이면서 배가 고파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며 사랑만은 값지게 하고 싶어한다. 

그 누구보다도 나쁜 남자들을 사귀어 보았던 그녀였기에 자기를 좋아 해주는 남자들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와의 사랑을 꿈꿨던 만큼 영화 속 대사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강인한 작가 자신의 사상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이 베스트셀러였기에 흥행에 있어서도 기본은 할 수 있었는데 원작을 스크린에 풀어내는 나루세 미키오의 솜씨도 일품이었다.

‘일본영화의 네 번째 거장’으로 평가받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

▲기본에 충실한 감독
무엇보다도 기본에 충실했다. 영화문법에 있어서 기본적인 양식적 기술들(카메라의 움직임, 오버랩, 클로즈업 등)을 모두 사용했으며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과도하게 간섭하지 않으면서 간소한 서사(epic)구조로 극을 풀어나갔다. 다만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대부분 슬프고 암울하며 눈물 많은 그의 영화는 훗날 상업주의로 흘러가는 일본 영화계의 흐름에는 맞지 않았다.

따라서 황금기 이후 변화된 영화 환경에는 적응하지 못했고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여성들의 비극적 로맨스 역시 황금기 이후 경제호황과 물질만능주의로 전쟁의 트라우마가 극복된 전후세대들에게는 그 비통함이 어필되지 못했다. 오즈 야스지로나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같이 늘 한결같은 감독이었기 때문에 60년대 중후반 문화교양인(文化敎養人)으로서 텔레비전으로의 변신을 하는 여타 감독들과 달리 한길만을 걸었다. 

특히 ‘위기의 부부’에 대한 이야기나 퇴락한 게이샤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 하야시 후미코의 작품들을 재해석 해내면서 감정의 억제와 절제를 스크린에 담아 냈다. 반면 그는 희극을 만드는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쇼치쿠의 방침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닮은 듯 다른 오즈 야스지로와의 공존을 피해 도호(東宝)로 이적하게 된 것이 어쩌면 전화위복이 되었을 것이다. 

또 3년간의 짧은 결혼생활이 파국을 맞은 까닭에 두 남녀의 사랑과 갈등, 결별을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임권택 감독처럼 가난한 집안 환경 탓에 생계를 잇기 위한 직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케이스이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서민극을 통해 하층민들의 삶을 서정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영화의 네 번째 거장’
그는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일본영화의 네 번째 거장(巨匠)’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단조로운 화면은 그가 위의 네 감독들 중 가장 평단에서 과소평가 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여성영화의 명수답게 여성 시나리오 작가들과 작업을 주로 했으며 대사보다는 시선과 몸짓 표정 등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한 감독이기도 했다.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
‘약운’(鰯雲, 조개구름, 1958)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1967)

그리고 그의 작품 속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로맨스와 파국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 속 심리변화가 동반되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목들도 ‘흐르다’(流れる, 1956), ‘흐트러지다’(乱れる, 1964),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 같은 것들이 많다. 여성의 마음을 ‘구름’으로 묘사한 경우도 있어서 ‘부운’(浮雲, 뜬구름, 1955), ‘약운’(鰯雲, 조개구름, 1958, 나루세 미키오의 첫 시네마스코프이자 컬러영화),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1967) 등 이른바 구름 시리즈 영화들도 있다. 

사실 그의 영화 속에서 날씨는 빠질 수 없는 소품이기도 하다. 때문에 프랑스의 영화역사가 막스 테시에(MAX TESSIER)는 그의 영화를 일컬어 구름의 불안정성을 예를 들어 ‘우키요(浮世)’ 즉 부유(떠 있는)하는 세계의 항해사와 같다는 묘사를 했다. 아마도 비통한 주인공들의 삶과 심리, 잡힐 듯 말 듯한 그들의 사랑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하라 세츠코(原節子)가 주연한 영화 '밥'(めし, 1951)

그의 영화에 있어서 비운 혹은 비련의 여주인공이면서 완고한 스타일은 주로 그의 페르소나인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가 부드럽고 평화로운 것 같으면서도 고통과 수모를 겪어내야 하는 여주인공에는 하라 세츠코(原節子)가 등장한다. 따라서 여주의 이름만 보고도 주제를 가늠할 수 있는 친절함을 보인다.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
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타카미네 히데코다. 총 89편의 작품 중 무려 15편에 그녀가 등장한다. 다만 당대 인기 절정의 청춘스타였던 다카미네 히데코를 버스 안내양으로 캐스팅하여 하층민들의 삶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서민극 ‘버스차장 히데코’(秀子の車掌さん, 1941)에서는 밝고 명랑한 이미지로 나오지만 다른 작품들 속에서는 어김없는 비련의 여주인공인 경우가 허다하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89편 작품 중 15편에 출연한 타카미네 히데코. 오른쪽 위는 ‘버스차장 히데코’(秀子の車掌さん, 1941). 아래는 그녀에게 연기 지도하는 감독.

이중 한국에도 박스세트로 소개된 바 있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女が階段を上る時, 1960), ‘방랑기’(放浪記, 1962), ‘흐트러지다’(乱れる, 1964)의 세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16년은 한국에 나루세 미키오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해이기도 했다. 시네마테크 서울(서울아트시네마)를 필두로 부산 영화의 전당을 거쳐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까지 거치는 동안 총 26편의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중 가장 호평을 받았던 작품들이면서 ‘나루세 미키오의 대표적 여성 3부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3편 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등장하는데 영화평론가 야마네 사다오(山根貞男)가 말하던 ‘감정의 리듬’으로 영화를 풀어간다. 즉 대사로 구구절절이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공간에 두 남녀를 몰아넣고 절제, 시선, 만남과 회피, 몸짓을 통해서 관객에게 어필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女が階段を上る時, 1960)

먼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사랑했던 남편을 잃고 생계를 위해 동경의 긴자에 있는 고급바 ‘라일락’에서 마담으로 일하고 있는 게이코의 이야기다. 서른 살이 다 된 그녀는 재혼을 하든지, 자기 바(bar)를 열든 지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가족들은 계속 그녀에게 손을 벌린다. 많은 마담들이 부자 손님을 만나 사치를 만끽하는데 반해 게이코는 하루하루가 전쟁일 뿐이다. 

고급 아파트 월세를 내야 하고 바를 유지해야 하며 소아마비 자식을 둔 오빠까지 도와야 한다. 이 와중에 남자들에게 숱한 실망을 하게 되지만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그녀에게는 실망도 사치일 뿐이다. 

‘방랑기’(放浪記, 1962)

‘방랑기’는 베스트셀러가 원작으로 비록 까페 ‘기린’에서 일하지만 ‘시인’이 되고자 하는 가난한 후미코의 이야기다. 시인이 되기 위해 작가인 남자와 동거를 하기도 하고 때로 버림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의 작품이 ‘방랑자의 수첩’이라는 잡지에 실리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얼핏 보면 이 과정이 방랑자의 그것과도 같지만 이 여정을 이겨낸 것은 후미코 그 자신이다. 타카미네 히데코의 명연기가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흐트러지다’(乱れる, 1964)

‘흐트러지다’는 필자가 가장 애착을 갖고 소개하는 작품이다.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레이코는 조그만 잡화상을 운영하며 20년 가까이 늙은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을 돌보고 있다. 그녀와 주변은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으로는 곪아있다. 재개발을 바라는 시누이들은 레이코가 떠나주기를 고대한다. 

게다가 동네에 새로 생긴 ‘수퍼마켓’의 등장으로 잡화상 영업은 큰 타격을 받는다. 가뜩이나 심경이 복잡한데 시동생 코지는 레이코에게 순수한 사랑을 고백한다. 이에 놀란 레이코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린 까닭에 집을 떠나기로 하는데 시동생 코지가 따라 나서게 되고 ‘야간열차’라는 공간에 내 던져진 두 남녀는 이때부터 ‘감정의 리듬’을 탄다. 레이코가 코지에게 차마 말로 표현을 하지는 못 하지만 마음속 그 완고함이 ‘흐트러지는’ 순간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부운'(浮雲, 뜬구름, 1955),

▲고통과 희생의 삶이지만...
비록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삶이 고통과 희생으로 점철되어 있음에도 영화 속 그녀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부운’의 경우가 그렇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키코는 유부남(도미오카, 모리 마사유키 분)과의 비극적 사랑에 매달린다. 남자는 아내와 이혼도 하고 다른 여자들과 동거도 하면서 잊을 만하면 유키코를 찾는다.

그런데도 유키코는 그때마다 한결같다. 심지어 몸이 아파 요양 온 온천에서까지 남자는 다른 여자와 동침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여자는 남자와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제목이 번역하자면 ‘뜬구름’인가 싶을 만큼 여자의 사랑은 일방적이고 처절하다. 그 사랑이 어떤 보상도 해주지 않은 체 유키코는 도미오카의 벽지 근무마저 따라나섰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처음으로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보는가 싶더니 갑작스런 죽음이라니. 그런데 도미오카는 ‘늦었지만’ 그제서야 깨닫고 오열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꽃의 생명은 짧고 인생의 괴로움은 끝이 없어라”라는 엔딩 크레딧을 보노라면 관객들은 어느새 그 처절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죽어간 유키코의 삶 앞에서 “여자는 어디에나 있다”던 도미오카의 호기마저 무너뜨린 ‘사랑’의 위대함에 함께 슬퍼한다. 

하야시 후미코 원작의 총결산으로 기획된 나루세 미키오의 최고작이며 그 해 ‘키네마준보 베스트 텐 1위’와 감독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걸작 중에 걸작이면서 관객들을 ‘유키코의 사랑’에 굴복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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