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㊶/ 황금기 감독열전(5)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㊶/ 황금기 감독열전(5)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4.2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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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

‘전·후 일본을 위로한’ 기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미국 LA=이훈구 재팬올 미국대표>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을 황금기 감독 열전에 포함하게 된 것은 지난 2013년 개봉한 영화 ‘시작의 길’(한국에서는 ‘기노시타 케이스케 이야기’로 개봉, はじまりのみち, Keisuke Kinoshita Story, 2013)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제2차 세계대전 경험을 토대로 만든 영화로 검열문제로 인해 영화연출을 잠시 쉬고 있을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데 ‘전쟁의 한 가운데서 병든 어머니를 피난시키는 과정에서 가족 간의 사랑과 영화적 영감을 얻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다. 그의 이름을 주요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줄곧 ‘사회를 풍자한 희극영화로 명성을 얻은’ 감독으로 나온다. 그러나 필자는 모성애(母性愛)에 관해 평생 이야기한 감독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 ‘시작의 길'
영화 '육군'

그의 영화인 ‘육군’(陸軍, Rikugun, 1944)은 전시 일본의 국책영화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만든 영화였으니 당연히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영화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노시타 케이스케는 ‘천황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 입대하는 아들’로 그려져 입영을 축제로 보이게 하려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그저 아들 때문에 아파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긴장한 듯 옅은 미소를 날리며 묵묵히 행진하는 아들과 달리 외롭고 겁에 질려 기도하는 어머니(다나카 기누요)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응원하는 군중들과 깃발을 흔들며 지지자들과 함께 퍼레이드 속으로 사라지는 보병대열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후 마지못해 개봉은 시켰지만 검열당국은 그에게 영화를 쉬게 하였다. 

당연히 영화 ‘육군’은 ‘시작의 길’ 초반과 중간에 삽입되었으며 삭제되지 않고 나온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그 유명한 기도 시로(城戸四郎)와 기노시타 케이스케가 영화 ‘육군’과 관련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검열 당국에 의해 영화를 못 찍게 되었으며 회의감을 느껴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독을 그만두기로 한다. 그리고 공습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안전한 곳인 하마마쓰(浜松)로 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영화를 자주 본다는 ‘짐꾼’(하마다 가쿠, 濱田岳)과 동행하게 된다. 

압권은 자신이 영화감독임을 숨기고 그저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만 소개했는데 짐꾼이 강가에서 영화 ‘육군’을 이야기하며 그 감동을 말하는 장면이다. 비록 검열 당국은 야만적으로 영화를 평가했지만 관객의 눈은 정확한 것이다. 역사적 배경을 떠나 영화감독으로서의 좌절과 부활을 잘 표현해내었는데 특히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역을 맡은 ‘카세 료’(加瀬亮)의 절제된 연기가 일품으로 마츠모토 카나(松本華奈)감독의 ‘도쿄 오아시스’(東京オアシス Tokyo Oasis, 2011)에서 보여주었던 이지적 이미지와 절묘하게 잘 맞아 ‘인물론’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고 있다.

▲1950년대 가장 신뢰받았던 감독
기노시타 케이스케는 1950년대 일본 감독들 중 가장 영화계에서 신뢰를 받았던 감독이다. 그는 일단 탄탄한 기본기가 있었던 감독이었다. 하마마쓰 공업학교(현 시즈오카 대학)와 도요(東洋)사진학교를 나왔으며 일단 사진을 전공한 이력으로 1933년 쇼치쿠 촬영소(松竹撮影所)의 현상부를 거쳐 쿠와 스바루(桑原昴)의 촬영 조수가 되었으며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한 후 1936년 조감독이 되었다. 

영화 ‘꽃피는 항구’

1943년 영화 ‘꽃피는 항구’(花咲く港)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꽃피는 항구’는 한 편의 소극(笑劇)으로 극작가 기쿠타 가즈오(菊田一夫, 기쿠타 가즈오 연극상이 제정됨)의 희곡을 각색하여 만들어져 신인감독에게 주어지는 영예인 ‘야마나카 사다’오(山中貞雄)상을 수상했다. 그는 일본 평단과 관객들에게서 만큼은 항상 지지를 받아서 늘 데뷔 시기 부터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를 제치고 수상을 했다. 

그는 생전에 교차편집과 플래시 백(flashback, 다른 장면들을 차례차례 필름 단편으로 연결한 몽타주 기법의 하나로 주로 회상신에 쓰임) 그리고 색감을 중요하게 여겼다. 후지필름의 협력을 얻어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인 ‘카르멘 고향에 오다’(カルメン故郷に帰る, 1951)를 만들어 NHK 영화 베스트 10 1위에 이어, 일본영화문화상(日本映画文化賞)을 수상한다. 

영화 ‘기쁨도 슬픔도 세월 속에’

그 역시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와 많은 작품을 했으며 이 작품에서 청순하고 쾌활하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스트립댄서를 연기하게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인론’(日本人論)으로 지금도 불리우며 쇼치쿠(松竹) 걸작 10선에 포함된 영화 ‘기쁨도 슬픔도 세월 속에’(喜びも悲しみも幾歳月, Times of Joy and Sorrow, 1957)를 내놓는데 벽지를 전전하는 등대지기의 인생을 통해 전·후 일본인들을 위로한다. 

1932년 젊은 등대지기가 새 신부와 함께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결혼을 통한 유대가 갖는 중요성을 빠르게 알게 되고 등대를 옮겨 가면서 신체적 고립과 갑작스러운 재배치의 어려움을 두루 겪게 된다. 25년 동안 부부는 일본 전역에 걸쳐 10개의 등대로 전근하며 두 자녀를 키우고 여러 동료와 가족과 친구가 되는데 전쟁도 겪고 자녀를 통한 비극도 경험하지만 결국 ‘중년’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 역시 칼러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타카미네 히데코가 아내역을, 사다 케이지 (佐田啓二)가 등대지기 남편역으로 나와 열연을 펼친다. 이 두 사람은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을 맞췄다.

▲쇼치쿠 스튜디오
그는 오리지널 쇼치쿠 스튜디오맨이었다. 후기에는 텔레비전으로 무대를 옮겨 주옥같은 드라마들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쇼치쿠에서 영화 인생을 시작하여 끝까지 함께했다. 가족 드라마와 멜로 드라마라는 쇼치쿠의 기본 제작틀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 호평을 받았다. 특히 로맨틱 코미디 시츄에이션 코미디는 물론 섬세한 멜로 드라마로 여성관객들을 사로 잡았다. 

앞서 언급한 ‘모성애’ 뿐만 아니라 대담한 신세대들의 사랑표현도 잘 캐치 하여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스토리 텔링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캐스팅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감독들보다 절묘하고 탁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들은 휴머니즘이 내재 하고 있어서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주고자 했다. 대개의 감독들이 ‘웃기다가 딱 한번 울리고 결말로 간다’는 공식에 충실하지만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영화를 만드는데 비해 그는 웃길 때와 울릴 때를 확실하게 알았다. 

영화 ‘카르멘 고향에 오다'
영화 ‘카르멘의 순정’

이른바 ‘카르멘 시리즈’는 그의 이러한 장기가 발휘된 작품들이다. 게다가 사진학과 출신답게 카메라 워킹이 화려했다. ‘카르멘 고향에 오다’에 이어 발표된 ‘카르멘의 순정’(カルメン純情す, 카르멘 사랑에 빠지다, Carmen Falls in Love, 1952) 역시 슬랩스틱 코미디적 요소를 도입하고 코믹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카메라를 상하로 움직이는 틸팅 기법(Tilting Tech, 빛으로 그리듯 표현하기)을 이용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샷들에서 카메라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사각앵글을 사용하여 사회풍자의 의미를 담아냈다. 

역시 전편에 이어 스트립 댄서인 카르멘은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부잣집 문 앞에 버리고 온다. 그러나 그 부잣집 가족은 이제 막 파리에서 돌아온 아방가르드 화가 아들의 전 애인이 복수를 위해 자신의 아이를 문 앞에 버리고 간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 부잣집 아들은 카르멘에게 누드 모델을 서줄 것을 부탁하고 그녀는 곧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결국은 이용만 당한다. 그러나 스트립 댄서 카르멘의 순정은 눈물겹기만 하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게 ‘죄’ 일뿐.

영화 ‘스물네개의 눈동자’

▲모성애(母性愛)
물론 필자는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일본의 국민영화 ‘스물네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를 언급하겠다. 쇼도지마(小豆島町)의 분교에 부임한 젊은 여선생과 12명의 아이들의 이야기인데 이미 전후 황금기에서 언급한 바 있어 본 회에서는 모성애와 관련된 작품들을 소개할 것이다. ‘육군’은 서두에 이미 언급하였고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 1958)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특이하게도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에 의해서 1982년에 리메이크 되었는데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1912년 생이고 1998년까지 살았음으로 1926년생인 이마무라 쇼헤이(2006년 사망)감독이 칸에서 수상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았을 터이다. 신슈 산골의 외딴 마을. 춥고 척박한 이 마을에서는 생계유지를 위해 70세가 넘은 노인은 산속에 버려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그 옛날 ‘고려장(高麗葬)’을 연상시키는 이 풍습은 70세를 목전에 둔 오린이 아들 다쓰헤이를 재혼시키게 되면서 자신을 산속에 버릴 것을 요청하고 또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는 스토리다. 일본의 국민배우 다나카 기누요(田中絹代)가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했다. 참고로 나라야마 부시코는 결국 어머니를 버리고 오지만 한국영화 ‘고려장’(1963)은 차마 부모를 버리지 못하고 돌아온다.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영화 ‘시작의 길’에서 나약해 보이던 기노시타 케이스케가 자신의 어머니를 수건에 물을 묻혀 씻긴 후 업고 가는 장면이 있다. 아마도 감독은 하마마쓰로 가는 여정(어머니는 움직일 수 없어 리어카에 눕혀 이동)이나 업는 과정에서 이미 ‘나라야마 부시코’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밖에 ‘바람에 날리는 눈’(風花, 1959)은 신분과 가문 때문에 농락당하는 모자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다. 매우 서정적인 영화로 소작인의 딸 하루코는 대지주 나구라 가문의 차남 히데오와 용서되지 않는 사랑에 빠져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하루코만 홀로 살아남고, 임신 중이던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 아들 스테오를 낳아 키운다. 

19년 후 장성한 스테오는 나구라 가문 장남의 딸 사쿠라에게 연정을 품지만 어머니의 처지를 생각하며 머뭇거린다. 그러나 시집가기 전날에야 비로서 사쿠라가 스테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데 때늦은 고백으로 인해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한다. 사쿠라가 시집을 가는 날, 어머니와 스테오도 낯선 길을 떠나는데 맑은 날인데도 바람에 휩쓸려 날아온 눈만이 날아와 모자(母子)를 위로할 뿐이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텔레비전에 진출하다
그는 수많은 걸작들을 남긴 후 다른 동시대 감독들과 달리 텔레비전에 진출한다. 1964년 하쿠 호도와 도쿄 방송(현 TBS)과 제휴, 기노시타 케이스케 프로덕션을 설립(현 드림 맥스 프로덕션)한다. 같은 해 10월 27일 ‘기노시타 케이스케 극장’(木下恵介劇場)을 출범시켜 제1회 방송스튜디오 드라마인 미니시리즈 ‘세 사람의 거문고’(三人の琴)를 시작으로 ‘올해의 사랑’(今年の恋)’까지 열 작품이 방영되었다. 

반응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역시 TBS를 통해 ‘기노시타 케이스케 아워’(木下恵介アワー)를 편성, 1967년부터 1974년까지 총 15편을 제작하였으며 13화 ‘아버지의 북’(おやじ太鼓)부터는 컬러 텔레비전 시대에 발맞춰 제작되었다. 이중 그의 동지였던 극작가 야마다 타이치(山田太一 )와 콤비를 이뤄 ‘3인 가족’(3人家族, 1968), ‘2인의 세계’(二人の世界, 1970) 등 걸작 드라마를 남겼다. 

드라마 '아버지의 북'
드라마 ‘2인의 세계’

뿐만 아니라 기노시타 케이스케 프로덕션 단독으로 ‘기노시타 케이스케·인간의 노래 시리즈’(木下恵介・人間の歌シリーズ)를 기획하여 1970년부터 1977년까지 TBS를 통해 매주 목요일 밤 10시에 총 19편을 방영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한국에도 영향을 끼쳐서 ‘문예극장’, ‘TV문학관’, ‘베스트셀러극장’ 등 수많은 텔레비전 단편 드라마 및 미니시리즈에 영화인들이 등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당시 일본에서는 문화교양인(文化敎養人)이라 하여 영화인들이 텔레비전에 진출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래를 내다보고 텔레비전에 진출, 수많은 질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 냄으로써 오늘날 미니시리즈 혹은 드라마스페셜로 제작된 후 반응이 좋으면 ‘극장판’으로 제작되는 선례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 스텝들과 배우들에게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텔레비전과 영화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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