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미국 리포트/ 남편감 찾아서...일본의 ‘사진신부들’
생생 미국 리포트/ 남편감 찾아서...일본의 ‘사진신부들’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5.05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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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시애틀 일본인 거리의 상점들

[일본의 미국 이민사(중)]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초창기 먹고 살기 위해 이민을 한 것은 맞지만 일본은 국가(혹은 현) 차원에서 권장한 측면도 있었다. 해외 이민자가 현지화에 성공하도록 이민 초창기부터 작물의 씨앗 품종까지 개발해서 들려 보내기도 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주 재미있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점령지가 많아지고 보급로가 길어지면서 일본군의 주요 업무 중 두 번째가 바로 ‘농사’(農事)였다. 일본군의 대다수가 농촌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태평양 전선에서 숙소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논농사와 밭농사를 해서 현지의 작물 및 해산물 등과 함께 ‘자급자족’(自給自足)을 했던 것이다. 

패전 후 연합군들이 이들의 농장과 밭 등을 신기하게 생각하였고 이때 축적된 노하우는 고스란히 브라질 등 이민 국가에서 성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일본계 미국인들은 미국은 물론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등지에 농장을 일궈 품종 좋은 각종 농작물을 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도 한국마트에서 ‘한국산’을 수입해 먹는 것을 선호하는 한국인들과는 달리 현지 생산 농산물(쌀, 채소 등)을 더 선호하는 편이며 오히려 미국인들이 이 농산물을 공급받아 ‘MADE IN U.S.A’로 팔고 있을 정도다.

▲뿌리는 일본이지만...
일본인들의 미국이민에 있어서 한국인들의 그것과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바로 ‘정체성’일 것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미국’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처음부터 ‘뿌리 교육’을 통해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이 있으니 당연히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 선각자들은 ‘민족의식’을 고취 시키는데 주력했던 것이다. 

유교사상 역시 현지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곳곳에서 조선에서 유지하던 계급이 버젓이 존재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적응에 초점을 맞췄고 이미 개항을 통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미국 사회에 적응해 나갔다. 특히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리를 조성하고 자영업 이외에도 백인 손님들을 위한 레스토랑, 세탁소, 호텔 등을 운영하였다. 

1902년 개교한 시애틀 일본인 학교 및 랭귀지 스쿨

‘뿌리 교육’을 강조하지 않았기에 처음부터 현지 학교에 보내면서 일본어 교육을 병행했다. 이미 1920년대에 시애틀, 샌프랜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과 캐나다의 토론토 등지에 일본 거리가 조성되어 주류 사회와 활발히 소통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지화’정책과 미국 일본간 ‘신사협정’ 등으로 비록 차별이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1930년대 중국 침략 이전까지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교육열도 대단해서 1902년에 ‘시애틀 일본어학교’(Seattle Japanese Language School)를 설립하여 미국의 공립학교 교육은 물론 2세 들에 대한 일본어 교육 및 일종의 랭귀지스쿨(Language School) 역할을 했으며 이 학교는 지금도 존재하여 교육을 계속하고 있다.

▲사진신부와 2세
1908년 체결된 미일간 ‘신사협정’으로 노동자들의 미국 입국이 금지되기는 했어도 여행 허용의 기회는 주어졌다. 이때 많은 일본 남성들이 일시 귀국하여 결혼을 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오기도 하였지만 사진으로 밖에 본 적이 없는 1세 남자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미국에 건너간 일본 여성들도 있었다. 

그녀들을 ‘사진신부’(写真花嫁)라고 불렀으며 수천 명이 건너가면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가 자연스럽게 ‘2세’(二世, 닛세)’를 형성했다. 1920년까지 2만 명 이상의 일본 여성들이 태평양 바다를 건넜다. 남성들이 장거리 중매결혼으로 일본에 가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한 셈이다. 일본에서의 빈곤 생활로 밝은 미래를 볼 수 없었던 젊은 여성들은 긴 여정 끝에 미국에 왔으며 시애틀까지 보통 13~15일 정도가 걸렸다. 

샌프랜시스코에 도착해 신랑들을 기다리는 사진신부들.

불행히도 이중 많은 여성들은 마중 나온 남성들이 사진보다 훨씬 나이를 먹거나 재산도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결혼을 거부하고 귀국하거나 도망치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여성들은 그 상황을 받아들였고 가정을 세웠으며 새로운 나라에 빠르게 정착해 나갔다. 

미국 서부가 주는 기후의 프리미엄과 풍족한 물자는 일본보다 월등히 나았기 때문이며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더 나은 삶이 보장되지는 않을 터였다. 1922년 일본인의 미국 귀화 금지를 재확인한 ‘오자와 소송’(オザワ訴訟)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렬은 좀처럼 줄지 않은 이유다.

2세들의 탄생

▲해외흥업주식회사(海外興業株式会社)
1925년경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로 이민을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모집은 ‘해외흥업주식회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본 외무성은 미국 등 엄격한 해외의 이민규정에 부응하기 위해 이 회사를 통해 이민을 하도록 창구를 ‘일원화’했다. 일본인의 해외 도항을 돌이켜 보면 미일 화친 조약 (1854년)에 의해 긴 쇄국의 속박이 풀려 마침내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된 이래 하와이를 비롯 미국,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페루, 호주, 동남아시아 등 여러 나라와 지역으로 향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미국으로 가장 많은 이민을 배출한 현(県)은 히로시마현(広島県)으로 전쟁 전후를 통해 10만 9893명이 이주했다. 이외에도 2위의 오키나와현(沖縄県)이 8만 9424명, 3위의 구마모토현(熊本県)이 7만 6802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후쿠오카현(福岡県)과 야마구치현(山口県)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현인회’(県人會)를 구성하여 끈끈한 우애를 과시하고 있기도 하다. 비록 정부 주도와 자기 의지로 이민을 했지만 목적은 달랐다. 학업을 위해, 생계를 위해, 혹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이주를 도모하거나 외국 선박의 선원이 된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매춘 목적으로 끌려간 여성들도 있었다. 이들은 각각 고국에 남은 가족들을 초청하거나 송금을 해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척박한 일본의 가정 출신들이 많아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야구(野球)
일본인들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주류 백인사회와 소통하는 창구는 ‘야구’였다. 중국인들이나 조선인들은 달리 소통할 거리가 없었는데 일본인들은 삼삼오오 ‘야구’를 즐겼기에 가능했다. 주류 백인들이 볼 때 ‘일본인들의 야구’는 매우 낯설고 신기했으며 그들은 곧 친선시합을 갖게 되었다. 

사실 일본의 야구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1871년 9월 30일, 요코하마(横浜)의 외국인 거류민과 미국 군함 ‘콜로라도호’의 승무원 사이에서 야구 경기가 열린 것이 시초다. 당시 시합을 한 구장이 현재의 요코하마 스테디엄이다. 이후 1872년 제일고등중학(第一番中学, 현재 도쿄대학교)교사이자 선교사였던 ‘호레이스 윌슨’(Horace Wilson)에 의해 야구가 학생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더니 1907년에는 최초의 유료 게임까지 열렸다. 

이 여세를 몰아 1908년에는 미국 마이너리그 주체 팀이 방일하여 경기를 가졌으며 1909년에는 하네다 야구장(羽田球場)이 건설되었다. 1920년에 일본프로야구(日本プロ野球)가 시작되었으니 이민자들은 휴일만 되면 미국과 캐나다의 야구장으로 달려갔고 종종 백인팀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물론 현격한 실력 차이로 그들은 늘 조롱거리가 되곤 했지만 다른 아시아계와 달리 ‘야구’를 한다는 점은 분명 흥미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벤쿠버의 아침'

또한 남성들이 속속 야구클럽을 결성하는 동안 여성들은 소포트볼을 즐겼다. 야구는 일본인들의 취미이면서 오락이었고 백인사회와의 소통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영화 ‘벤쿠버의 아침’(バンクーバー―の朝日, The Vancouver Asahi, 2014)은 그때의 에피소드를 다룬 영화다. 츠마부키 사토시(妻夫木聡) 주연의 이 영화는 점점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이 심해지고 추방 소식으로 흉흉한 벤쿠버의 일본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벌목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평소 ‘일본인’(JAPS)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것도 서러운데 백인 야구팀과 겨뤄서 한번도 이긴 적이 없어 조롱을 당하는 현지 일본인 야구팀 이야기다. 게다가 상당수 주전 선수들은 차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심한 경우는 일본으로의 귀국선을 타버려 선수 수급마저 위태롭다. 

'벤쿠버의 아침 해' 야구팀.

당연히 일본인 커뮤니티는 위축되었는데 이때 생각해 낸 작전이 선수 전원 ‘번트’를 대는 것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이 작전에 허를 찔린 백인팀은 당황하며 실수를 연발하게 되고 비로소 그들은 ‘첫 승리’를 맛보게 된다. 영화의 모델이 된 야구팀 ‘벤쿠버의 아침 해’(バンクーバー―の朝日)는 1914년에 캐나다 벤쿠버에서 설립되었다. 

‘승리의 공식’을 익히고 리그를 제패(制覇)하는 성과를 거두는 등 활약을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계가 강제수용소로 수용되면서 해산됐으며 팀은 부활하지 못하고 잊혀진 존재가 되었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화되었다. 참고로 캐나다 벤쿠버에는 시가현(滋賀県) 히코네(彦根) 출신 이민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지난 2014년, 영화 개봉을 계기로 토론토의 일본계 중학생 야구팀 ‘벤쿠버의 신 아침 해’(バンクーバー―の新朝日)팀이 결성되어 히코네시를 방문하고 야구교실에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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