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㊷/ 1960년대, TV에 밀린 침체기
일본영화 경제학㊷/ 1960년대, TV에 밀린 침체기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5.2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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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일본영화는 TV에 밀려 다소 침체기를 겪었다.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화려했던 1950년대부터 이어진 ‘일본영화 제2의 황금기’를 넘어서 1960년대를 집중적으로 다룰 시기가 되었다. 사실 19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2 황금기’ 일본영화계는 엄청난 성장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제작 편수는 연간 500여 편을 넘었으며, 관람객은 연간 12억 명에 육박했다. 쇼치쿠(松竹), 도호(東宝), 다이에이(大映), 도에이(東映), 닛카쓰(日活), 신도호(新東宝)의 6대 메이저 영화사가 활발한 제작을 했다. 

기술적으로 기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가 일본방식(후지, 富士フイルム)의 칼러영화를 만들고, ‘지옥문’(地獄門, 1953)에서 이스트먼 (Eastman Kodak) 방식을 채용하는 등 본격적인 칼러영화 시대로 접어들고, 와이드스크린(WIDE SCREEN)도 보급되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영화 관객은 감소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영화계는 2편 동시상영, 3편 동시상영을 남발하고 이의 범람으로 인한 양산경쟁에 쫓겨, 수준 낮은 작품들을 다량으로 만들게 되면서 결국 관객들의 외면을 초래하게 된다. 

사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196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TV가 보편화 되던 시기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1988)에서도 TV가 각 가정마다 보급되면서 더 이상 극장을 찾지 않는다는 대사가 등장한다. 오늘날 TV는 영화와 ‘공존, 공생’하는 관계로 발전하였지만 당시 영화계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영화계’를 지키는 것만이 순수예술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TV로 진출한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한다고 생각했다. 스텝들뿐만 아니라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일본영화계는 침체를 겪으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황태자 아키히토(明仁) 결혼식

▲일본판 세기의 결혼식
1959년 4월 10일 일본 황태자 아키히토(明仁)와 평민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의 ‘일본판 세기의 결혼식’이 열린다. 1958년 11월 27일, 궁내청은 황실회의가 쇼다 미치코를 황태자비로 맞이하는 사항을 가결했다고 발표하는데 평민과 황족의 만남이라고 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 때문에 이른바 ‘미치’(美智, 미치코 황후의 애칭) 붐이 일어난다. 

패전국으로서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었던 일본으로서는 이 결혼식을 발 빠르게 생중계로 편성했으며 이를 보기 위해 빠른 속도로 TV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1946년에 제정된 일본의 이른바 ‘평화헌법’에 의해 일왕은 정치 실권이 거의 없는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그러나 나라를 대표하고 국민 통합을 이끄는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천황의 존재가 일본인들에게 다시금 특별하게 인식되었음은 분명하다. 

‘황실 신데렐라’의 일거수일투족이 TV를 통해 전파되면서 ‘라이브’에 대한 매력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그 반대급부로 일본 영화산업은 불황에 빠지게 된다. 특히 일본의 급진좌파운동과 학생운동의 종말 이후 초고속 경제 성장의 열매를 맛보면서 영화계 역시 ‘언더그라운드’ 혹은 ‘게릴라식’ 기획이 불황의 타개책으로 제시되었다. 손해만 안 보면 되고 텔레비전에서는 볼 수 없는 콘텐츠라면 환영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되었다. 

▲영화로 회복되었던 일본인의 자존심
전후 일본의 영화는 오락의 전당이며 대중 계몽의 집회장임과 동시에 패전국으로서 상실했던 문화적 긍지를 회복해 주는 장소였다. 또한 세계 영화제들을 잇따라 석권하면서 맥아더 장군 시절의 한도 풀었다.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나 주축국은 국민감정 때문에 서로를 극단적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일본은 미군을 양키라고 부르고 루즈벨트나 처칠을 너구리나 원숭이로 묘사했으며 반대로 미국의 코믹물이나 만화에 묘사된 일본인들은 어김없이 ‘원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종종 일본인들을 ‘원숭이’라고 부르는데 그 전통은 오래된 것이다. 

맥아더 장군 시절 ‘신(神)의 나라 일본’은 전면 부정되었다. GHQ(연합군 총사령부)는 일본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수업을 일제히 금지했다. 따라서 시대극도 금지되었다. 무사의 모습을 하고 설쳐대던 배우들은 양복을 어색하게 차려입고 등장했으며 그들의 대사 역시 현란한 칼싸움이나 할복, 목을 베는 장면보다는 ‘민주주의’를 외쳤다. 심지어 일본국기(國技)이자 씨름인 ‘스모(相撲)’마저도 야만시대부터 내려오던 구시대 유물 취급을 받았다. 급기야 1946년 1월 1일 천황이 직접 “나는 천황(天皇)이 아니라 보통사람이다.”라는 ‘직접(直接)인간선언’까지 했었다. 

그런 그들을 서구세계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한 것이 바로 영화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영화의 화려한 상승세 뒤에는 엄연한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1960년 547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99%는 메이저영화사가 주당 2편꼴로 쏟아내던 일종의 ‘프로그램픽처(プログラムピクチャー)’였던 것이다. 개성 있는 작품보다 시장에서 ‘잘 먹힐’, 비슷한 영화들이 자사의 스튜디오에서 양산되는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영화 ‘메이지 천황과 러일 대전쟁’

▲신도호(新東宝)의 몰락
결국 메이저 영화사들 사이에서도 출혈경쟁이 심화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량공세’로 나서야 했고 현실적으로도 전속 배우와 자체 보유 스튜디오를 놀리지 않으려면 쉴새 없이 영화를 ‘찍어내는 것’이 유리했다. 급기야 후발주자인 신도호는 제작 편수를 늘리지 못하고 1961년에 제작을 중지한다. 1959년 11억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던 일본영화계는 완만한 하강세를 보이더니 1963년에 이르러서는 5억 1112만명 정도로 관객이 절반으로 준 상황이었다. 

또한 신도호의 몰락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탈세 혐의로 도쿄지검으로부터 끊임없는 조사와 기소가 반복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1960년 12월 사장이 교체되었는데 야마나시 미노루(山梨稔)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취임했지만 1961년 3월 백기를 들고 퇴임하였다. 훗날 그는 1964년 도에이 동화(東映動画)의 사장으로 복귀할 정도로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아베 시카조(安部鹿蔵)였는데 회생불능이라 판단하여 5월에 영화제작을 중단한 후 8월, 도산(倒産)을 선언한다. 당시 일본의 검찰은 황금기에 취해 있던 영화계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고 메이저영화사 중 태생적 한계(도호쟁의로 인한 분사)로 인해 취약했던 ‘신도호’가 시범 케이스로 걸려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특히 독선적 원맨(one man) 경영으로 인한 1960년 노조의 ‘경제추방’(大蔵追放)을 기치로 내건 파업이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신도호의 로고와 책 '신도호, 창조와 모험의 15년'

▲신도호의 분할(分割)
신도호는 비록 도산의 길로 갔지만 일본영화사에 남긴 족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우선 ‘메이지 천황과 러일 대전쟁’(明治天皇と日露大戦争, 1957)은 당시 동원 관객수 2200만명을 기록한 바 있는데 이는 불멸의 기록이다. 2001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이 2300만명의 기록을 세우기까지 약 44년간 일본영화의 흥행 성적 제1위의 자리에 군림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인구수를 감안 하면 깨지지 않을 대기록이기도 했다. 

이처럼 신도호는 히트 작품을 다수 만들어 흑자경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산 이후 신도호는 청산부문과 배급부문, 제작부문으로 분할되었다. 제작부문의 경우 현재까지도 ‘국제방영주식회사’(国際放映株式会社)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으며 배급부문은 ‘다이호주식회사’(大宝株式会社)로 분사되어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문제작들로 잠시 히트작을 내놓치만 결국 해산절차를 밟았다. 

영화 ‘벽 속의 비사’

그 외에도 스튜디오 설비를 인수한 ‘오쿠라 에이가’(オークラ 映画)와 ‘신도호 에이가’(新東宝 映画)등이 독립프로덕션으로 출범하게 되는데 이들은 제작비 300만엔 미만의 이른바 핑크필름(ピンク映画, 에로영화)에 전념한다. ‘에로덕션’(Eroduction·외설영화)으로 불리던 이들이 주도한 1962~71년의 에로티시즘 경향을 일본영화사에서는 핑크필름이라 칭하고 있으며 신인 배우들은 어떻게든 데뷔를 하기 위해서 하나둘씩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1965년 제작 편수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위세가 당당해진 핑크 필름은 와카마쓰 고지(若松 孝二) 감독의 ‘벽 속의 비사’(壁の中の秘事, Secrets in the Walls, 1965)가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으며 하나의 장르로 확실하게 자리 잡아 새로운 수익모델이 되었으며 영화계에도 충격을 안겼다.

1964년 열린 도쿄올림픽

▲도쿄 올림픽(東京オリンピック)
1953년 2월에 최초의 TV 방송을 시작한 이래 일본 방송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TV의 보급률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게다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흑백 TV가 칼러 TV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영화계가 받은 손실은 컸다. 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일본영화계는 흑백영화의 제작 비중이 더 높았다.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까닭에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고 ‘파트 컬러’(パートカラー)라 하여 특별한 장면만을 칼러로 촬영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특히 핑크필름의 경우는 파트 칼러가 만연되어 있었다. 

당시 세계 영화계는 TV가 흉내 낼 수 없는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20세기 폭스가 1953년에 개발한 와이드스크린 상영 방식으로 화면의 너비를 넓혀 웅장한 영상을 보여주는 기술적 발전이 이뤄진 것도 이때였다. 이는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TV에서는 볼 수 없는 긴 대형화면을 구사했다. 비록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TV에 판권을 판매하여 2차 상영을 하기 위해 파라마운트의 비스타 비전(VistaVision)으로 촬영되면서 사장(死藏)되었지만 차별화 시도를 계속해 나갔다. 

▲신인들의 등장
1960년대는 세 가지의 경향이 지배했다.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등 이전 거장들이 전면 부정되는가 하면 작품마다 스캔들이 생겨도 신경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아프레게르’(après-guerre, 전후파, 戰後派)세대 감독들로 불리우며 자신들의 개성을 마음껏 표현했다. 이들이 향후 일본영화계를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이고 1956부터 1962년까지 데뷔하여 메이저영화사의 프로그램픽처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참신한 시도들을 이어나갔다. 

영화 ‘청춘 잔혹 이야기'

이들은 때로 독립프로덕션을 만들거나 제도권 안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가 하면 동시대의 할리우드나 누벨바그에 심취하며 새로운 일본영화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기본 일본영화의 주제, 화법, 언어를 새롭게 하면서도 이 시대 청년들의 사상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일본영화의 유산이나 전통을 벗어나 전후 일본 사회의 허망함과 냉소적인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어 했고 전쟁의 상처 또한 잊으려 했다. 

이러한 경향의 효시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청춘 잔혹 이야기’(靑春殘酷物語, 1960)다. 쇼치쿠 누벨바그의 만개를 알린 그는 당시 유행했던 청춘 영화인 ‘태양족(太陽族) 영화’의 틀을 빌려 말 그대로 청춘의 잔혹한 이야기들(섹스, 폭력, 범죄)을 통해 세대 간 갈등과 당시 사회에 대한 젊은 세대가 느끼는 지독한 환멸감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가 1959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이런 도발성(挑發性) 영화가 1960년에 일본에서 발표되었다는 것만으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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