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한줄 어록/ 매의 눈을 가져라
CEO 한줄 어록/ 매의 눈을 가져라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1.06.17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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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야마현의 구라시키(倉敷)는 일본에서 ‘노동과학’이 태동한 곳이다. 이 지역 명망가이자 기업가였던 구라시키방적(倉敷紡績) 사장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郎)의 '시대를 앞선' 신념 덕이다. 그의 노동 개혁적 발상은 ‘오하라기념노동과학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진다. 
올해로 100년을 맞은 이 연구소를 연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일본에서는 ‘원조 CSR형 경영자’로 평가받고 있다.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의미한다. 일본 최초의 서양미술관 ‘오하라미술관’(大原美術館, 1930년 개관)을 세상에 남긴 이도 오하라 마고사부로였다. <에디터 이재우>

▶이름: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郎)
▶경력: 구라시키방적(현재의 KURABO) 사장
▶평가: 원조 CSR형 경영자
▶태생: 오카야마현 구라시키
▶생몰연도: 1880~1943년

경제소설 ‘매의 눈은 10년 앞을 본다’ 주인공
‘경제소설의 개척자’ 시로야마 사부로(城山三郎:1927~2007)가 『매의 눈은 10년 앞을 본다(わしの眼は十年先が見える)』라는 제목의 기업인 평전을 내놓은 건 1994년이다. 평전의 주인공은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郎:1881~1943). 당시 책의 서평 내용이다.

<나막신(下駄)과 신발(靴)을 한쪽 씩 신고, 그 남자는 두 갈래의 길을 동시에 걸었다. 지방의 한 방적회사를 최고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경영자의 길과 사회에서 얻은 자산은 모두 사회에 돌려준다는 신념의 길.>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郎)의 생애를 다룬 경제소설 '매의 눈은 10년 앞을 본다'(わしの眼は十年先が見える)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기업가와 사회복지가(또는 노동개혁가), 두 길을 함께 걸었다. 그는 영리 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을 동시에 하는 자신에 대해 “나막신과 신발을 함께 신었다”고 술회했다.

오하라는 오카야마현 구라시키 출생(1880년)이다. 구라시키방적(倉敷紡績: 현재의 KURABO)을 세운 창업자의 아들. 구라시키는 메이지 시대 이전부터 도쿄(에도)로 산물들을 보내던 집산지로 유명했다. 특히 금융, 무역, 방직 산업이 발전했었다. 오하라는 스물 여섯 나이에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아 구라시키방적 2대 사장에 오른다. 사장 취임 후 대공황 등 심각한 불황의 파도에도 사업 다각화와 직원들 환경 개선책들을 내놓았다.

구라시키방적(倉敷紡績: 현재의 KURABO) 2대 사장
그런 오하라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 있었다. ‘아동복지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시이 쥬지(石井十次:1865~1914). 그는 의사 일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둔 오카야마 고아원을 설립, 평생을 고아 구제에 바쳤다. 

젊은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고아 구제모금을 호소하던 이시이 쥬지의 연설에 매료돼 사회복지에 눈을 뜨게 된다. 일본 민간 싱크탱크 PHP종합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오하라 사장은 시대를 앞서가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다음은 PHP종합연구소의 자료 내용이다. 

구라시키방적의 창업 당시와 현재. 얼굴은 오하라 마고사부로.

<오하라는 이익이 나더라도 주주들에게 배당을 지급하거나 임원 상여금으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지급액을 줄여 사회사업과 사내복지에 투자했다. 종업원 대우를 우선시 하는 그런 방침은 당연히 사내외에서 반발을 가져왔다. 그때마다 오하라는 “매의 눈은 10년 앞을 본다”(わしの眼は十年先が見える)는 말로 주위를 설득했다.>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매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어록을 남겼다. 

“매의 눈은 10년 앞을 본다”는 기업 철학
'매의 눈'은 기업 활동에서의 안목과 선견지명을 의미한다. 매와 관련된 이 말은 훗날 경제소설가 시로야마 사부로가 쓴 책의 제목으로 인용됐다. 오하라 사장의 노동관을 좀 더 들여다보자. 

<오하라는 “기업이라는 건 자본과 노동의 ‘합동 작업장’”이라고 주장했다. 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우열은 없다고 생각했다. 1917년 공장장회의에서 “직원들을 생산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일하러 오는 사람도, 경영하는 자본가도 쌍방이 치우치지 않는 이익을 추구한다면 노사협조가 가능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이런 노동이상주의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기업이익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의 가치가 무시되던 시대, 오하라의 획기적인 노동 개혁적 생각은 ‘구라시키노동과학연구소’(倉敷労働科学研究所) 설립으로 이어진다. 지금으로 100년 전인 1921년 7월의 일이다. 

100년 전 획기적인 노동과학연구소 설립
이 연구소는 1937년 일본학술진흥회에 기탁되면서 재단법인 ‘노동과학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한다. 이후 1945년엔 문부성 소관의 재단법인 ‘노동과학연구소’로 재출발한다. 세월이 지나 2015년 9월엔 공익재단법인 ‘오하라기념노동과학연구소’로 명칭을 다시 변경, 도쿄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연구소는 각종 사업장의 노동 상황, 노동자의 건강 생활, 의약 후생 등 사회복지 향상에 관한 연구조사를 실시한다. 오하라는 이외에 오하라농업연구소(1914),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1919) 등 다양한 연구소를 설립했다. 

사회복지에 열성적이었던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사업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1920년대 섬유회사 구라시키방적은 ‘인조섬유 국산화’에 나서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회사로 급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오하라는 방적회사 외에 은행(中国銀行), 전력(中国電力) 회사 사장을 겸하면서 오하라 재벌을 일궈 나갔다.  

오하라미술관의 모습. 

일본 최초의 서양미술관 ‘오하라미술관’ 남겨
오하라가 후세에 남긴 ‘진가’는 미술품 수집으로 빛을 발휘했다. 그는 같은 고향의 화가 코지마 토라지로(児島虎次郎)의 재능을 알아보고 도쿄미술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5년간의 유럽 유학도 주선했다. 오하라는 그런 코지마를 통해 서양의 유명 미술작품을 사들였다. 

그렇게 탄생(1930년)한 것이 일본 최초의 서양미술관 오하라미술관(大原美術館: 오카야마현 구라시키 소재)이다. 오하라미술관은 모네, 피카소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작가들이 유명세를 타기 전에 사모은 작품들이다. 

△유익한 섬유재료를 만드는 구라시키방적(현재의 쿠라보) △노동자들의 가치를 연구하는 오하라기념노동과학연구소 △사람들에게 예술감상 기회를 제공하는 오하라미술관. 이 모든 것들이 시대를 앞선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머리와 손과 발에서 탄생했다. 거기에 더 중요한 ‘매의 눈’이 보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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