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꼬꾸라트린 ‘탐사보도의 선구자’
정권을 꼬꾸라트린 ‘탐사보도의 선구자’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1.06.2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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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거인’(知の巨人)으로 불리는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立花 隆). 사진=NHK 캡쳐.

일본에서 ‘지식의 거인’(知の巨人)으로 불려
지식의 깊이와 넓이로 보자면 ‘한국의 이어령’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일본에서 ‘지식의 거인’(知の巨人)으로 불리는 저널리스트 겸 논픽션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 隆·80)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 언론들은 “다치바나 다카시가 지난 4월 30일 급성관상동맥증후군으로 별세한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23일 일제히 보도했다. 

유족에 따르면, 다치바나 다카시는 당뇨병과 심장질환 등의 지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고 한다. 고인은 2007년 방광암 발병을 주위에 알리고 질병과 죽음을 테마로 작품을 쓰고,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했었다.

나가사키 출신의 다치바나 다카시는 철학, 종교, 우주, 뇌과학, 원숭이학 등 방대한 분야를 넘나든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평론가였다. 그런 그를 두고 일본 사회는 ‘지식의 거인’이라 칭한다. 1964년 도쿄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문예춘추사에 입사했던 그가 일본 사회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결정적 일이 있었다.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금권정치 폭로
프리랜서로 일하던 1974년 10월, 당시 정권을 겨냥한 탐사보도를 터트린 것. 현직 총리인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년)의 돈줄 문제(비자금)를 파고들며 정치 생명을 끊은 게 바로 그였다.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다나카 가쿠에이는 비상한 머리에 결단력이 대단한 정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중일 국교정상화라는 명(明)의 치적과는 달리 ‘어둠의 쇼군(闇將軍: 막후 실력자)’으로 군림하며 금권정치를 펼치는 암(暗)의 인물이기도 했다.

다치바나 다카치는 그런 다나카 가쿠에이의 정경유착 실태를 문예춘추에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그 금맥과 인맥’(田中角栄研究 その金脈と人脈)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이 보도는 다나카의 퇴진을 불러왔다. 

보도 두 달 뒤인 그해 12월, 다나카 내각은 총사퇴했다. 2년 뒤인 1976년엔 록히드 사건의 전모도 드러났다. 다나카는 미국 록히드사 여객기 도입에 연루, 수뢰혐의로 체포되기까지 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문예춘추에 재판 방청기 등을 계속해서 실으며 금권정치의 몰락을 일본 사회에 고발했다.  

언론들 ‘탐사보도의 선구자’-‘뉴 저널리즘의 기수’
일본 언론들은 다나카 전 총리의 몰락과 다치바나의 부음을 전하면서 “당시 일은 탐사보도의 선구적 사례로 알려져 있다”(아사히신문), “‘잡지 저널리즘의 금자탑’으로 높이 평가되었다”(마이니치신문), “‘뉴 저널리즘의 기수’로 불렸다”(니혼게이자이신문)고 전했다. 

장서 10만권을 보유한 엄청난 다독가였던 다치바나의 저작은 한국에도 많이 번역, 소개됐다. 지은 책으로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죽음은 두렵지 않다』,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 『천황과 도쿄대』 등이 있다. 1979년 ‘일본 공산당 연구’로 고단샤 논픽션상, 1983년 기쿠치 칸상, 1998년 제1회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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