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㊸ 움트는 '애니메이션 시대'
일본영화 경제학㊸ 움트는 '애니메이션 시대'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7.0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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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60년대 하면 영화계의 그늘에 가려졌던 애니메이션(일본어; アニメーション, 줄여서 보통 아니메)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다. 일본에서 만화는 망가(マンガ, 漫畵)라고 불리며, 그 역사는 1800년대부터 시작한다. 풍속화가들이 우스꽝스럽게 그린 삽화를 망가라고 불렀고 큰 인기를 끌었다. 해서 일본은 근대화 이후 만화잡지들이 생겨나 이미 대중화가 되었다. 특히 ‘고단샤’(講談社, 1909년 창립), ‘쇼각칸’(小学館, 1922년 창립), ‘슈에이샤’(集英社, 1925년 창립) 등이 일본 출판 만화 시장을 3등분 하고 있었다. 

1959년 창간된 소녀 만화지 ‘나카요시’(なかよし, 1954년 창간)와 ‘주간소년매거진’(週刊少年マガジン, 1959년 창립)이 각각 고단샤에서 발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인기 만화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간간이 영화 쪽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꾸준히 참여하였으나 그 열악함 때문에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으로 옮겨 가더니 내공을 쌓은 후 독립 프로덕션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텔레비전 시리즈 후 ‘극장판’이라는 공식을 만들었으며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골고루 팬을 확보하게 된다. 고전적 대중 회화인 ‘우키요에’(浮世絵)에 그려진 캐릭터들과 연관성이 짙었고 이세계(異世界)와 공상극(空想劇)을 주제로 하는 판타지라는 점이 일본인으로서의 전통적 취향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모타로의 바다 독수리
1943년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모모타로의 바다 독수리’(桃太郎の海鷲)가 개봉된다. ‘일본 근대 애니메이션의 아버지’ 세오 미츠오(瀬尾光世)가 원고지 10만 매에 달하는 분량(필름 길이 1.018m)을 다섯권 짜리 대작 장편 만화영화로 만들었다. 한때 태평양전쟁 발발로 필름이 분실되었으나 1983년 극적으로 후편인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桃太郞 海の神兵, 1945) 의 필름이 발견되면서 공인되었다.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매우 길다.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芋川椋三玄關番之卷, 1917)가 아시아 최초의 애니메이션으로 공인되어 있으며 이 작품은 중국의 완형제가 제작한 ‘화실 대소동’(大闹画室, 1926)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애니메이션이 프랑스 에밀 콜(Emile Cohl)의 팡타스마고리(fantasmagorie, 1908)임을 감안하면 늦은 출발이었지만 세계 최초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검은 고양이 펠릭스(​Feline Follies, 고양이 장난, 1919)보다는 2년 빠른 출발이었다. 

이모카와 무쿠조는 지금도 동영상이 남아 있어 유튜브를 통해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일본 최초의 토키 애니메이션인 ‘힘과 여자의 세상’(力と女の世の中, 1932), ‘노라쿠로 하사’(のらくろ伍長, 1934) 같은 단편 애니메이션들도 공개되어 있다.

후쿠이 에이이치 (福井英一)와  ‘까까머리 소년'

▲후쿠이 에이이치(福井英一)
후쿠이 에이이치 (福井英一)는 일본 만화가이면서 애니메이터다. 그는 초창기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태평양전쟁 시기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징집 되었지만 그에게는 소집 영장이 날아오지 않았다. 전쟁 당시 니치에(日映)에 근무하며 군의 하청만화들을 그리고 있었던 영향인지 징집을 피하면서 전후에도 만화가로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가와바타 그림학교에서 배운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종전 직후 뿔뿔이 흩어졌던 애니메이터들을 모아 도쿄 아오모리에서 동년배 만화가를 중심으로 ‘도쿄아동만화회’를 결성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했으며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와 라이벌구도를 형성했다. 1951년 만화잡지인 모험왕(冒険王)의 부편집장인 스즈키 히로시(鈴木ひろし)로부터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감독의 유도 영화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郞, Judo Saga, 1943)의 일종의 ‘만화판’을 의뢰받고 1952년 1월호부터 ‘까까머리 소년’(イガグリくん)을 연재했는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후쿠이 에이이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건강까지 희생하면서 무리하게 원고를 작성해 나갔다. 과로에 협심증까지 온 순식간에 일어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은 출판계의 고질적인 과잉노동에 기인한 것으로 이후 만화가들의 처우 개선 및 원고료 인상, 특별부록 단행본에 대한 별도 책정 등의 변화를 가져 왔다. 

여담으로 데즈카 오사무는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슬픔보다는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경멸스러웠다고 훗날 회고하였으며 후쿠이 에이치의 실명 캐릭터를 그려 자신의 만화에서 오마주 하는데 앞을 향한 3개의 머리 스타일, 작고 짙은 둥근 눈, 약간 튀어나온 턱이 그 특징이다.

▲오후지 노부로(大藤信郎)
오후지 노부로는 1921년 자유영화연구회를 창설하여 일본 독립 애니메이션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1952년 컬러 셀로판을 사용한 실루엣 애니메이션 영화 ‘고래’(くじら, Whale)를 만들어 칸느영화제에 출품하여 단편 2위로 입상하면서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1956년에는 ‘유령선’(幽霊船)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또다시 특별 장려상을 수상함으로써 이후 대표적 일본 만화영화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61년 사후, 그를 기려 마이니치 영화콩쿠르(毎日映画コンクール)에서 오후지노부로상(大藤信郎賞)이 제정되었고 그 첫 수상자는 데즈카 오사무였다.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초기 멤버였던 고우치 준이치(幸内純一, 1917년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 제작)의 제자로 20세에 독립하여 이른바 ‘지요가미’(千代紙, 무늬를 색칠한 수공용 일본 색종이)를 오려 붙여 배경이나 캐릭터를 조형한 일본만의 독자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해서 ‘지요가미 영화의 오후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데 러시아의 알렉산더 알렉세이예프(Alexander Alexeïeff)의 핀보드 애니메이션(Pinboard animation)과 함께 주목받는 새로운 애니메이션 기법이었다. 참고로 핀보드 애니메이션은 평면 보드에 수천 개의 핀을 꽂은 후 조명으로 그림자를 만드는 기법이며 유튜브를 검색하면 위 두 사람의 애니메이션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 오후지 노부로의 등장은 영화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는데 당시 환경도 열악하고 영화사 입장에서는 돈도 안 되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화’라는 새로운 희망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후지 노부로(왼쪽)와 오오츠카 야스오.

▲도에이동화(東映動画)
종전 후 일본 애니메이터들에게 월트 디즈니(Walt Disney)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미군정(GHQ)은 신속한 점령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애니메이션을 활용했고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들은 전쟁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반면 움추려있던 일본의 애니메이터들은 만화잡지 등의 붐과 함께 다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는데 이 모든 중심에는 1957년 재편한 ‘도에이동화’가 있었다. 

도에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초창기 도에이동화와 채색부

‘동양의 월트 디즈니’를 목표로 기존의 가내수공업 방식을 타파하고 미국식 분업 제작시스템을 과감히 도입하는 등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수많은 작품과 훗날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 애니메이터들을 발굴해 냈다. 1958년 10월에는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白蛇伝)을 개봉하여 큰 히트를 쳤다. 당시 ‘백사전’의 경우 중국 경극이 모티브였기 때문에 홍콩에서 반입할 예정이었으나 자체 제작으로 방향을 틀었다. 장편 제작 경험이 전무 했지만 해냈다. 

'백사전'

특히 1958년은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인 두더지 모험극 ‘모구라의 아방튀르’ (もぐらのアバンチュール, Mole's Adventure)가 방송된 해 이기도 하다. 이 9분짜리 풀컬러 애니메이션은 7월 14일 NTV에서 방영된 후 10월 15일에 재방 되었다. 결국 도에이(東映)가 니치도 에이가(日動映画)를 인수함으로써 애니메이션 제작의 노하우를 전수 받고자 한 의도는 대성공이었다. 

이때 합류한 사람이 바로 ‘아톰의 아버지’이며 이번 연재의 핵심인 데즈카 오사무이다. 그는 1958년 자신의 만화였던 ‘서유기’(西遊記)의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촉탁으로 참여하게 된다. 물론 도에이동화 1기 입사생 중에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스승이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미래소년 코난’(未来少年コナン)과 ‘루팡 3세’(ルパン三世)로 유명한 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生) 같은 미래의 거장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데즈카 오사무 하면 일본에서는 ‘아톰(鉄腕 アトム)의 아버지’이면서 ‘지상 최대(地上最大)의 만화가’라는 칭호가 뒤따른다. 그는 오사카대학 의학부를 나온 정식 면허를 가진 의사였지만 만화가 좋아 만화가가 되었다. 그는 ‘일본만화의 아버지’, ‘일본만화의 신’이라는 다양한 별명이 있을 만큼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도에이동화에서 익힌 노하우를 통해 ‘무시 프로덕션’(虫プロダクション)을 창립하여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화를 이뤘다. 

그의 등장으로 일본은 ‘만화영화 붐’이 일어났으며 만화를 원작으로 TV 시리즈 후 극장판을 만드는 전례를 남겼다. 1964년 미국 NBC와 계약, '아톰'이 미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일본 문화 콘텐츠의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사실 미국에서 일본의 영화나 애니메이션들을 수입한 후 종종 미국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나하나 편집하여 원작을 바꾸는 일이 잦았다. 물론 수입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한국에서도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이전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수입하면서 반일본 정서를 겨냥한 ‘의도적’ 편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원작을 아예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일본 특수촬영의 아버지’라는 츠부라야 에이지(円谷英二)의 ‘고지라’(ゴジラ)가 그랬고, 데즈카 오사무의 ‘서유기’ 역시 피할 수 없었는데 손오공이 아닌 삼장법사가 ‘마술왕자’로 주인공이 되고 부처님이 삼장법사의 아버지인 ‘마술대왕’, 관음보살은 ‘여왕’으로 바꿔 버렸다. 

줄거리 역시 마법 나라의 왕자가 여행길에 오르는 것으로 원작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 버렸다. 데즈카 오사무는 이에 대하여 실속(돈) 보다는 명예를 챙겼다. 또한 게임이나 레코드 등 부가판권에도 상당히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의 시골에서도 ‘애스트로 보이’를 알만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에게 영감을 주었고 협업 제의까지 들어왔다. 그가 협업을 제안하고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 1968)였다.

'철완 아톰'과 '에스트로 보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limited animation)
1953년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된 이래 애니메이션은 발전해 왔다. 특히 일본 영화계에서 하나의 장르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어린이 관객을 넘어서 수십년 동안 시리즈를 만들어 오면서 중장년층 팬들도 견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톰’을 계기로 최초의 캐릭터 상품 권리, 최초의 팬클럽 결성이 이뤄졌는가 하면 철저한 상업적 작품이 기획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작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을 도입한다. 1초당 24프레임에 해당되는 모든 동작을 각 프레임별로 그려 내는 풀 애니메이션(full animation)과 달리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작과 포즈, 움직임으로 단순화하는 이 방식은 빠르고 경제적인 제작을 가능케 하였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황금기 이후 영화를 대신해서 꾸준히 수출되어 나갔다. 1960년대 영화계의 한 축을 견인한 것은 단연 애니메이션이었다. 

이중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바로 스페인과 영국이다. 프랑코 정권이 40년간 지속 되면서 표준어인 스페인어 외에 지방어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카탈루냐어, 발렌시아어, 마요르카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 등 소멸 직전인 지방어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이용하여 각 지방어 더빙 후 보급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아이들의 언어(지방어) 능력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영국은 처음부터 더빙판만을 고집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문자를 읽기 싫어하는 영국인들의 트랜드를 반영한 결과인데 대부분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아닌 미국의 것으로 인식했다. 그 결과 보기 드물게 애니메이션 보급이 느린 나라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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