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㊹ 쇼치쿠 누벨바그/ 영화혁명
일본영화 경제학㊹ 쇼치쿠 누벨바그/ 영화혁명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7.3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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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치쿠 누벨바그'는 기존 영화들과 달리 파격적인 소재로 호평을 받았다.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전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근대화, 산업화와 함께 고도성장을 가져오고 나면 좌파가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역설은 일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좌파 지식인의 사상은 경제가 어려울 때는 잘 어필되지 못하다가 ‘먹고 살만 해지면’ 사회적 모순을 주장하면서 대중들에게 퍼져 나간다. 

일본 사회 역시 1960년대 초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회복되기 시작한 경제는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급성장을 가져왔고 전·후세대의 젊은이들은 문학과, 예술, 외국영화와 함께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사상에 심취했다. 이에 도화선이 된 것은 ‘안보투쟁’(安保闘争)이었다. 1959년에서 1960년(그리고 1970년 두 차례)에 일본에서 전개되었던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바로 그것으로 영화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930년대생’이라고 불리우는 전·후 세대 감독들이 자기 목소리들을 내면서 잡지를 창간하고 기존 질서와 영화계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그 선두에는 ‘쇼치쿠’(松竹)가 있었다. 물론 충격이었다. ‘기도시로’(城戶四郞)라는 독재적 경영인이 군림하고 있던 쇼치쿠에서 그것도 그가 파격적으로 감독으로 데뷔시킨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1932년생)가 선두에 섰다. 

27살의 나이에 각본과 연출을 한 젊은 피가 요동친다는 평가를 받은 요시다 기주(吉田喜重, 한때 한국에서는 요시다 요시시게로 알려짐, 오카다 마리코<岡田茉莉子>의 남편, 1933년생), 일본영화평론가 중 최고였던 사토 타다오(佐藤忠男)로부터 ‘일본 최고의 심미안을 지닌 연출자’로 격찬받은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 1931년생)등이 동참하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오랜 세월 조감독으로 머물던 시기에서 벗어나 ‘감독’ 이 될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점차 일본언론들은 이들을 통틀어 ‘쇼치쿠 누벨바그’(松竹 ヌーヴェルヴァーグ)라 부르기 시작했다. 

▲파격에 또 파격
이들의 스승은 모두 유럽에 있었다. 알랭 레네(Alain Resnais, 프랑스),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 프랑스),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Roland Truffaut, 프랑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이탈리아) 등 유럽의 새로운 물결을 이끈 감독들을 추앙하고 그들의 신(新)영화에 찬사를 보내는 글을 기고했다. 

이들(쇼치쿠 누벨바그)은 유럽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영화들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으며 ‘태양족 영화’(太陽族映画)를 묵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안보투쟁의 패배가 가져다준 허무의 쓴맛을 본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사조의 문화로 빠르게 대체시켰다. 기존 영화들과 달리 정치적 급진주의와 진지하고 파격적인 소재들을 때로는 익살스러우면서도 ‘젊음, 정치, 폭력, 프리섹스’라는 주제에 맞춰 만들어 호평을 받았다. 

'사랑과 희망의 거리'(1959) 포스터와 스틸 사진

처음 기도 시로는 도에이와 닛카스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들 ‘1930년대 생’의 재능있는 신세대 감독들을 등용 했지만 이들의 파격적 실험은 흥행 면에서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시퀀스(sequence)와 샷(shot)의 빈번한 활용, 같은 샷 속에서도 시간을 자유롭게 역행하여 흘러가는 실험적 시도와 남녀간 애증, 파격적 섹스, 동반 자살 같은 자극적 소재들을 민감한 정치 이슈들과 맞물려 ‘반’(反)영화적이면서도,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새’영화 언어로 구현해 냈다.
 
쇼치쿠 오후네(大船) 촬영소에서 일하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작(自作) 시나리오를 선보이며 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영화 언어로 파격적인 작품들을 잇달아 내놓는다. 섹스와 폭력, 광기가 정치적 급진주의와 교착하는 순간을 그려 낸 치밀한 구성의 영화들은 실험적 예술영화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사랑과 희망의 거리(愛と希望の街, 1959), 그리고...
가장 ‘반항’ 이 두드러졌던 감독은 역시 오시마 나기사였다. 그는 ‘청춘 잔혹사’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었다. ‘사랑과 희망의 거리’(영문명 Street of Love and Hope)가 발표될 당시는 1959년으로, 기도 시로는 신예 오시마 나기사를 파격적으로 감독에 기용함으로써 새로운 감독들이 진입할 틈을 내주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

그러나 애초부터 기존 일본영화의 관습을 타파하기를 희망했던 오시마 나기사의 의도는 당대를 휩쓴 ‘태양족’이라는 사회상을 반영하면서도 전형적인 청춘물 구조에 특유의 정치학을 섞어놓는 것(‘일본 뉴웨이브의 지형도: 쇼치쿠 누벨바그 특별전’에서 발췌)이었다. 오시마 영화의 원형격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영화를 통해 언론으로 ‘쇼치쿠 누벨바그’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파격이 극심한 침체기에 있었던 쇼치쿠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흥행에도 참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통상적인 영화 화법’을 크게 벗어남으로써 결국에는 쇼치쿠를 떠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비둘기를 팔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 영화의 대사 만큼이나 처절(흔한 비둘기를 파는 게 사기일까 장사일까의 물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층과 부유층 사이의 갈등과 인연이 반복되다가 ‘사랑과 희망’은 보이지 않는 비극만 보여주고 영화는 끝이 나고 만다. 

‘청춘 잔혹 이야기'(1960)

만약 ‘청춘 잔혹 이야기’(靑春殘酷物語, 1960)가 흥행하지 못했다면 그의 실험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소재였다. 여고생인 마코토(구와노 미유키)는 친구와 늦게까지 놀다가 중년 남자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가려는데 근처에 도착한 그는 그녀를 추행하려 한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기요시(가와즈 유스케)가 구해주는데 그 역시 인간말종에 남창 노릇까지 하고 있다. 

‘청춘 잔혹 이야기'의 주연 구와노 미유키와 가와즈 유스케

기요시는 강제로 마코토를 범하고 사랑한다는 명목하에 그녀를 이리저리 이용(순진한 자동차 운전자들을 마코토가 유혹하면 기요시가 돈을 갈취)하면서 결국 남자 친구로 인하여 꽃다운 청춘임에도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며 비참한 파멸을 겪게 된다. 위기에서 구해 준 남자친구를 묘사함에 있어 구원 혹은 파멸 중 ‘파멸’을 택했으며 ‘나쁜 남자’의 원형(原形)적 모델로 등장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영화는 센세이셔널 했다. 독창적 시네마스코프로 새롭고 창조적인 서사 구조와 현대적 몽타주 기법을 선보였다는 호평을 얻었다. 결국 숱한 화제를 뿌리며 많은 돈을 쇼치쿠에 벌어 준다.

요시다 기주 감독(오른쪽)과 그의 아내가 되는 배우 오카다 마리코

▲쓸모없는 녀석(ろくでなし, 1960), 그리고..
요시다 기주는 처음부터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언어 혁명’이라 추앙받는 걸작,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 1959)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 기존 일본 영화계의 반(反)작용적인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3인방 중 가장 지적이었고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여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에 능통했던 그였다. 첫 영화인 ‘쓸모없는 녀석’(별볼 일 없는 놈으로 번역되기도 함)으로 데뷔한다. 

방황하는 젊은이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틀에 박힌 반항을 거부하고 휴머니즘을 조롱하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장면 역시 ‘네 멋대로 해라’를 그대로 가져다 썼는데 삶을 지루하고 무력하게 느끼는 청년들이 일탈 된 범죄 행위들의 연속을 통해 탈출구를 찾으려 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고다르의 그것을 모방하였기에 행위들의 특별한 동기나 이유는 없다. 

그는 그 여세를 몰아 대표작 ‘아키츠 온천’(秋津溫泉, The Affair at Akitsu, 1962)을 연출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여러 가지 결과를 가져다주게 된다. 우선 철저하게 고다르, 레네, 안토니오니의 영화 언어를 모방하였다. 어느 온천여관을 배경으로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하려던 청년과 그의 목숨을 구한 여관집 딸이 시간의 흐름을 두고 다시 만나는 순환적인 구조를 통해 1945-1962년의 일본 역사를 뛰어나게 은유하고 있다. 

'쓸모없는 녀석'(1960)과 '아키츠 온천'(1962)

특히 오카다 마리코의 역량을 충분히 살리고 물(水)이 지닌 관능성을 표현한 아주 세련된 ‘연애영화’이기도 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오카다 마리코와 결혼하게 된다. 일본영화 역사상 150여 편 이상 작품에 출연한 이 대배우는 요시다 기주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게 되는데 때로는 배우, 기획, 제작자로, 그리고 아내로서 그의 독립적 영화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쇼치쿠 누벨바그의 기수 요시다 기주와 그의 페르소나인 오카다 마리코,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정숙한 모습 뒤에 숨은 도발적인 욕망을 매력적으로 연기한 오카다 마리코의 새로운 캐릭터들은 정사신(scene) 마저도 단순히 ‘볼거리’로서의 여배우의 육체가 아닌 관객과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지난 2014년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와 일본국제교류기금 공동 주최로 ‘요시다 기주+ 오카다 마리코 특별전’을 열어 총 13편의 영화를 상영한 바 있다.

'메마른 호수'(1960)

▲메마른 호수(乾いた湖, 1960), 그리고...
시노다 마사히로는 일본 만능 예술인인 ‘데라야마 슈지’(寺山修司)의 시나리오로 ‘메마른 호수’를 통해 테러리스트 청년의 고독을 그렸다. 데라야마 슈지는 일본 예술계의 한 획을 그은 천재이면서 영화 감독, 시인, 연극 연출가, 저술가, 소설가, 각본가, 작사가, 평론가, 방송진행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극단적인 형식주의를 일본 전통 예술에 결합한 독특한 미적 세계를 추구했으며 현실에 대한 지루함을 ‘혁명’으로 극복하자고 주장하면서 유럽의 전위주의와 초현실주의, 부조리극을 위시한 실험극들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내놓았기에 ‘메마른 호수’ 외에도 여러 작품을 그와 함께했다.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과 각본가 데라야마 슈지

물론 그 역시 ‘태양족’ 영화에 대해서 온정적이었기 때문에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의 소설을 토대로 한 ‘말라버린 꽃’(乾いた花, 1964)와 ‘암살’(暗殺, 1965) 같은 우수한 영화들을 통해 ‘감각적 모더니즘에 집착’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 정점에는 인형극(분라쿠) 형식을 차용한 ‘신주 텐노 아미지마’(心中天網島)를 원작으로 한 ‘동반 자살’(心中天網島, 1969)이 있다. 

‘신주’(心中)란 동반 자살을 의미하며, ‘텐노 아미지마’(天網島)는 사자성어 ‘천망회회’(天網恢恢,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빠뜨리는 게 없다)와 동반 자살의 장소인 오사카(大阪)의 실제 장소인 ‘아미지마’(網島)를 합한 조어라고 한다. ‘동반 자살’이라는 파격적 소제와 정교하고 색감 넘치는 가부키 드라마의 차용으로 1969년 키네마준보(キネマ旬報) 베스트텐 1위에 등극한 영화다. 

'동반자살'(1969)

시노다는 또한 스포츠에도 관심을 기울여 공식적인 다큐멘터리인 ‘삿포로 동계올림픽게임’(札幌オリンピック, 1972) 등을 만들었는데 시노다는 운동선수의 고독한 싸움의 감정들을 아름다운 영상에 옮기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위의 3인방 중 유일하게 ‘훨씬 덜 격렬하다’(?)는 이유로 쇼치쿠와 가장 오랫동안 일을 한 감독이다. 

▲ArtTheaterGuild(アートシアターギルド
마지막으로 쇼치쿠 누벨바그의 가장 큰 공헌자는 아무래도 ‘ATG’(아트 시어터 길드, 일본의 얼터너티브 락 밴드에 동일한 이름이 있다)라고 할 수 있겠다. 1961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주로 일본 뉴웨이브 영화를 제작했다. 다른 영화사들과는 다르게 비상업주의적인 예술작품을 제작, 배급하여 일본 영화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ATG는 모든 공개작품마다 따로 영화잡지 ‘아트 시어터’(アートシアター)를 발행했으며 영화의 시나리오와 영화평론으로 구성되었고, 상영관에서만 배포하였다. 고다르 등 유럽의 예술영화들을 수입하여 상영한 것 외에도 ATG의 ‘제작비 1000만엔 지원시스템’을 운영하여 실험적인 작품들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했다. 

가와기타 가시코와 도호 회장 가와기타 나가마사 부부

때문에 쇼치쿠를 박차고 나온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등이 ATG를 통해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또 관객 수와 상관없이 모든 영화를 최소 한달 동안 상영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독립프로덕션과 절반씩 예산을 나누어 투자해서 ‘천만엔영화’라고 불리는 저예산 영화를 제작하였음에도 수준 높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언더그라운드영화. 학생영화. 독립영화. 핑크영화(예술포르노)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이 모든 토대는 가와기타 가시코(川喜多かしこ)의 공로다. 도호(東宝)의 회장인 가와기타 나가마사(川喜多長政)의 부인이면서 당시 구미권의 예술영화를 전문 상영하는 영화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일본 아트시어터 운동 모임’을 설립하였으며 ATG 설립에 결정적 역할 및 이후에도 큰 공헌을 했다. 일본 ‘미니 시어터’(소규모 예술영화 전용관)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와나미(岩波)홀’과도 연관이 깊어 예술영화 전용관이 활성화되는 데에도 크게 기여 했다. 

ATG는 예술성이 높은 영화도 ‘비즈니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며 일본영화의 세계화는 물론 예술영화의 안정적 제작 시스템 구축과 지원은 물론 세계적인 예술영화 및 제3세계 영화의 상영을 통해 안목을 넓히고 미래의 일본영화계를 짊어질 인재를 육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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