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혁신가’ 폴 푸아레
‘잊혀진 혁신가’ 폴 푸아레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1.09.0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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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뽀아레'(POIRET) 매장. 작은 사진은 프랑스 디자이너 폴 푸아레(Paul Poiret). 사진=신세계, poiret.com/ko/main

<에디터 이재우>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이 최근 1층 공간을 리뉴얼, 재개관했다. 변화와 전략적 재배치가 이뤄졌다. 가장 큰 변화는 프라다, 구찌 등 기존 1층에 있던 해외 유명 브랜드들이 2층으로 밀려난 것. 그 자리엔 국내외 화장품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위주로 꾸몄다.

전략전 측면에선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지난 3월 론칭한 화장품 브랜드 ‘뽀아레’가 1층에 포진했다. ‘뽀아레’는 프랑스 브랜드 폴 푸아레(Paul Poiret)의 한국버전. 신세계그룹 자회사인 신세계인터내셔날이 프랑스의 유서 깊은 브랜드 폴 푸아레(Paul Poiret)의 상표권을 인수한 건 2015년 8월이다. 

그동안 폴 푸아레의 상표권은 룩셈부르크를 기반으로 하는 투자 회사 루바니스(Luvanis)가 갖고 있었다. 그랬던 상표권을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사들이면서 오랜 기간 끊겼던 명성을 다시 이어가게 되었다.

뉴욕타임스(NYT)는 2017년 7월 5일 ‘폴 푸아레의 재탄생’(The Rebirth of Paul Poiret)이라는 기사에서 정유경 신세계 백화점부문 총괄사장에 주목했다. 

NYT는 “정 사장은 지방시(Givenchy), 셀린느(Céline), 몽클레르(Moncler) 등 많은 명품 브랜드를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담당했다”며 “푸아레(Poiret)는 그가 고급 패션 하우스를 시작(또는 다시 시작)하려는 첫 번째 시도”라고 했다. 

NYT는 이부진 사장(호텔신라)과 이서현 사장(당시 삼성물산 패션부문)과의 사촌 경쟁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래서 정 사장이 푸아레 사업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실질적인 부담감을 안고 있을 것(so she may be under real pressure to make the Poiret venture a success.)이라고 전했다. 

업계에 따르면, 신세계 이명희 회장은 오래 전부터 ‘뽀아레’ 론칭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세계는 이번 리뉴얼을 통해 ‘뽀아레’ 브랜드 매출 증대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패션의 왕’이자 ‘혁신가’였던 폴 푸아레의 이력을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패션의 왕’...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신가
패션 역사가들은 프랑스 디자이너 폴 푸아레(1879-1944)를 ‘패션의 왕’(King of Fashion, 자서전 제목이기도 하다)이라고 부른다. 푸아레는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고, 발목 부분이 아주 좁아지는 호블 스커트(Hobble skirt)를 대중화 시켰다. 

기모노, 페르시아풍의 하렘 펜츠 등 오리엔탈적 요소에 집착했던 푸아레는 패션 모더니즘의 선구자였으며, 1911~1913년 사이 모델들을 데리고 외국 순회공연(영국~독일~오스트리아~벨기에~러시아~미국)을 했던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영국 BBC는 이런 폴 푸아레를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신가”(Paul Poiret was an unparalleled innovator in the world of fashion)라고 표현했다. 

2007년 5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코스튬 인스티튜트(Metropolitan Museum's Costume Institute)에서는 <Poiret : King of Fashion>라는 주제로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이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일했던 『푸아레:Poiret』의 저자 헤롤드 코다(Harold Koda)는 “푸아레가 창조한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과 영향은 숨이 막힐 정도”라고 평가했다. 푸아레는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다. 

흔히 향수는 패션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의상 마무리 차원에서 뿌려주는 ‘보이지 않는 자신감’이라는 것. 일반적으로 패션업계에서 향수의 대명사는 샤넬 넘버5로 통한다. 마릴린 먼로는 1952년 4월 <라이프> 잡지 인터뷰에서 “향수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잔다”는 야릇한 말을 한 건 유명한 일화다. 샤넬 넘버5가 먼로의 나이트가운이었던 셈이다. 

샤넬보다 10년 먼저...향수 회사 처음 만든 디자이너
샤넬 하우스가 러시아 출신의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를 앞세워 시대의 아이코닉 향수 샤넬 넘버5를 세상에 내놓은 건 1921년이다. 그런데 폴 푸아레는 이보다 10년 먼저 향수를 출시했다. 한 마디로 폴 푸아레의 역사는 향수의 역사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원단가게를 하던 가정에서 태어난 푸아레는 어렸을 때부터 향기에 매료되어 향을 혼합하곤 했다. 그런 푸아레는 20대 초반이던 1903년, 자신의 패션 하우스를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데니스라는 여성과 가정을 꾸렸다. 데니스의 아버지 역시 섬유직물업을 운영했다. 데니스는 남편 푸아레의 의상 모델로 나서는 등 최고의 뮤즈 역할을 했다. 

부부의 다섯 자녀 중엔 마르틴(Martine), 페린(Perrine), 로진(Rosine)이라는 딸들이 있었다. 푸아레는 1911년 막내딸 이름을 딴 공예학교 마르틴(Les Ateliers de Martine)과 큰딸 이름을 딴 향수 회사 로진(Les Parfums de Rosine)을 설립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향수 회사를 만들어 제품을 내놓은 건 푸아레가 최초였다. 푸아레의 향수는 장미를 기반으로 했으며, 그는 옷에 장식물로 장미 수 놓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후 파산...패션역사에서 잊혀져
푸아레의 사업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1914년 군에 입대했고 1918년에야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그의 패션하우스는 4년 동안 운영을 멈췄다. 푸아레는 1921~1925년 사이 프랑스의 여러 도시에 숍을 오픈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영국 BBC는 “하지만 그런 노력은 푸아레를 파산으로 몰아넣었다”(But the effort bankrupted him)고 했다. 푸아레는 1929년 파산을 선언했다.  

BBC는 “그러면서 예술 작품들을 내다 팔아야 했으며, 서서히 곤궁해진 푸아레는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Forced to sell his art collections, Poiret slowly sank into poverty and obscurity)고 했다. 푸아레는 가난 속에서 194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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