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 경제학㊺/ 다이에이의 대작 노선과 몰락
일본 영화 경제학㊺/ 다이에이의 대작 노선과 몰락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08.3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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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에이 경영자 나가타 마사이치를 다룬 주간현대 표지와 영화 '석가'.

당시 일본의 영화사들 중 메이저 회사들은 모두 주식회사이면서 주식이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있었다. 그중 다이에이(大映)는 쇼치쿠(松竹)나 도호(東宝)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여러 가지 차별화의 길을 걸은 영화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 사장 체제는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치명적인 약점들을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이 ‘정년 55세’를 고수(지금까지 전통)하고 있을 때 다이에이는 ‘정년 60세’를 관철 시켰다. 

그는 한 마디로 독재자였다. 연고 인물이나 아들, 친인척을 채용하고 자신을 ‘카리스마’화 했다. 기획회의 때 반대가 심하면 “그렇다면 나 혼자 하겠다”(そんなら俺一人でやる!)며 밀어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러한 카리스마로 황금기 시절에는 화려한 수상경력을 갖게 되었지만 1960년대 일본 영화계에서 그의 경영방식은 점점 회사를 수렁에 몰고 가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이에이는 다른 영화사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단점도 있었지만 장점이 더 많았던 1960년대의 다이에이였던 것이다. 

▲쇼와의 괴물 나가타 마사이치
나가타 마사이치는 흔히 ‘쇼와의 괴물’(昭和の怪物)로 불리운 사람 중 하나였다. 오죽하면 훗날 일본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와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大島渚)가 1968년 1월 ‘파시스트인가, 혁명가인가’라는 특별대담을 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앞서 1950년대 황금기를 언급하면서 그가 그 유명한 도쿄 스타디움을 완성(1962년 5월)하고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회장을 역임한 인물임을 언급하였다. 

그는 이치가와 라이조(市川雷蔵) 같은 다이에이 소속의 대스타들을 데리고 자주 야구장을 방문하였다. 특이한 이력도 있었는데 일본 펩시콜라의 대표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야구단을 인수한 롯데의 롯데리아가 지금까지 펩시콜라만 판매한다거나 도쿄 스타디움과 롯데 지바 마린스타디움에 ‘펩시’(PEPSI)광고 전광판이 고정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또한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데 바로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처럼 배급업을 하지 않았고 직영극장조차 전무했다. 직원이 무려 800여 명이나 되었으며 도쿄 촬영소와 사극 전용 교토 촬영소가 있었다. 반면 특수촬영팀을 양성했으며 대만 등 해외합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일본 내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배급권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컬러 영화 개발에 의욕적이었으며 대규모 세트장과 로케이션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리고 그가 다른 영화사들과 확연히 다른 전략을 쓰게 되는데 바로 ‘대작노선’(大作路線), 즉 70밀리 대작 위주로 승부를 건 것이다.

영화 '진시황제' 스틸 사진과 '진시황제'

▲대작노선(大作路線)
다이에이 하면 ‘70밀리 필름’으로 대작을 찍어 다른 영화사들보다 월등한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이 필름은 일반 영화용 35mm 필름 규격보다 고품질로 되어 있으며 대형화면인 관계로 일반 영화보다는 뮤지컬이나 스펙터클 한 사극이나 전쟁영화 등 스케일이 큰 영화에 적합했다. 

그러나 일반극장은 70밀리용 영사기가 없었으며 화면이 엄청 커서 작은 극장에서는 상영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 아시아에서 70밀리 대작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한국 역시 대한극장이 유일)뿐이었다. 배급업도 하지 않고 직영극장도 없는 다이에이가 70밀리 대작을 타사보다 먼저 제작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 하지만 상영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원래 ‘태양족’(다이요조쿠, 太陽族) 경향의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새로운 물결을 찾아내지 못하자 물량공세로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경쟁적으로 불어난 개봉관 수에 맞춰 메이저 영화사들은 쉴새 없이 영화를 만들어 내야 했다. A급 영화를 2주간 걸고 B급 영화와 프로그램 픽처(기획 시리즈 물)를 1주씩 돌아가면서 교체하는 살인적인 제작 환경 때문에 전반적으로 ‘일본영화의 질이 낮아 졌다’는 평가를 받던 시기였다. 

다이에이가 대작 위주로 제작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차별화 전략이었고 이러한 작품에 참여한 스텝들의 숙련도는 높아졌다. 따라서 향후 영화사가 망하더라도 프로덕션으로 옮겨가고 프로덕션이 문을 닫으면 다시 T.V 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극단적 원맨 경영(일본 영화계에서는 이를 두고 ‘나가타 나팔’「永田ラッ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에 방만경영으로 인한 폐해는 결국 다이에이의 몰락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가츠 신타로(왼쪽), 카노 준코, 이치가와 라이조(오른쪽 아래).

▲70밀리 대작들의 등장
1961년 제작한 70밀리 대작 ‘석가’(釈迦)와 대만과의 합작영화이면서 역시 70밀리 대작인 ‘진시황제’(秦・始皇帝, 1962)는 대작노선(大作路線)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석가’의 경우 대규모 세트에 철저한 고증을 위해 인도 로케이션까지 했다. 70밀리 총천연색 테크니컬러(70mmスーパーテクニラマ)영화를 표방하면서 무려 156분 동안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의 생애를 그려내었는데 특수촬영이 절정에 이른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이 1964년에 제작한 장일호 감독의 대작영화 ‘석가모니’에 영향을 준 이 영화는 미스미 겐지(三隅研次)가 연출 했는데 그는 검객(劍客)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훗날 많이 만들었으며 유명한 자토이치(座頭市) 시리즈의 초기에 감독을 맡기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총 제작비가 당시 돈으로 5억엔~7억엔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하니 엄청난 대작임에 틀림 없다. 

‘진시황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작품은 200분이나 되는 상영시간은 물론 다이에이의 톱스타들이 총출동한 영화로서 의미가 있었다. 진시황제 역에는 가츠 신타로(勝新太郎), 복수를 꿈꾸는 여주인공에는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야마모토 후지코(山本富士子)가 캐스팅 되었다. 그 외에도 가부키 배우 출신으로 다이에이의 간판이었던 이치카와 라이조(市川雷蔵),카노 준코(叶顺子) 등이 출연했다. 

특히 카노 준코의 경우는 당시 여배우 트로이카였던 쿄 마치코(京マチ子), 야마모토 후지코, 와카오 아야코(若尾文子)의 뒤를 잇는 기대주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의 컬러 촬영의 관행(얼굴의 클로즈업을 찍을 때 600~800와트 조명을 맞춤)과 무리한 스케줄로 ‘실명’ 판정이 내려진 후 은퇴를 한 비운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연출을 맡은 시게오 다나카(田中重雄)감독은 특수 촬영에 있어 일가견이 있었기에 전투장면과 만리장성 등 재현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영화 속에서 구현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영화 '자토이치'

▲자토이치(座頭市) 시리즈
1960년대 다이에이의 영화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자토이치’(의역하면 맹인 검객 이치 시리즈; 1962-1971)다. 일본영화 역사에서는 최장수 시리즈의 기록을 갖고 있다. 평소에는 눈이 먼 안마사로 살고 있지만 천재적 검술을 지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정의의 검객 이야기다. 

현대에 등장하는 맹인 검객과 관련한 모든 컨텐츠의 시초다. 주인공인 이치(市)는 맹인이기는 하지만 천재적 검술과 뛰어난 청각을 이용한 도박술을 지닌 신비의 인물이다. 이치는 일본 전역을 떠돌지만 지방의 악랄한 권력자들을 벌하고 모자간의 재회를 돕는 등 선행을 한다. 안마사라는 설정 때문에 수위 높은 장면도 등장하지만 이 시리즈는 사실 일본 무협영화의 자존심과도 같다. 홍콩이 ‘외팔이 검객 시리즈’라면 일본은 ‘맹인 검객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영화 '시라누이 겐쿄'

가츠 신타로는 처음에 주연 연기자로 다이에이에 입사하지만 이치카와 라이조의 그늘에 가려진 배우였다. 그가 승부수를 던졌는데 미남 역할도 주연도 아닌 에도 시대의 맹인 안마사 역할이었다. 모리 카즈오(森一生) 감독의 ‘시라누이 겐쿄’(不知火検校, 1960)에서 자토의 우두머리인 ‘겐쿄’ 배역을 맡으면서 자토이치 시리즈로 발전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맹인 세계의 부정을 일소하다가 나중에는 악의 권력자들과 맞서 싸우는 캐릭터로 진화하기에 홍콩 무협영화에도 영향을 주어 ‘초인적 맹인’이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 시리즈의 최종 편인 1989년 작품 ‘자토이치’에서는 직접 감독을 맡기도 했는데 ‘납검’(納劍: 검을 현란하게 칼집에 꽂는)의 달인이었던 와카야마 토미사부로(若山富三郎)와 쌍벽을 이뤄 당대에 인기몰이를 했다.

도쿄 올림픽(1964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도 유명한 이치가와 곤.

▲이치가와 곤(市川崑)
다이에이에서 이치가와 라이조와 가장 많이 호흡을 맞추며 현대물로 능력을 발휘하고 오락 영화와 실험 영화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한 이치가와 곤은 1956년 ‘버마의 하프’(ビルマの竪琴, 닛카쓰 제작)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산지오르지상을 수상한 세계적 감독이다. 그는 다이에이의 문예 영화를 책임졌다. 블랙 코미디의 대가였던 그는 21세기 초반까지 일본영화계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 '버마의 하프'

‘불꽃’(炎上, 1958)과 ‘파계’(破戒, 1962)가 그 시절 대표작이다. ‘불꽃’은 이치가와 라이조가 준각사(驟閣寺)에서 승려수업을 받는 말더듬이로 나와 화제가 된 작품으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장편소설 금각사(金閣寺)가 원작이다. 흑백과 시네마스코프의 절묘한 결합으로 주인공 미조구치가 사찰에 집작한 나머지 발생한 화재장면이 압권이었다. 

하세가와 가즈오와 영화 '유키노조변화'

‘파계’는 자연주의 문학으로 유명한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의 원작을 영화화했다. 역시 이치가와 라이조 주연으로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천민의 거주지에서 피차별부락민 교사가 ‘계급 철폐’를 타파해 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하세가와 가즈오(長谷川一夫)가 주연하는 영화 제300회를 기념하여 ‘유키노조변화’(雪之丞變化, 1963)를 리메이크 했다. 이 영화는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영화를 30여년 만에 다시 만들면서 하세가와 가즈오에 대한 헌정은 물론 온나가타(女形, 여장 남배우)가 가부키 영화에 끼친 영향을 상기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이치가와 곤은 1964년 도쿄 올림픽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도 유명하다. 

연기 지도를 하고 있는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

▲마스무라 야스조(增村保造)
1960년대 다이에이를 대표하는 감독은 뭐니뭐니 해도 마스무라 야스조다. 그는 누벨바그의 진정한 선구자로 1957년 다이에이와 계약을 맺는다. 그는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와 이치가와 곤의 조감독이 되기 이전 로마의 영화실험센터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등 거장들에게 직접 연출 트레이닝을 받은 보기 드문 인재였다. 

그는 귀국하여 당대의 일본영화를 ‘정서적이고 순응적이며 체념적’이라며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의 관심은 ‘일본 여성’이었다. 고전적인 일본 여성상보다는 자립 욕망과 주체성이 있는 이탈리아 여성상으로 묘사하려 했다. 빠른 속도의 리듬과 몽타주, 불손하고 현대적인 어조가 그 특징이었다. 그는 관능미를 드러내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데뷔작인 ‘키스’(くちづけ, Kisses, 1957)는 신세대 젊은이들을 다루면서 속도감과 리드미컬한 편집으로 눈길을 끌었다.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영화 '키스'

가진 건 허세뿐인 남녀주인공에는 가와구치 히로시(川口浩)와 노조에 히토미(野添ひとみ)가 등장했으며 두 사람은 이후 연인으로 발전하더니 실제 부부가 되었다. 미조구치 겐지에 의해 발굴된 와카오 아야코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작품 속에서 변태적 에로티즘을 통해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명랑소녀’(靑空娘, 1957)에서 주연을 맡은 이후 미스터리 영화 ‘아내는 고백한다’(妻は告白する, 1961)에서는 팜므파탈 역을 맡아 청춘스타에서 대배우로 발돋움 한다. 

노조에 히토미(왼쪽)와 가와구치 히로시는 실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특기는 ‘속도감을 중시한 냉소적인 스토리텔러’라는 점이었다. 또 90분 내외의 짧은 러닝타임임에도, 심리묘사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묘사해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가 팽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이에이의 대작들과는 DNA가 전혀 다른 영화였기에 더 주목을 받았다. ‘문신’(刺青, 1966)은 일본을 대표하는 탐미주의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으로 전당포 사장의 딸인 오츠야(와카오 아야코)가 무당거미를 방불케 하는 기생이 되어 남자를 미치게 하고 나중에는 집단 살해까지 하게 되는데 그의 영화중 걸작 중에 걸작으로 손꼽힌다. 

마지막으로 마스무라 야스조는 1971년 도산하는 다이에이의 마지막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하다. 1971년작 ‘불장난’(遊び)이 그것으로 다카하시 게이코(高橋惠子)와 다이몬 마사아키(大門正明) 등이 주연을 맡았으며 소년과 소녀가 구멍이 난 보트를 타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게 여울목으로 출발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마치 다이에이의 마지막 순간을 암시하는 것 같다는 쓸쓸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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