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㊼/ 도에이의 ‘임협영화’(任俠映畵)
일본영화 경제학㊼/ 도에이의 ‘임협영화’(任俠映畵)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11.1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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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이의 대표적 '임협 시리즈' 중 하나인 영화 '일본여협전'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얼마 전 뉴스를 통해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일본의 야쿠자들이 완전히 몰락했다는 이야기였다. ‘야쿠자’(ヤクザ, やくざ)로 불리는 폭력단은 에도시대 사설 경비집단으로 출발했다. 이후 몰락한 무사와 도시 빈민 등을 수혈하며 몸집을 불렸고 패전 후 고도성장기,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세를 키웠다. 

원조는 14세기 에도시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즈이인 쵸베이’(幡随院長兵衛)라는 인물로, 일본 협객(俠客)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원래 직업은 쿠치이레(口入れ, 청부업자)라고 하는데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의협심(義俠心)이 있는 협객이었다고 한다. 

1992년 ‘폭력단 대책법’을 시작으로 야쿠자도 내리막을 걷는다. 전국 22개 조직을 ‘지정폭력단’으로 규정하고 경찰과 공안이 철저히 관리했다. 2011년 전국 지자체에 도입된 ‘폭력단 배제조례’를 통해 지자체에 야쿠자 조직원으로 등록이 되면 본인 명의로 휴대폰 개설, 은행 거래도 안되고, 집을 사고 빌려주는 행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조직에서 탈퇴했어도 5년이 지나야 제한을 풀어주는 ‘5년 룰’까지 생겨 목을 조여 야쿠자는 몰락하고 말았다. 

‘야쿠자’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패전 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교토(京都)에서 시대극을 활발히 만들던 도에이(東映)가 꺼내든 회심의 카드가 바로 야쿠자를 주인공으로 한 ‘임협영화’였기 때문이다. 무사 영화를 만들자니 검열을 피하기 힘들었고 교토의 사극 촬영소를 활용하기에도 좋았으며 무엇보다도 관객들의 만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쿠자를 미화했다는 점에 있어서 훗날 평가가 엇갈리는 선택이기도 했다.

‘임협영화’의 거장 사와지마 다다시(沢島忠) 감독

▲의협(義俠)과 연관 지은 까닭?
야쿠자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쓸모없거나 가치가 없음’, ‘백수건달’이라는 말이 나올 뿐, ‘의리에 대한 존중’이라든가 ‘의협심’(義俠心)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를 ‘임협’(任俠, 닌쿄) 혹은 ‘극도’(極道, 고쿠도), ‘협객’(俠客)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그들이 가장 만족스러워 한 용어는 바로 ‘임협’이다. 

사전적 의미는 ‘약자를 돕고 강자를 물리치는 정의감이 있음’, ‘용맹스럽고 호협한 사람’으로 국어사전에 등장한다. 그래서 ‘임협영화’라는 명칭이 부여 되었으며 지난 2009년에 방영되었던 쿠사나기 츠요시(草彅剛, 초난강) 주연의 드라마 ‘임협헬퍼’(任侠ヘルパー)도 당연히 야쿠자의 이야기가 되겠다. 

그렇다면 왜 야쿠자 이야기였을까? 사실 에도시대의 가부키 공연이나 초기 일본영화의 가장 큰 스폰서는 야쿠자였다. 야쿠자들의 이야기를 미화하는 공연이나 영화도 등장하는데 제작비를 대기도 하고 직접 극장이나 배급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부키(歌舞伎) 공연에서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가부키모노(歌舞伎者, 법을 따르지 않고 거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이)인데 유별나게 화려한 차림을 즐기고 특이한 언동을 하는 사람은 물론 무용수, 무희 가부키 배우를 뜻하기도 했다. 

이때 배우를 ‘야쿠샤’(役者)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소재는 무궁무진했고 거부감도 없었다. 또한 그들의 자본이 투입되는 순간부터 그들의 정체는 왜곡되기 마련이다. 참고로 야쿠자의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고쿠도’는 ‘의리의 길을 극하는 이’, ‘토세이닌’(渡世人)은 ‘세상을 돌아다니는 이’, ‘아소비닌’(遊び人)은 ‘노는 이’라는 뜻이 되겠다. 

▲도에이의 기획물
아무튼 ‘야쿠자 영화’는 1960년대 일본의 젊은 남성관객들로부터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장르영화였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약 10년간 성행했으며 ‘임협영화(任俠映畵)’라고 불리웠다. 도에이의 기획물로써 만들어진 이 철저한 오락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특히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한 임협영화들은 영화적 패턴(공식)을 만들어내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패턴이란 의리(우정)와 인정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최후에는 자기 희생을 아끼지 않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야쿠자들을 ‘협객’으로 변신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이 공식은 한국 액션 영화는 물론 홍콩의 느와르 영화에도 빈번하게 대입된다. 훗날 이 장르는 ‘로망 포르노’와 결합하여 ‘불량여두목전-이노시카 오쵸’(不良姐御伝 猪の鹿お蝶, Sex and Furt, 1973) 같은 성애와 무협을 동시에 다루는 영화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어 ‘문신한 기모노 여자의 핏빛 나는 복수극’ 시리즈를 양산함과 동시에 ‘킬빌’(Kill Bill, 2003)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 전공투(全学共闘会議) 같은 급진적 대학생들의 과격한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급진적 민족주의자였던 미시마 유키오(平岡公威) 등이 임협영화 예찬자(禮讚者)가 되었다. 영화비평에 있어서 엘리트주의와 반엘리트주의의 격전장이 되었고 메이지부터 쇼와 초기까지를 배경으로 구 야쿠자와 신흥 야쿠자의 대립을 그려내면서 ‘잃어버린 예전의 좋은 일본’ 대 ‘근대화한 새로운 일본’으로 규정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도 경제성장과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그리고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 사이의 극심한 갈등이 임협영화를 대상으로 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러한 영화들은 기존 사극의 의적(義賊) 영화들과는 결이 달랐다. 주인공들은 사무라이 윤리를 계승하고 금욕적이며 인정 많고 일본적 의미의 유교적 도덕관을 구현했다. 착한 배역은 항상 일본식 옷에 단도를 숨기고 대결 장소로 나가는 반면, 악역은 예외 없이 싸구려 양복에 권총을 지니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이는 전후 일본이 다시금 전근대적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영화 ‘인생극장·히샤가쿠’(1963)

▲인생극장·히샤카쿠(人生劇場 飛車角)
그중 가장 대표적 작품으로는 ‘인생극장·히샤가쿠’(人生劇場 飛車角, 1963)이다. 도에이의 임협영화의 시작이다. 오자키 시로(尾崎士郎)의 자전적 이야기다. 아노나리 츠요시(青成瓢吉)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 문예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청춘편(青春篇), 애욕편(愛慾篇), 잔협편(残侠篇), 풍운편(風雲篇), 이수편(離愁篇) 등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감독을 바꿔가며 시리즈로 혹은 별개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그중 1963년판은 일본 영화 역사상 최강의 캐스팅으로 회자 되고 있다. 협기(俠氣, 교오키, きょうき), 정의감(正義感)、의리(義理)와 인정(人情)을 일본적심정(日本的心情)으로 규정한 이 작품은 특히 ‘청춘편’이 서민의 정서를 파고 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뤄 내면서 이 장르는 흥행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일찍이 일본 근대문학의 리더였던 기타무라 토코쿠(北村透谷)는 일본인의 서민 라이프 스타일을 두 가지로 정의한 바 있다. 문화를 체득한 사람을 ‘이키’(粹, 멋쟁이)와 ‘교’(협, 俠)라 했다.  이키가 남녀간의 세련되고 도회적 라이프스타일이었던 반면, ‘교’는 의리와 인정을 중요시 하는 서민적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야쿠자 역시 의협심이 강한 집단으로 영화 속에서 그려진다.

후지 준코, 다카쿠라 켄, 쓰루다 코지(왼쪽부터)

사와지마 다다시(沢島忠) 감독의 이 영화는 고난을 참고 견디면서도 상실해 가는 전통 사회의 인간관계를 따르는 쓰루타 고지(鶴田浩二)와 의리와 인정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최후에는 자기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다카쿠라 켄(高倉健)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순정파 여배우였지만 훗날 여성 야쿠자의 대명사가 된 후지 스미코(후지 준코, 富司純子), 감상적인 사나이 도미 사부로(登美三郎)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주목 받았다. 

모든 원인은 묘령의 여인인 오토요(후지 준코 역)를 숨겨주고 야쿠자의 수금원 사이의 다툼으로 출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나이들의 배신, 의리, 인정 등 모든 협객 스토리의 코드들이 등장한다. 일본인들에게는 전근대적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어떤 자료에는 오자와 시게히로(小沢茂弘) 감독의 도박(博徒, 1964)이 임협영화의 원조라는 설이 있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인생극장·히샤카쿠’를 원조로 본다. 제작연도에서 우선 앞서기 때문이다. 또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대배우 다카쿠라 켄의 신화가 시작된 작품이기도 하다.

▲스타 시스템과 ‘공식’으로 인기몰이
1960년대 유행한 임협영화는 일본인들에게 전근대적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사실 전쟁 전 의적(義賊)영화는 가장 인기 있는 시대극이었다. 구니사다 주지(國定忠治)와 네즈미고조 지로키치(鼠小僧次郎吉), 이시카와 고에몬(石川五右衛門) 같은 도적이지만 반영웅적이고 의적으로 불리게 된 사나이들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어찌 보면 이들은 야쿠자의 원조이기도 했다. 이들은 조직원들을 거느렸고 도박판을 장악하는가 하면 도적질을 하기도 했지만 대기근이 들면 마을을 돕기도 하고 의리와 인정으로 평판이 서민들에게는 좋았던 캐릭터들이었고 ‘사무라이 윤리’를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들이었다. 전후 일본 사회는 상실해 버린 의협심을 아쉬워하면서 그 대안으로 야쿠자들에게서 매몰되어가는 공동체 의식과 의협심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했다. 

따라서 그 내용들은 방랑하는 야쿠자가 본의 아니게 대립관계에 휘말리게 되고 동지끼리의 분열과 배신이 난무하지만 끝내 용맹스럽게 살아남은 주인공이 영웅으로 남는 ‘공식’으로 구현되었다. 의적이 야쿠자로 바뀐 것이다.

게다가 당시 영화계가 전적으로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캐릭터가 구축된 배우는 흥행을 위해서라도 동일한 포맷의 작품에 연속 출연(시리즈)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도에이는 1966년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들 중 최초로 심야상영 및 24시간 상영을 감행한다. 따라서 이 장르는 10년 동안 도에이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는데 실제로 야쿠자들의 생활을 잘 아는 감독들이 이 시리즈물들을 책임졌다. 

이중 가장 유명한 감독은 베테랑이자 활극의 거장인 마키노 마사히로(マキノ雅広)다. 메이지 말기, 미모와 터프함으로 인기를 끌던 야나기바시(柳橋)의 한 게이샤가 도박장을 열고, 세력권을 확장하려고 악랄한 수단을 강행하는 악덕 야쿠자 일가를 동료들의 협력을 얻어 타도한다는 내용의 ‘관동 히자쿠라 일가’(関東緋桜一家, 1972) 같은 걸작 영화를 남겼다. 

이때 시리즈물로 인기 있던 영화들로는 쇼와잔협전(昭和殘俠伝), 아바시리 번외지(網走番外地) 등이 있으며 이 영화들을 견인한 배우로는 다카쿠라 켄과 후지 준코(후지 스미코, 富司純子)였다. 이 두 사람이 함께 주연한 영화는 모두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함께 출연한 영화도 많았다.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과 후지 준코

▲붉은 모란 도박꾼(緋牡丹博徒)
임협영화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었다. 후지 준코로 대표되는 ‘붉은 모란 도박꾼’(緋牡丹博徒) 시리즈 같은 여성 캐릭터의 등장이 그것이다. 마키노 마사히로(マキノ雅弘) 감독의 눈에 들어 후지 준코(藤純子)라는 예명을 받은 그녀는 시대극, 현대극, 임협물에 걸쳐 종횡무진 활약을 한다. 야마시타 고사쿠(山下耕作) 감독의 ‘붉은 모란 도박꾼’(緋牡丹博徒, 1968)에서 첫 주연을 맡아 흥행에 성공한다. 

주인공 ‘야노 류코’(矢野竜子, 붉은 모란의 오류) 역의 인기로 시리즈화 되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 여배우가 되는데 그 중 스가와라 분타(菅原文太)와 공연한 ‘붉은 모란 도박꾼 오류 방문’(緋牡丹博徒 お竜參上, 1970)은 걸작 중 걸작으로 꼽힌다. 아마도 이후 문신을 하고 기모노를 입은 묘령의 여인이 주사위를 던지거나 도박에 참여한다면 바로 ‘붉은 모란 도박꾼’이 모티브일 것이다. 

영화 '여자 도박꾼'과 '형제의리' 시리즈

한(怨)과 복수로 점철된 여자의 처절한 복수 활극의 구조를 갖는 것도 그 특징이다. 이후 일본여협전(日本女俠伝)시리즈, 여자도박꾼(女渡世人)시리즈도 성공을 거둬 쓰루타 고지(鶴田浩二), 다카쿠라 켄과 함께 ‘도에이(東映)의 3대 스타’로 불렸다. 당대에 일본영화계를 이끈 배우 중에서 관객동원력 1위를 기록하며 도에이가 낳은 ‘관객을 부르는 유일한 대 여배우’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참고로 당시 도에이의 대표적 임협 시리즈물들은 다음과 같다. ▲도박 시리즈(博徒, 총12화) ▲일본협객전 시리즈(日本侠客伝, 총11화) ▲쇼와 잔협전(昭和殘俠伝, 총9화) ▲도박치기(博奕打ち, 총10화) ▲형제의리 시리즈(兄弟仁義, 총8화) ▲붉은모란 시리즈(緋牡丹博徒, 총8화) ▲남자의승부 시리즈(男の勝負, 총4화) ▲일본 여협전(日本女俠伝, 총5화) ▲여자 도박꾼(女渡世人, 총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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