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한줄 어록/ 남들과 비슷하면 '노잼'이다
CEO 한줄 어록/ 남들과 비슷하면 '노잼'이다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1.11.12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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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야마우치 히로시(山内 溥)
▶경력: 닌텐도(任天堂) 3대 사장
▶태생: 교토
▶생몰년도: 1927~2013

재탕, 모방을 뜻하는 단어 ‘니방센지’(二番煎じ)의 교훈
<에디터 이재우> ‘니방센지’(二番煎じ)라는 단어가 있다. 한약이나 차를 두 번 달이는 걸 뜻한다. 한 번 달인 것을 다시 사용하는 재탕인 셈이다. 이 단어는 더 나아가 ‘남의 것을 모방하거나 복사하다’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일본 게임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닌텐도 3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山内 溥)는 이 니방센지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강조한 경영자였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필수품의 경우, (비슷한) 넘버2 제품일지라도 가격이 싸면 팔립니다. 하지만 오락은 모방으로는 안 됩니다."(必需品ならば二番手でも安いほうが売れます しかし娯楽は二番煎じではダメです)

일상생활에 자주 쓰이는 물건이라면, 가격이 싸면 카피 제품도 팔려 나간다. 하지만 재미가 생명인 오락(엔터테인먼트)에는 남의 것을 카피한 제품은 가격이 저렴하더라도 팔리지 않는다. 남의 것을 흉내내거나, 모방한 제품으로는 시장에서 이길 수도, 고객에게 감동을 줄 수도 없다는 얘기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오락은 항상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며, 개량으로는 안된다”(娯楽には常に“異質の創造”が必要、改良じゃダメ)고 했다. 오락을 기치로 내건 기업인만큼 무엇보다 신선한 아이디어가 반영된 제품이라야 한다는 의미다. '개량'이라는 이름으로 살짝 덧입혀서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렇듯, 야마우치 히로시는 창조적인 인재 발탁에 밝은 눈을 가진 경영자였다. 그의 최대 공적 중 하나가 후계자 선택이라는 평가도 있다. 야마우치의 후임 사장은 세습 경영인도, 사내 임원도 아니었다. 야마우치는 2000년, 벤처 연구소에서 일하던 이와타 사토루(岩田聡)를 스카우트 해 사장으로 발탁했다. 당시 이와타의 나이는 42세였다. 

당초 야마우치의 후계자로 주목받던 사람은 아라카와 히로시(荒川實)라는 사위였다. 교토대를 나와 미국 MIT에서 공부한 아라카와는 마루베니에서 일한 상사맨이었다. 닌텐도의 미국 진출 초기 ‘패미컴’ 등 게임기를 미국에 보급시킨 공로자이기도 했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그런 미국법인 사장인 사위를 해임해 버린다. 그렇게 후임으로 선택된 이가 외부인사 이와타 사토루였다. 

야마우치 사장은 한마디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언론을 싫어해 방송 출연을 하지 않았다. 책을 출판하지도 않았다. 경제단체인 경단련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며, 경영자 모임에 참석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 그는 미국 프로야구 최초의 ‘비백인’ 구단주이기도 했다. 1992년 시애틀 매리너스(Seattle Mariners)가 경영 위기에 처하자 최대주주로 참여했다. 2008년 Forbes지가 발표한 ‘일본 최고부자’에서 랭킹 톱에도 올랐다. 닌텐도의 게임기 ‘Wii’가 경이적인 인기를 끌며 회사에 수익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닌텐도 3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

교토에서 화투제조사로 출발한 닌텐도
알려져 있듯이, 가정용 게임기기로 유명한 닌텐도(任天堂)는 교토에서 창업한 화투 제조회사로 출발했다. 창업주는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内房治郎: 1859~1940). 화가이자 장인(匠人)이었던 그가 일본의 전통 화투(花札: 하나후다)를 만드는 가게 ‘임천당골패’(任天堂骨牌: 닌텐도곳파이)를 창업한 건 1889년이다. 골패(곳파이)는 일본의 상업용 카드 ‘카루타’(カルタ)를 지칭한다.

회사 이름 닌텐도(任天堂)는 한자 뜻 그대로다. ‘사람이 할 일을 다하고 운을 하늘(天)에 맡긴다(任)’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대회장 야마우치 후사지로는 손재주가 좋았다고 한다. 화투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도제들을 키웠고, 닌텐도 카루타(カルタ)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은퇴 무렵, 닌텐도는 일본 최대의 카드 회사가 되어 있었다.

창업주 야마우치 후사지로에겐 아들이 없었다. 경영을 잇기 위해선 데릴사위가 필요했다. 그의 딸 야마우치 테이(山内貞)는 가네다 세키료(金田積良)라는 남성과 결혼했다. 가네다 세키료는 성을 야마우치로 바꾸고 ‘야마우치 세키료’(山内積良:1883~1949)가 됐다. 창업주의 ‘양자사위’가 된 것이다. 그런 그는 1929년 닌텐도의 2대 사장에 취임했다.

어찌된 일인지, 세키료-테이 부부 역시 아들이 없었다. 부부의 장녀 야마우치 키미(山内君)는 이나바 시키노조(稻葉鹿之丞)라는 남자와 혼인했다. 이나바 시키노조 역시 자신의 성 이나바를 버리고 야마우치 성을 얻었다. 야마우치 시카노조(山内鹿之丞)라는 이름의 닌텐도 상속자가 된 것이다.

야마우치 시카노조와 아내 키미 부부는 3대째 만에 귀한 아들을 얻었다. 야마우치 히로시(山内 溥:1927~2013)라는 사람이다. 그런데 3대 사장 자리는 아버지 시카노조가 아니라 아들 히로시에게 돌아갔다. 히로시가 다섯 살 무렵, 아버지 시카노조가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스물 두 살 때 사장 취임...닌텐도 부흥시대 열어
창업주의 증손자 야마우치 히로시는 와세다대 전문부 법률과를 다니다 22세에 갑자기 사장에 오르게 된다. 할아버지가 병으로 쓰지면서다. 닌텐도의 3대 사장에 신출내기가 취임하면서 사내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노동 쟁의였다. 젊은 사장을 싫어하는 사원들이 속출했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그런 직원들과 간부들을 해고하고 자신만의 경영스타일을 고집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경영 수완으로 쟁의를 극복하고 사장직에 안착했다. 

그는 닌텐도곳파이(任天堂骨牌)라는 회사 이름을 ‘닌텐도 카루타’로 바꾸었다. 1953년엔 일본 최초로 플라스틱으로 코팅한 카드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회사 이름은 카루타를 떼어내고 ‘닌텐도주식회사’가 되었다. 이처럼 야마우치 히로시는 닌텐도의 중흥시대를 열었다. 

1981년 가정용 텔레비전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를 내놓았는데, 패미컴이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으면서 일본에서 붐을 일으켰다. 패미컴 뒤에도 ‘게임보이(89년), 슈퍼패미콘(90년) 등 신상품이 잇달아 출시되면서 닌텐도는 일약 세계적인 게임 기업으로 변신했다. 어느 언어권의 나라에서도 Nintendo는 게임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2000년까지 무려 53년간 사장을 맡았던 야마우치 히로시는 2013년 9월 19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당시 85세) 며칠 후인 9월 23일,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구장인 세이프코필드(Safeco Field)에서는 추모 묵념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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