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㊽ /도호(東宝)의 내공(內功)
일본영화 경제학㊽ /도호(東宝)의 내공(內功)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1.12.04 2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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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의 청춘스타 가야마 유조의 어제와 오늘. 그의 출연작 '젊은대장 시리즈'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이번 연재는 1960년대 도호(東宝)의 이야기다. 제목을 잡기 참 고민이 되었다. 1960년대 일본의 영화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메이저 영화사들 중에 도호는 선방(善防)을 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호는 독립영화들까지도 배급을 지원할 만큼 배급업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시장에 진출하여 자사의 영화들을 직접 상영할 만큼 마케팅 전략도 탄탄했고 ‘시리즈물’에 특화되어 있었다. 

특히 자사 영화의 주요 타깃층을 당시 성장하고 있던 ‘중산층’ 그중에서도 도시 대학생, 샐러리맨, 가족 등으로 설정하였다. 이 기조는 1970년대까지도 유지가 되는데 ‘도호의 영화관이라면 가족 동반이나 아베크족(연인)도 안심’이라는 표어를 내걸 만큼 밝고 명랑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도호’하면 가족영화를 잘 만들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아니메(에니메이션)를 꾸준히 제작하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이때부터 도호는 분업화를 조금씩 시행해 나간다. 분사(分社)를 준비하면서 영역별 계열사를 만들 계획이 진행되었다. 제작파트와 배급 및 홍보 파트가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갔고 이후 ‘한큐 그룹’(阪急阪神ホールディングス株式会社)의 토대를 닦으며 배급과 부동산 사업에 집중했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도호의 극장들은 지하철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평가 받는다. 특히 1966년 이후 은행에서 자산의 1% 이상을 차입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무차입경영’을 이루고 있으며 이미 형성된 시스템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사내 문화를 정착시켰다. 

로스앤젤레스 '도호 라 브레아(La Brea)'극장의 어제와 오늘

▲미국에서 자체 배급한 선구자
도호가 선구자적이었던 것은 미국 내 직배를 가장 먼저 실행했다는 점이다. 1950년대에 헨리 세이퍼슈타인(Henry G. Saperstein)을 통해 미국으로 몇 차례 영화를 성공적으로 수출한 후 가능성을 발견하자 아예 로스앤젤레스의 ‘라 브레아 극장’(Toho La Brea Theatre, 지금은 한인교회로 바뀜)을 인수하여 배급사에 영화를 판매할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영화를 상영(직배)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도호 극장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샌프랜시스코와 뉴욕에도 브런치 극장을 오픈할 만큼 한때 큰 인기를 누렸다. 당연히 영화의 본고장이라는 할리우드가 위치한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추억하는 이가 많으며 보난자(Bonanza) 같은 정통 웨스턴 시리즈 영화는 물론 고질라(ゴジラ, Godzilla, 괴수의 원조) 모스라(モスラ, Mosura, 괴물 나방), 로단(ラドン, 원래 일본에서는 Radon이라는 이름을 붙였었으나 원소의 이름이 연상되어 부득이 세계화를 위해 Rodan으로 개명한 괴수 새) 같은 괴수 영화들이 피가 난무하는 사무라이, 닌자 영화들과 함께 상영되어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특히 일본의 무협 영화들은 판타스틱한 검술, 과도하고 화려한(?) 대학살, 명예로우면서도 비장한 죽음 등으로 관객을 열광시켰다.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같은 감독들이 어릴 적 영향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괴수 영화와 함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감독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상영했는데 이 전략은 매우 앞선 것이었다. 사실 미국에서 일본영화나 드라마 등에 거부감이 없고 할리우드 영화에 일본 배우들이 출연하고 영화 속에 빈번하게 일본의 문화가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케리 그랜트(Cary Grant) 주연의 영화 ‘Walk, Don’t Run’. 오른쪽은 1966년 일본 개봉 당시의 포스터.

직배 전략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쌓은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 주었다. 이 영향으로 1966년 케리 그랜트(Cary Grant)주연의 ‘Walk, Don’t Run’의 경우 도쿄 올림픽이 영화의 큰 주제일 뿐만 아니라 무대도 도쿄이고 성화봉송 장면 등 ‘올림픽홍보물’ 같은 분위기가 연출 된다. 특히 대사에 빈번하게 올림픽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시리즈물의 절대 강자
도호는 전통적으로 ‘시리즈’물에 절대 강자였다. 일단 한 영화가 히트를 하면 속편을 내놓기도 하고 아예 처음부터 ‘시리즈물’로 기획하기도 했다. 물론 도호의 제작환경은 매우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신들의 노선과 맞는 작품이라야 했지만 이 전략은 1960년대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과 달리 비교적 리스크 관리가 잘되는 회사로 살아남을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장 시리즈’(社長シリーズ)

‘사장 시리즈’(社長シリーズ)를 비롯, ‘무책임 시리즈’(無責任シリーズ)가 가장 대표적이며 이른바 ‘크레이지 영화’(クレージー映画)는 총 4가지로 분류되어 제작 되었다. ‘무책임 시리즈’를 비롯하여 ‘일본 제일의 OOO사나이’가 등장하는 ‘일본제일 시리즈’(日本一シリーズ), ‘미친(크레이지) 작전 시리즈’(クレージー作戦シリーズ), 시대극 작품(時代劇作品)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고도 성장기를 가볍게 풍자하는 뮤지컬 코미디로 인기를 얻었다. 

총 24편이 제작된 이른바 ‘역전 시리즈’(駅前シリーズ) 역시 큰 인기를 구가했으며 1930년대 쇼치쿠(松竹)의 명랑한 스포츠맨 대학생이 등장하는 청춘물을 시리즈화 한 가야마 유조(加山雄三) 주연의 ‘젊은 대장 시리즈’(若大將シリーズ)까지 평단과 관객들의 지지를 얻었다. 

영화 '일본제일의 야쿠자'. 제목과 달리 코미디 영화다.

특히 ‘젊은 대장 시리즈’의 경우에는 하와이 올로케이션(하와이의 젊은 대장, ハワイの若大将, 1963)을 감행하여 볼거리를 제공했는가 하면 크레이지 작전 시리즈(作戦シリーズ)의 ‘크레이지 멕시코 대작전’(クレージーメキシコ大作戦, 1968)의 경우는 멕시코 시티 올림픽을 겨냥한 멕시코 올로케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시리즈물들은 다른 제작사들의 자극적 소제와의 차별화는 물론 다이에이(大映)의 대작 노선과도 확연하게 다른 도호만의 히트 상품이었다. 

후루사와 겐고 감독

이중 가장 큰 인기는 아무래도 ‘크레이지 영화’들이었다. 우에키 히토시(植木等)와 크레이지 캐츠(クレージーキャッツ) 멤버들(이들은 영화에 동반 출연하고 밴드를 조직하여 음반을 내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다)이 주연이었으며 도호와 와타나베 프로덕션(東宝及び渡辺プロダクションが)이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주로 후루사와 겐고(古澤憲吾)가 감독한 영화들로서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최고 희극배우 우에키 히토시의 전성기 시절과 현재.

특히 우에키 히토시는 일본 최고의 희극배우로서 명성을 쌓았는데 ‘일본 제일 시리즈’에서 주인공인 샐러리맨으로 등장하지만 각 영화 마다 배경 회사들의 업종이 달라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특히 특유의 발을 들어 올리는 캐릭터는 일본과 아시아 지역 코미디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한 ‘무책임 시리즈’의 경우는 ‘일본무책임한시대’(ニッポン無責任時代, 1962)와 ‘일본무책임한놈’(ニッポン無責任野郎, 1962) 두 편이 제작되었는데 정체 불명의 남자가 회사에 들어와 출세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우에키 히토시의 출세작이기도 했다. 

시리즈물 제1대 마돈나 '단 레이코'

‘크레이지 영화’들은 무엇보다도 ‘일본 제일의 OOO 사나이’가 주인공인 만큼 ‘007 시리즈’의 본드 걸처럼 ‘마돈나’(マドンナ)들이 등장했는데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은 모두 거쳐 갔다. 제 1대 마돈나인 단 레이코(団令子, 1963년 일본 제일의 색남/日本一の色男)를 필두로 청춘스타였던 사카이 와카코(酒井和歌子)까지 총 10명이 출연해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청춘스타였던 사카이 와카코(酒井和歌子)

‘일본 제일의 남자 중 남자’(日本一の男の中の男)에는 태양족 스타인 아사오카 루리코(浅丘ルリ子)가 등장할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크레이지 작전 시리즈 역시 ‘노가와 유미코’(野川由美子)등 당대의 스타들이 마돈나로 등장했다. 각 시리즈 별로 ‘OST’와 주제가 역시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이들 영화들은 지금까지도 ‘쇼와의 폭소희극’(昭和の爆笑喜劇)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다만 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도호’가 원성을 사고 있는데 그 이유는 4K로 복원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부가판권료를 터무니 없이 높게 책정하여 VOD 서비스 및 DVD가 그 흔한 ‘HD 리마스터링’으로도 출시되지 못하고 있으며 블루레이 등 고화질로 출시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VD는 꾸준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 1963)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도호가 희극과 시리즈물 그리고 괴수 영화들(이 영화들은 차후에 상세히 다룰 예정)로 1960년대를 끌고 간 것 만은 결코 아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칼싸움’ 장면에 있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테크닉을 선사했다. 전례 없는 과장된 수법은 이후 전 세계 무술영화들에 큰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할리우드의 웨스턴은 물론 마카로니 웨스턴과 홍콩, 대만의 무협 영화들이 즉시 호응했다.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은 ‘요짐보’(用心棒, 1961)이다. 번역하면 ‘호위 무사’(護衛武士), 영어로는 ‘BODY GUARD’가 되겠다.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郎)가 등장하며 1961년 제25회 베니스국제영화제(볼피컵 남우주연상)에서 수상을 할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 폐허 같은 마을을 찾은 영웅이 갈등을 해결한 뒤 홀연히 떠난다는 이야기는 ‘셰인’(Shane, 1953)과 ‘하이눈’(High Noon, 1952) 같은 서부극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영화 ‘붉은 수염’(赤ひげ, 1965)

스릴러 걸작 영화인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 1963)의 성공에 이어 ‘붉은 수염’(赤ひげ, 1965)까지 이어진 흥행은 그의 작품 주제가 오롯이 ‘인간’에게 맞춰져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붉은 수염의 경우 칼싸움 장면이 없는 상영시간 185분의 시대극이지만 성공을 했다. 신뢰와 사랑이 무너진 세상을 무대로 나가사키에서 서양 의학을 배운 신참 의사(가야마 유조, 加山雄三)와 에도 시대 막부가 설치한 하층민 의료기관 코이시가와 양생소(小石川養生所)의 ‘붉은 수염’이라고 불리는 소장(미후네 도시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장은 빈민들에게는 뛰어난 의술을 베풀면서 동시에 부유한 사람들의 약점을 잡아 돈을 벌어들이는 재주도 가지고 있으며 힘도 센 장사다. 신참 의사는 끊임없이 더 나은 의료원에서 의사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야심가이지만 차츰 환자를 가리지 않는 소장의 모습을 통해 변모해 나간다. 이 영화에서 미후네 도시로는 의사를 ‘인체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치료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닌 휴머니스트로 바꿔 놓는다.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후네 도시로는 결별을 하게 된다.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는 ‘20세기 FOX’의 제의로 할리우드에 건너가 진주만 공습을 다룬 ‘도라! 도라! 도라!’(Tora! Tora! Tora!)를 연출하려 했으나 적응 실패로 일본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도쿄 주변의 고물상들의 삶을 다룬 최초의 칼러 영화 ‘도데스카덴’(どですかでん, Clickety-Clack, 1970)을 만들지만 처참한 흥행 참패로 인해 자살미수까지 간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물의 의상은 물론 흙의 색깔까지 자연의 색채를 거부하고 인공적인 색채로 처리해 논란이 일었다.

도호 감독 중 하나인 오카모토 기하치.

▲오카모토 기하치(岡本喜八)
여기서 그 시절 도호의 감독을 한 명 더 언급하려고 한다. 일본영화 역사가인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 선생이 언급할 만큼 중요한 인물로 ‘오카모토 기하치’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영원한 도호맨(TOHO-MAN)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희극적으로 묘사하는 넌센스 희극의 대가이면서 블랙코미디 등 풍자극에 일가견이 있었다. 

존 포드(John Ford)의 열렬한 팬으로 ‘역마차’(Stagecoach, 1939)를 보고 영화감독이 될 것을 결심했으며 메이지(明治)대학교 재학 중 도호에 입사했으나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동기들 중 홀로 살아남아 생환(生還)했다. 이를 계기로 ‘독립 불량배 단’(独立愚連隊, 1959)같은 서부극을 접목한 풍자적 전쟁영화를 내놓는다. 

영화 ‘일본의 가장 긴 하루’(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 1967)

물론 그는 장르적으로 전쟁영화를 잘 만들었지만 ‘찬바라’(チャンバラ, 사무라이 혹은 닌자)영화의 대가로 국제적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사무라이 시대극 중에서도 유혈 액션 씬(scene)에 초점을 두고 ‘전국 야로’(戦国野郎, 1963), ‘사무라이’(侍, 1965), ‘대보살 고개’(大菩薩峠, 1966), ‘(칼로)베다’(斬る, 1968), ‘붉은 머리’(赤毛, 1969), ‘자토이치와 요짐보’(座頭市と用心棒, 1970)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학도병 체험으로 인해 반전(反戰)의식이 강했다. 때문에 훗날 리메이크(일본 패망 하루 전, 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 2015)되기도 했던 대작 ‘일본의 가장 긴 하루’(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 1967)를 세상에 내놓는다.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던 날 천왕의 항복결정을 저지하려는 군부의 움직임(실화)을 담은 이 대형 영화를 통해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를 묻고 또 되묻는다. 

영화 ‘육탄’(肉弾, 1968)

그러나 조금은 아쉬웠는지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 임무를 준비하던 젊은 학도병들의 이야기를 다룬 희극 ‘육탄’(肉弾, 1968)을 사비(私費)로 제작하여 키네마 순보(キネマ旬報) 베스트 텐에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직접 쓸 줄 아는 감독 중 한 사람이었으며 2007년 베를린영화제 특별전에 이어 2008년 상파울로국제영화제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릴 만큼 솜씨 좋은 액션 씬을 구사하는 테크니션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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