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㊾ / 핑크 필름의 등장
일본영화 경제학㊾ / 핑크 필름의 등장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1.02 1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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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가 처음 등장하는 영화 ‘장미의 장례 행렬’(1969년)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60년대에 등장한 핑크 필름(Pink film, ピンク映画)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사실 1960년대와 70년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쇠락의 길을 걷던 일본영화계에서 가장 막강한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며 영화인들의 활로를 찾게 한 것은 당연히 ‘핑크 필름’ 이었다. 로망 포르노(ロマンポルノ)가 주로 닛카쓰(日活)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핑크 필름은 에로 영화 산업 전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1950년대 황금기 감독들을 제외하고 이후 거장들은 B급 영화 그중에서도 에로영화를 통해 데뷔한 경우들이 많았다. 미국 B급 영화의 거장인 로저 코먼(Roger Corman)은 일찍이 저예산으로 만들고 충분히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어쩌면 독립영화를 지향하고 현장간섭을 체질적으로 거부하던 그만의 기질이 B급 영화 거장의 길로 접어들게 했을 지도 모른다. 

일본 역시 저예산과 단기간 제작 및 프로그램 영화제도의 유지를 위해서 핑크 필름이 권장되었다. 물론 군국주의 시대를 거친 일본에서 봉건제도와 미학적 전통이 신성화 된 나머지 서구영화의 키스 장면 마저도 ‘서구식 퇴폐의 상징으로 비난 받아’ 삭제 되었던 시대를 지나 솔직한 성적 표현이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은 탓도 있었다.

닛카쓰 로망포르노 전용상영관

▲우키요에와 남색 문화 그리고 온나가타
사실, 일본 이야기를 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면 바로 ‘음란문화’일 것이다. 사람들의 일부 이름부터가 음란(자신들의 성행위가 이뤄졌던 장소들에서 유래)하며 섬나라 특성상 유난히 호전적 기질 때문에 전쟁이 많아 과부들이 많았고 기모노 자체를 펼치면 즉석 침실이 된다는 설정부터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일본의 춘화인 ‘우키요에’(浮世繪)와 조선의 김홍도의 춘화를 비교하면 더 확연하다. 조선의 그것이 성행위에 대하여 단지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데 반해 일본은 노골적인 여성의 표정이나 남녀의 성기까지 묘사(인도의 춘화도 동일)하기 때문에 더 음란하다고 생각된다. 심지어 ‘수간’(獸姦)이 소재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영화 ‘아가씨’에 등장했던 가즈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의 우키요에 목판화인 ‘어부의 아내의 꿈’이 그것이다. 

사실상 한국의 춘화는 엄격한 유교 문화의 조선에서 유일한 ‘성교육 교재’였으니 항상 관찰자 시점에 체위묘사가 두드러 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 춘화의 경우에는 아예 주변의 꽃과 나무 등 정경묘사를 통해 은밀한 분위기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며 작자 미상의 청대(淸代) 춘화들을 모은 ‘춘궁화첩’(春宮畵帖)의 경우 남자가 여자의 발을 만지는 모습 등 정사 장면을 은유적으로만 표현하였기에 더욱 우키요에가 ‘음란하다’고 느껴진다. 

춘정채색 - 기타가와 후지마로

물론 ‘음란한 그림들’은 일본이나 조선에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영국의 경우 빅토리아 시대의 신고전주의 회화의 전통은 예술적 누드가 그 특질이었지만 19세기 후반에 도덕적 지탄을 받았던 ‘음란한 그림들(혹은 영화)’은 손잡이를 돌리며 관람하는 무토스코프(Mutoscope)로 발전하여 박람회장과 오락실, 유원지 등에서 볼거리를 제공했다. 오죽하면 무토스코프를 ‘집사가 본 것’(What the Butler Saw)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경우 판화형식이었고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판타지를 추가로 제공했기 때문에 서양에서 더욱 흥미를 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영화 역사에서도 현재는 대부분 제목만 존재하는 실정이지만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The Temptaion of St. Anthony), ‘신부 벗기기’(A Bride Unrobing), ‘프랑스 여인의 목욕’(A French Lady’s Bath) 같은 흥행업자들이 여성의 나체가 나올 것으로 관객들에게 기대감을 유발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색문화인 와카슈도

이 같은 문화는 항상 ‘도덕적 지탄’을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이미 혼욕(混浴)을 하고 비교적 개방적인 성문화가 조성되어 있었기에 도덕적 지탄까지는 아니었다. 또한 대중문화였던 가부키(歌舞伎)의 경우에도 1653년 정식으로 막부의 허가를 받았지만 여성과 소년은 출연할 수 없었고 여성배역은 ‘온나가타’(女形), 즉 여장 남성으로 국한했던 것이 그 특징이었기 때문에 훗날 실제 여성들이 등장하는 에로영화들이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당연했다. 

또 한가지, 에도 시대의 경향 중 하나가 ‘와카슈도’(若衆道, わかしゅどう)로서 남색(男色)을 즐기는 것이었다. 종종 미소년을 두고 사무라이들이 칼부림을 하기도 했으니 오늘날 일본의 핑크 무비가 왜 다양한 장르와 스토리로 존재하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음지에서 양지로
일본에서 고전적 의미의 포르노 영화는 전쟁 이전에도 있었다. 온나가타들이 사라지고 실제 여배우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스크린 상에서 나마 실제 ‘여체’(女體)를 볼 수 있음을 의미했다. 남녀의 성행위를 비밀리에 촬영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전후 1950-60년대 고치현(高知縣)에서는 ‘구로사와’(黑澤)그룹이라는 집단이 출현하여 남녀의 성행위를 8밀리, 16밀리로 촬영하여 비밀리에 제작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연합군 점령기를 거치면서 전쟁 전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거나 성적 방종을 다루는 식의 금지 되었던 장면들은 더 이상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또한 스포츠인 야구처럼 남녀간의 애정행위를 영화 속에서 공공연하게 보여 주는 것 역시 권장되었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보수적이면서 경직되어 있었고 키스 장면도 우산으로 수줍게 가리는 등의 촬영이 많았다. 

영화에 키스 장면이 삽입 되고 나서도 일본의 언론들은 ‘키스 영화’들로 분류된 이 영화들의 키스 장면들이 단순한 상업적이었는가 아니면 예술적이었는가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위생적이었는지 성적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한 토론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키스 장면이 빈번해지자 일본인들도 대중적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고 따라서 옷을 벗고 나체를 드러내는 장면을 선호하게 되는 식으로 변해갔다.

일본영화에 대한 검열주체가 미국인에서 영화윤리규정관리위원회(이하 영륜)으로 옮겨간 이후에도 극영화에서의 노출장면이나 섹스장면은 여전히 제약을 받았다. 다만 다큐멘터리는 예외를 두었다. 따라서 ‘세이쿄쿠’(성교육, 性敎育)영화, ‘오산’(お産, 출산, 出産)영화, 정조를 강조하는 ‘준게츠’(純潔, 순결)영화, ‘바스콘’(パソコン, 산아제한)영화 등이 그것이다. 

이중 바스콘의 경우는 현대에 와서는 개념이 바뀌어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 파소콘)의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때문에 1950년대에는 부부 간에 콘돔을 사용하는 도발적 장면이 들어간 ‘미의 본성’(美の本性), ‘낙태할까? 피임할까?’(中絶するか? 避妊するか?)같은 바스콘 영화들이 일반 상영관에서 상영되는가 하면 1952년에는 시부야(渋谷)의 한 극장에서 ‘성교육영화제’가 열리기도 했다. 

연합군 점령기에는 성적 표현을 다룬 싸구려 출판물들이 범람했다. 술독 바닥의 침전물로 만든 불법소주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카스토리 잡지’(カストリー雜志), ‘엽기’(獵奇), ‘기담클럽’(奇談クラブ)같은 선정적 외설물 잡지들이 인기였다. 도호(東宝)극장은 1947년 11월에 최초의 대중 공개용 스트립쇼(ストリップショー)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킴벌리 다이아먼드’(Kimberly Diamond)같은 미국 공연단의 스트립쇼 영화들도 공개가 허용되었다. 

카스토리 잡지들

사회자의 순서대로 전면 돌출 무대에서 한 명씩 순서대로 젖가슴을 드러내는 단순한 스토리인데 훗날 이를 모방하여 ‘쇼 영화’(ショー映画)로 재탄생하게 된다. 스트립쇼 공연을 담은 한 릴짜리 영화들은 ‘벌거벗은 천사’(裸の天使), 스트립 도쿄(ストリップ東京), 벌거벗긴 공주(裸の王女)같은 제목들로 상영되었다. 

당시 후지영화(富士映画), 신도호(新東宝)가 가장 많이 만드는 편이었고 나중에는 쇼치쿠(松竹), 도에이(東映)같은 메이저 회사들도 만들어 자신들의 극장 체인에서 상영했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도쿄의 홍등(東京の紅燈, 1963), 달콤한 누드(Sherbet Nude, 1963) 등이 손꼽히는데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쇼 영화’들은 이러한 에로성 짙은 영화가 음지에서 양지로 서서히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수컷영화(Stag Film) 혹은 Y영화(揋映画)
세계 최초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영화로 알려진 작품은 1907년작 ‘관음증 환자’(Le Voyeur)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장르의 역사는 굉장히 길다고 하겠다. 일본도 1920년도부터 이러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수컷 영화’로도 불리웠는데 8밀리나 16밀리 카메라로 촬영됐고 사운드가 없는 한 릴 짜리 짧은 영화로 실제 성행위를 상세하게 담는게 전부였다. 배우나 스텝들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았고 예술적 관점도 없는 거의 날것에 가까웠던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판매되는 우라-비데오들

일본에서는 이러한 수컷영화를 음란 영화라는 뜻으로 ‘와이에이가’(揋映画) 혹은 ‘Y영화’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서구영화의 초기 포르노그래피를 칭했던 말인 ‘블루 필름’(Blue Film)이라는 명칭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들의 배급은 야쿠자들의 몫이었다. 온천 같은 리조트 지역이나 도심 지역에서 주로 젊은 남자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유인한 후 작은 아파트 등에서 상영했다.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일본에서는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15분 내외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 섹스나 수간(獸姦), 구강성교 등을 보여줬다. 이 전통은 나중에 우라-비데오(ウラ-ビデオ)로 이어지고 지금은 AV(Adult Video)로 계승되어 하드코어적인 내용을 담아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때문에 구글번역기의 언어영역중 ‘일본어’가 가장 우수한 번역을 해내는 위엄을 보이기도 한다. 

참고로 서양 포르노 영화의 대부라는 피아 해릿츠(Pia Harritz)는 핑크 필름의 공식을 다음과 같은 4가지로 분류했다. ▲영화는 섹스 장면의 요구되는 최소 할당량이 있어야 함 ▲영화 길이는 약 1시간이어야 함 ▲16mm 또는 35mm 필름으로 일주일 이내에 촬영해야 함 ▲이 영화는 매우 제한된 예산으로 제작되어야 함이다.

마츠모토 토시오 감독

▲장미의 장례 행렬(薔薇の葬列)
저예산으로 급속히 만들어졌으나 노골적이고 외설적이며 풍부한 상상력을 가졌던 이 영화들은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독립영화계에서는 ‘핑크영화’가 새로운 사조로 받아들여져 인재들이 모여 들었으며 ‘미학적’(美學的),‘선정적’(煽情的)이라는 단어 대신에 ‘감각적’(感覺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당시로서는 수위가 높은 ‘하드코어’(Hard-Core)를 시도하여 쾌락과 볼거리들이 주는 극한의 흥분을 유도한 것도 특징이다. 핑크 무비란게 원래 남성 관객들의 성적 욕망(판타지)에 영합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였기 때문이다. 흥행이나 작품성 보다는 여성의 몸이라는 볼거리가 제공하는 극한의 흥분을 통해 오르가즘의 희열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영화 ‘장미의 장례 행렬’(1969년)

물론 검열의 제약이 있음에도 성적 희열이 핑크무비의 최종 목표였음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극영화의 데뷔를 주로 핑크무비를 통해 한 것도 그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게이’(Gay)물, 즉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영화는 1969년에야 만들어졌다. ‘장미의 장례 행렬’이 바로 그것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의 마츠모토 토시오(松本敏夫)가 만든 이 충격적인 영화는 게이컬처와 혼미하는 시대를 반영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게이들과 한 무리의 히피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두 집단은 ‘가면’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게이는 여자, 히피는 체 게바라(Che Guevara)라 처럼 되고(가면)싶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변주했다고 하는데 실제 게이 성향의 주연배우가 등장하며 게이들의 성생활까지 묘사하는 파격을 보여줬다. 

스텐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스텐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A Clockwork Orange, 1971)에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프닝부터 게이 두 사람의 정사 씬이 등장하며 ‘나는 상처이자 칼날이며 사형수이자 사형집행인’이라는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의 ‘악의 꽃’ 일부가 자막으로 뜨는 파격을 보여줬다. 게다가 1960년대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스피디 한 화면과 전개로 게이, 자살, 마약, 실패한 좌익 운동권 학생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제들을 등장시켜 당시 혼란스러웠던 일본 사회를 풍자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 장르가 상당한 기간 동안 변주되며 침체된 일본영화 재건의 한축이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핑크 무비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문화와 사회 그리고 급진적인 정치학을 가미하면서 ‘대안’으로 자리 잡아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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