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㊿ / 핑크 필름의 거장들
일본영화 경제학㊿ / 핑크 필름의 거장들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2.04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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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마쓰 고지 감독

<미국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구로사와 기요시(黒沢清), 구마시로 다쓰미(神代辰巳), 와카마쓰 고지(若松孝二), 제제 다카히사(瀨瀨敬久), 수오 마사유키(周防正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거장’(巨匠)이면서 ‘로망포르노 감독’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중 와카마쓰 고지는 ‘에로영화의 제왕’으로 불리울 만큼 탁월한 족적을 남긴 감독이다. 

구마시로 다쓰미(왼쪽), 나카무라 겐지 감독

1970년대 이즈미 세이지(堯美木俣), 나카무라 겐지(中村幻児), 이즈쓰 가즈유키(井筒和幸), 다카하시 반메이(高橋伴明) 등 새로운 차세대 감독들이 등장하기까지 이들 감독들은 선구자적인 필모그래피들을 남기며 핑크필름을 예술영화의 한 축으로 이끌었다. 특히 이들의 영화가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수오 마사유키(왼쪽), 제제 다카히사 감독

황금기 감독 중 하나였던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영화가 너무 일본적(日本的)이기 때문에 보다 서구적이면서도 오리엔털 (성적)판타지를 제공하는 소재가 새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때로는 표현의 자유가 비교적 리버럴 하다고 평가 받는 프랑스에서 조차 검열 당국과 문제를 일으킬 만큼 충격적 영화들이었다. 

이중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와카마쓰 고지의 아방가르드 고전 ‘태아가 밀렵될 때’(胎児が密猟するとき, 1966)가 바로 그것으로, 단돈 210만 엔의 예산으로 자신의 집에서 8일 동안 7명의 스텝만 데리고 가학성과 피가 난무하는 ‘밀실 영화’로 만들어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 넣는다. 

영화 ‘태아가 밀렵될 때’(1966)

▲와카마쓰 고지 그리고 전공투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사이 와카마쓰 고지의 영화들은 유럽대륙에서 개최된 다수의 영화제 소개되었고 ‘에로영화의 제왕’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그의 영화 ‘벽속의 비사’(壁の中の秘事, 1965)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정식 일본 대표 작품을 제치고 상영되었을 때 일본의 언론들은 ‘국가적 치욕’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사실 당시만 해도 B급 영화들을 일본에서 ‘프로그램 픽처스’(プログラムピクチャーズ)라고 불렸는데 각각 짧은 영화 두 편을 함께 묶어 개봉하는 방식이었다. 메이저 영화사들이 67~75분 사이의 영화 두 편을 제작한 후 자체 배급상영관을 채워 나간 것이다. 촬영 회차 수 10회 안팎에 런닝타임이 길어야 75분 정도이면서 관객들의 호응도 좋으니 ‘핑크무비’야 말로 가장 프로그램 픽처스에 적합한 장르였다. 

와카마쓰 고지는 이러한 핑크무비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폭력과 성(性), 반권력, 모태회귀본능 등 반항아적 기질을 최대한 발휘한 영화들을 만들어 낸 감독이다. 이 기질이 결국 서구 비평가들에게 논쟁을 폭발시켰다.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가혹한 학대의 장면들 때문이었다. 따라서 와카마쓰 고지의 작품들은 비평가 사이에서도 엇갈린 견해가 나왔다. 

일본 영화 비평의 선구자이면서 평생을 일본영화계에 헌신한 도널드 리치(Donald Richie)마저도 그의 영화를 ‘낯 뜨거운 소프트 코어 사이코드라마’라고 칭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직설적이고 거칠며 급진적 메시지를 내포한 그의 영화는 본인의 표현대로 “단순한 핑크영화가 아닌 언더그라운드영화에 섹시(sexy)한 느낌을 가미한” 영화들이었다. 사실 그는 영화 감독이 되기 이전에 도쿄에서 야쿠자 조직에 가담하였다가 범법 행위를 하는 바람에 하치오지형무소(八王子医療刑務所)에서 6개월 복역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권력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항을 간직하고 나왔으며 이를 표출할 방법으로 소설이나 영화를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 도쿄에서 영화를 촬영하려면 지역 경찰보다는 야쿠자 조직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 관행이 존재했다. 당연히 그는 촬영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뒤를 봐줬고 니혼TV(日本テレビ)의 스텝이 되는 행운까지 누린다. 비록 중간에 프로듀서를 공격하여 잠시 일을 쉬기도 하였지만 이 경력을 토대로 새로운 프로젝트의 대타 감독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고 만다. 

영화 '더렵혀진 백의'(1967) 신문기사와 '달콤한 덫'(1963)

영화 속에 여자의 벗은 뒷모습 몇 장면만 들어간다면 뭘 해도 좋다는 무제한의 자유까지 주어졌는데 당시 영화 검열이 딱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번째 극장용 영화를 찍게 되는데 바로 ‘달콤한 덫’(甘い罠, 1963)이다. 그는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와카마쓰 프로덕션(若松プロダクション)을 설립하고 아다치 마사오(足立正生)와 야마토야 아츠시(大和屋竺) 같은 인재들을 모아 정치색 짙은 핑크 영화들을 만들었다. 

영화 ‘처녀 게바게바’(1969)

사실 그는 단 한번도 메이저 스튜디오에 소속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를 만든 것이었지만 핑크영화의 격을 격상시킨 인물 임에는 틀림 없다. 대표작 ‘더럽혀진 백의’(犯された白衣, 1967)는 영화 감독 ‘노엘 버치’(Noël Burch)에 의해 대단한 영화적 깊이가 있다고 프랑스인들에게 소개되었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해변에 서 있는 미소년을 발견한 간호사가 자신의 기숙사에 그를 데리고 간다. 

그런데 미소년은 돌연 가지고 있던 권총을 발사해, 차례로 여성 간호사들을 살해하며 자신만의 유희를 즐긴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밀실에서 벌어지는 주연 배우 ‘가라 주로’(唐十郞)의 즉흥적인 연기를 세심히 살리기 위해 롱 테이크를 주로 사용했는데 간호사의 살갗을 벗겨내는 장면 등 매우 가학적 작품이었다. 이후 그가 즉흥적으로 만든 영화인 ‘처녀 게바게바’(處女ゲバゲバ, 1969)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영화 ‘감각의 제국'(1976)

한 젊은이가 가학적인 야쿠자 보스의 정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들을 처단하려는 목적으로 야쿠자들은 황야에 그들을 내친다. 보스의 기묘한 처단 의식에 따라 여인은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고, 남자는 음란하고 야성적인 여인들에게 내던져진다. 보스의 명령으로 쫓아온 남녀 7명의 젊은이들은 보스에게 지시받은 대로 둘에게 온갖 기묘한 린치를 가한다. 그 유명한 오시마 나기사(大島渚)가 영화 제목을 붙였다. 이때의 인연이 이어져 훗날 일본, 프랑스 합작영화인 ‘감각의 제국’(愛のコリーダ, L'Empire des Sens. 1976)을 함께 제작하게 된다. 

그는 핑크영화들을 무수히 연출하고 제작했지만 좌파적 정치성향을 강하게 드러내어 당시 전공투(全共闘. ぜんきょうとう.)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애초부터 영화 제목인 ‘게바게바’(ゲバゲバ)부터가 독일어에서 폭력을 의미하는 ‘Gewalt’에서 따온 말로 급진적 학생들에 의한 폭력적인 보복 전술을 뜻했다. 따라서 급진적인 검열에 저항하며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와카마쓰 고지의 저항정신이 전공투의 좌절된 혁명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종종 와카마쓰 프로덕션의 작품들이 전학련과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일본학생영화제에서 라이브 음악과 즉석 공연을 곁들여 상영 되었지만 경찰기동대rk 이 상영회를 ‘정치적 집회’로 판단하고 즉각 해산시켜 버리기도 한다. 아다치 마사오의 영화 쇄음(鎖陰, 1963)이 대표적인 예이다. 훗날 와카마쓰 고지와 아다치 마사오는 ‘적군 – PFLP·세계전쟁선언’(The Red Army/PFLP: Declaration Of World War, 1971)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와카마쓰 고지는 절정 부분에 이를 때 흑백에서 칼러로 전환하여 극적인 표현을 하는 영화적 기법을 썼으며 이후 에로덕션 영화의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 잡아 갔다.

핑크필름의 원조 영화 '백일몽'(1964)

▲백일몽(白日夢, Day-dream, 1964)
사실 핑크필름을 논할 때 최초의 영화이자 전설적 영화로는 다케치 데쓰지(武智鉄二) 감독의‘백일몽’을 들 수 있다. 이 영화가 초기 핑크필름들의 네거필름들이 유실되고 도난당하며 분실되는 수난 속에서도 명성과 보존이라는 기적이 있었던 것은 해외 배급의 공이 컸던게 사실이다. 

초창기 핑크필름들은 독립영화를 지향하면서 ‘섹스’를 청춘문화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차용한 부분이 있었다. 정치적인 상황도 있었지만 아트시어터길드(ATG)에서 제작 배급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던 탓도 있다. 메이저 영화사 중 한 곳인 도호(東宝)에 의해 결성되고 자금지원도 받았을뿐더러 애시당초 일본영화윤리규정관리위원회(이하 영륜)에서 에로덕션 쪽에서 나온 영화들 보다는 관대한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에 예술영화, 성적 착취 영화, 실험 영화 등을 대표하는 독립영화 진영은 당연히 ATG를 통한 안전한 작품을 만들기를 원했다. 또한 흥행에 대한 우려와 검열에 의한 삭제를 염려하여 투자자들에게 내민 시나리오와 정작 촬영에 사용한 시나리오가 다른 경우도 많았다. 

영화 ‘흑설’(1965)

그러나 한 명의 이단아(異端兒)가 등장하여 일본 관객들에게 공격적이고 선정적인 영화를 ATG가 아닌 시스템에서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다케치 데쓰지다. 그는 자신의 영화 ‘흑설’(黑雪, 1965)로 전후 일본영화계에서 최초로 공공외설죄로 기소된 영화인이다. 일찍이 평론가 토마스 웨이서(Thomas Weisser)는 “다케치 데쓰지가 일본 포르노그래피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그의 영화 백일몽이 첫 번째 핑크필름으로 알려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본 영화 역사 자료들에는 그의 영화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일몽의 경우 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사실 그는 무대 연출가 출신이었다. 특히 전통 가부키 극을 현대화하여 명성을 얻은 바 있었다. 영화계에서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영화 이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TV 시리즈인 ‘다케치 데쓰지 아워’를 통해 13부에 걸쳐 가부키 극단의 공연을 통해 다양한 고전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영화를 스스로 제작하거나 1960년대에는 ‘다이산프로’(第三プロ)에서만 제작했지만 배급 만큼은 자신의 영화가 비록 외설적 장면들이 많았다고 해도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맡아 에로덕션 계열의 극장이 아닌 곳에 상영하도록 했다. 이러한 원칙 때문인지 그의 영화들은 닛카쓰를 비롯 메이저 회사들을 통해 세계 시장에 팔려나갔다. 

따라서 다케치 데쓰지의 영화들은 해외에서 훨씬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보통 해외에서 일본의 핑크필름들은 허름한 성인영화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반해 대표적 잡지인 버라이어티(Variety) 1964년 9월 9일호에 ‘백일몽’이 다뤄지기도 했다. 백일몽은 다케치 데쓰지의 걸작으로 감독 자신에 의해 1981년에 하드코어 버전으로, 1987년에는 또 다른 속편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세 편의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는 강렬한 극적 장면의 연속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풍만한 나이트클럽 여가수 지에코(미치 가나코, 路加奈子)가 치과에 가서 경험한 성적 판타지를 소재로 하고 있다. 사미센으로 연주한 음악과 으스스한 소음들이 영화 내내 깔리며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장면 전환이 인상적이다. 그곳에서 지에코는 아산화질소에 취해 에로틱한 악몽 속으로 빠져든다. 발가벗겨진 체 치과의사와 간호사(마쓰이 야스코, 松井康子)에게 가학적 추행을 당하는 환각을 경험한다. 치과 대기실에 있던 젊은 남자가 판타지 속으로 들어와 그녀와 탈출하기까지 치과의사의 악랄함은 계속된다. 

마쓰이 야스코

이 영화에서는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바로 여주인공 ‘미치 가나코’이다. 그녀는 1965년 한일합작영화인 총독의 딸(總督의 딸, 1965)에 신영균과 주연으로 나온다. 한국의 전설적 영화인인 전창근 감독의 영향으로 쇼치쿠(松竹)와 합작하여 1965년에 촬영된 이 영화는 일본인 배우의 출연이 문제 되어 결국 개봉하지 못했다. 이때 등장하는 여배우의 이름이 바로 미치 가나코인 것이다. 한편 간호사로 나온 ‘마쓰이 야스코’는 이 영화를 계기로 핑크필름에 다수 출연하여 한때 ‘핑크영화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영화는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원작을 토대로 하고 있다. 

미치 가나코

그러나 원작자는 긍정적 화답을 하지 않았다. 개봉을 즈음하여 ‘핑크필름’의 원조답게 각개각층의 불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학부모 조직(사친회)들은 아이들이 몰래 극장에 갈까 봐 염려했고 동물보호단체는 등장하는 고양이의 장면을 문제 삼았으며 치과의사협회까지 반발을 했다. 영륜은 급기야 45분 분량의 영상을 잘라냈다. 그렇지만 이후 다케치 데쓰지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미 공군기지를 나체로 뛰어가는 여배우가 나오는 ‘흑설’은 성욕을 뛰어 넘는 체제전복적인 내용을 담아 재판을 받게 되었지만 오히려 지식인층이나 예술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사상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와 오시마 나기사가 ‘예술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재판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1969년 재판은 종결되었고 마침내 다케치 데쓰지는 외설과 관련한 모든 혐의를 벗게 되었다. 

그는 재판 동안에도 ‘재판 받는 에로스’(裁かれるエロス, 徳間書店, 1967), ‘나의 예술, 삶, 여자’(私の芸術・人生・女性, ノーベル書房, 1968)의 2권의 책을 냈으며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의 고전을 에로틱하게 각색한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1966), ‘전후잔혹이야기’(戦後残酷物語, 1968), ‘우키요에 잔혹이야기’(浮世絵残酷物語, 1968) 등 3편의 영화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재판이 오래 지속되는 바람에 명성에 금이 갔고 피로감이 더해 갔으며 신문들 역시 그의 후속 영화들에 대한 광고를 거부했다. 따라서 그는 점점 해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영화계로부터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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