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51)/ 핑크필름의 창세기(創世記)
일본영화 경제학(51)/ 핑크필름의 창세기(創世記)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3.09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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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역사에서 ‘핑크필름 여배우 1호’로 알려진 카토리 타마키(香取環).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일본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핑크 필름(Pink film, ピンク映画)에 대하여 일본영화 역사가들은 1962년부터 1971년을 ‘첫번째 물결’(First wave - The ‘Age of Competition’)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초창기에는 독립영화업자들에게 주목받았던 장르였기 때문이다. 약 300만엔의 저예산, 평균 3일의 촬영 일수라는 열악한 조건이지만 정사 장면의 횟수, 여배우의 노출 횟수만 지키면 마음껏 스크린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판타지를 만족한다는 점에서 젊은 영화인들은 자유로운 여건하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다는 점에서 핑크 필름은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황금기 감독들이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에 집중한 까닭에 세계영화제에서 지속적으로 상을 받을 수 있었으나 신인 감독들의 데뷔는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핑크필름의 등장은 그들의 데뷔를 가능케 해 주었다. 또한 수입업자들이 발 빠르게 외국 여자들의 누드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예술영화’라 하여 수입하여 흥행에 성공하게 되었기 때문에 핑크필름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루이 말의 영화 '연인들'(1958)

물론 감독들의 면면을 보면 오늘날 세계영화사에서 거장이라고 불리울 만한 인물들이다. 단지 영화의 예술성과 관계없이 ‘누드’가 등장하는 영화여야만 했다. 잉그마르 베리히만(Ingmar Bergman)의 ‘모니카와의 여름’(Summer with Monika, 1953), 루이 말(Louis Malle)의 '연인들'(Amants, 1958), 러스 마이어(Russ Meyer)의 ‘부도덕한 티즈씨’(Immoral Mr. Teas, 1959)가 바로 그것들이며 종전 일본영화들에서는 아주 보기 힘든 누드 장면들이 나왔지만 일본에서 문제없이 심의를 통과하고 상영되었다. 

러스 마이어의 영화 ‘부도덕한 티즈씨’(1959)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루이 말 감독의 ‘연인들’이다. ‘연인들’은 선정성 논란에 휩싸이면서 미국의 몇 개 주에서 상영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며, 상영한 극장에는 벌금이 부과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후 미국 대법원은 이 작품이 외설적이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당시 일본의 영화심의 기준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없이 상영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일본 독립영화계에서 핑크 필름이 태동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고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도 타당한 이야기였다. 

사실 황금기 일본의 극장들은 양적 성장을 가져왔다. 그런데 문제는 1960년대를 지나면서 메이저 스튜디오의 제작 편수가 계속 감소하면서 극장들은 도쿄에서 상영하고 있는 영화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인 한, 두달 동안의 공백기를 독립제작사들이 만든 영화들로 채워야 했다. 이 공백을 ‘핑크필름’들로 채웠는데 흥행면에서 최고였다. 따라서 당시 독립 프로덕션들이 1년에 6편 정도만 핑크필름을 제작해도 한 해 동안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 넉넉하게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렇다. 오늘 이야기는 핑크필름의 ‘첫번째 물결’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선구자에 관한 것이다. 

고바야시 사토루 감독

▲고바야시 사토루(小林悟)
그는 1962년 ‘육체의 시장’(肉体市場, Flesh Market)을 발표한 후 일본 영화 역사가들에 의해 에로덕션의 창세기(創世記)에서 메가폰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상 최대 450편, 핑크필름의 한길만을 걸었다. 대담한 성 묘사를 수반하는 작품을 잇달아 제작해 ‘핑크필름’이라는 장르를 확립하는 토대를 닦았다. 단일 감독의 제작 개수로서 이를 넘는 기록은 해외에서도 확인되지 않았기에 세계 기록임을 확인하고 기네스 등록을 실현하고자 유족들이 뛰고 있을 정도다. 

문제는 당시 영화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고 핑크필름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공식 기록이 일본영화의 역사 자료들이나 데이터베이스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기네스 등록이 더뎌질 뿐 아마도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육체의 시장’은 일본 영화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당시(1952년) 평균 제작비 4000-5000만엔 수준인 현실에서 단돈 600만엔으로 제작을 했다. 

핑크필름의 효시라는 영화 '육체의 시장'(1962)

일본언론들이 앞다퉈 기사로 다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홍보가 되었다. 대부분 기사는 ‘초저예산 성적착취 영화’, ‘에로덕션’(エロダクション)이라는 신조어로 채워졌는데 덕분에 ‘노이즈 마케팅’이 저절로 되었다. 당연히 이 영화는 화제를 몰고 왔고 개봉 이틀 만에 경시청에 의해 상영이 중단되는가 하면 전후 최초로 모든 상영용 프린트와 원본 네거티브가 압수되었다. 다행히 영민한 프로듀서들이 러시 필름과 남겨진 영상을 가지고 다소 파격적인 장면 몇 개를 뺀 새로운 버전을 즉시 만들어 원래의 영화를 대신해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즉각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일본영화센터의 보관소에 21분 분량이 보관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열일곱살의 소녀가 도쿄 롯폰기 지역에서 의문스럽게 자살한 언니의 죽음을 파헤치다가 자신도 한 무리의 범죄자들에 의해 가학적 위기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21분이 남아 있는 고바야시 사토루의 영화는 운이 좋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핑크필름들은 종영 후 즉각 폐기되거나 일본 전역을 돌면서 과도하게 반복상영을 한 까닭에 프린트들의 수명이 다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핑크필름의 세계화에 공헌
그는 매우 혁명적인 인물이었다.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출신으로 재학 중 무도미학(舞踏美学)을 전공하였다. 영화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영화제작 현장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로케이션 섭외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조감독이 될 수 있었다. 대학졸업 후 오미프로덕션(プロダクションに)에 입사할 수 있었고 가수이자 음악가인 오미 토시로(近江俊郎)에게 사사를 받고 다카시마 타다오(高島忠夫) 주연의 ‘보짱 시리즈’(坊ちゃんシリーズ)의 조감독으로 활약한다. 

고바야시 사토루는 가수이자 음악가인 오미 토시로(近江俊郎)에게 사사를 받았다. 

그는 종종 당대의 미스테리한 영화인이었던 모토키 소지로(本木荘二郎)와 함께 거론되기도 한다. 사실 일본영화사에서 ‘에로덕션 장르’(핑크필름과 로망포르노 등)를 말할때 ‘육체의 시장’을 비롯한 4편의 영화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지는데 그중 한 명이 모토키 소지로이다. 도호스튜디오(東宝スタジオ)의 거물이었으며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이키루’(生きる)와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등과 같은 1950년대 황금기 고전 영화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와도 여러 영화를 함께 만들고 독립프로덕션을 차리기도 한 이력이 있는데 1962년 ‘육체 자유무역’(肉體自由貿易)을 만든 것이다. 이후 여러 개의 가명을 쓰며 100편이 넘는 핑크영화를 연출했다. 

모토키 소지로(本木荘二郎)

고바야시 사토루는 종종 파격적 시도를 하지만 당시의 영화 감독들이 넘을 수 없었던 한계에 부딪힌다. 1967년 연출한 ‘불능자’(不能者)가 그중 하나로 일본영화사에서 장르를 불문하고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남성의 성불능인 ‘임포텐스’(impotence)를 소재로 한 핑크영화로 침대에서의 열정이 부족한 트라우마 투성이의 남자친구의 불능을 고칠 치료비를 벌기 위해 호스티스로 일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전체적으로 여성의 육체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을 제한하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구성했다. 

영화 ‘불능자’(不能者, 1967)

당시 상반신 노출 정도가 허용되는 수위의 전부였으므로 여자의 쾌락을 발목이 움찔거리거나 손을 펼치기도 하고 머리가 옆으로 천천히 늘어지거나 혹은 뒤로 떨어지는 장면 등으로 보여주었다. 여주인공 나카코지 료리(仲小路慧理)의 연기가 돋보인 이 영화 이후 보다 더 과격한 성(性)의 묘사를 위해 그는 미국과 자유중국(대만), 유럽으로 건너가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할리우드에서 텔레비전용 영화의 연출을 맡더니 미국산 포르노 영화의 감독을 맡아 여러 편을 연출한다. 여러 나라의 언어로 현지에서 핑크영화 및 포르노 영화를 감독한 까닭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일본에서는 어느새 ‘포르노계의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영화 '불능자'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나카코지 료리

1970년에 귀국 후 다시 왕성한 연출을 시작한 그는 오늘날 핑크필름계의 베테랑인 ‘오가와 긴야’(小川欽也) 같은 핑크계 거장들을 길러내면서 다시 명성을 이어 나가게 되는데 주로 신도호계열(新東宝映画系)의 아오이영화사(葵映画)를 통해 작품을 내놓는다. 이후 그는 잠시 쇼치쿠(松竹)를 통해 영화를 내놓더니 1970년대에서 80년대까지3개의 이름(가명)을 쓰면서 도호(東宝)에서 한해 3-40편씩의 영화를 내놓는다. 

그가 핑크영화계에서 명성을 얻은 이유는 미국과 공동제작을 많이 하여 ‘일본판’, ‘미국판’을 따로 출시해 모두 호평을 받았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필리핀, 태국 등에서 해외로케를 진행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99년 이시이 테루오(石井輝男)감독의 지옥(地獄)의 총지휘를 맡은 것이 마지막이었으며 71세가 되던 2001년 방광암으로 별세한다.

카토리 타마키

▲카토리 타마키(香取環)
고바야시 사토루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여배우가 등장하는데 바로 ‘카토리 타마키’다. 그녀는 ‘육체의 시장’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일본 영화 역사에서 ‘핑크필름 여배우 1호’(The first queen of Pinku Eiga)로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아름다운 표정, 글래머러스한 육체 그리고 요염하고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삼박자가 갖춰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영화계의 최고 여배우 중 한 사람인 하라 세츠코(原節子)와 비교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사실 한국적 정서에서 육체파 에로배우가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맞먹는 인기를 누린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영화배우를 은퇴한 이후 고향 구마모토로 귀향하여 식당을 하며 평범하게 지냈지만 ‘핑크의 여왕’으로써 남긴 족적은 대단했다. 1962년과 1972년 사이에 무려 600여편의 핑크필름에 출연했으며 당시 그녀의 별명은 ‘핑크 프린세스’(ピンクプリンセス)였다. 미스 구마모토 출신으로 닛카쓰(日活)에 4기로 입사하였지만 별다른 활동이 없어 1961년 퇴사하였다. 이후 ‘육체의 시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영화가 상영 중지되고 잘려 나가 그녀의 진면목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4년 ‘스즈키 세이준’(鈴木清順)감독의 ‘육체의 문’(肉体の門)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육체의 문’(肉体の門, 1964)

사실 이 영화는 당시 시대상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기획되었지만 몇몇 충격적 묘사로 인해 충분히 에로틱 드라마로 분류되었다. 1970년대 로망 포르노 장르에 영향을 준 초기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본 주류영화에 여자의 나체가 등장하는 첫 영화가 되었으며 이때를 계기로 그녀는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에로 마스터’(情色大師)라고 불리우던 와카마쓰 고지(若松孝二)의 20여편에 달하는 영화에 주조연으로 출연하였지만 문제는 인기에 비해 낮은 출연료였다.

1966년 비로소 니시하라 요이치(西原儀一)의 전속 여배우로 아오이 필름(葵電影)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핑크영화 전문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의 인기는 거침이 없었다. 유일한 라이벌은 로망 포르노 스타였던 미야시타 준코(宮下順子). 그러나 카토리 타카키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큰 인기를 누렸는지는 당시 핑크필름의 인기에 힘입어 높은 개런티(20000엔)가 책정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확인된다. 

타마키 카토리의 라이벌 미야시타 준코

사실 당시 많은 배우들이 ‘높은 개런티’의 유혹 때문에 핑크필름을 찍고는 했지만 그녀는 제작비 보다 높은 개런티를 받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핑크 영화감독들은 1970년대까지 수천 편에 달하는 다작을 했고 절정에 달했던 1965년에만 해도 무려 213편의 핑크 필름이 제작되는 등 전성기였다. 성인영화만을 전문적으로 상영하기로 계약한 극장들을 모아 ‘OP 체인’(OPチェーン)이라는 이름으로 회사까지 만들어 1970년대 초까지 자신만의 독자적 배급 시스템을 구축하기에 성공해 배급도 안정적이었다. 

또한 ‘성인영화’(成人映画)라는 잡지까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꾸준히 발간되면서 홍보가 용이해졌고 수많은 스타를 양산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후광으로 그녀는 핑크필름 최고 여배우의 명성이 구축되었다. 일반적인 핑크영화의 경우 스튜디오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촬영 허가를 구하지 않고 게릴라 스타일로 영상을 찍고 로케이션 촬영에 의존했다. 따라서 짧은 기간 촬영을 하고 높은 개런티를 받는 핑크필름은 영화인들에게는 아주 좋은 생계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핑크필름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그녀는 점점 지쳐갔다. 혹독한 경쟁체제에서 핑크 필름들은 점차 소프트 코어에서 하드 코어로 변해 갔고 영화들은 필연성 없이 자주 여배우들을 벗기고 강간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핑크필름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결국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그녀는 “연기를 즐겼지만 핑크영화라는 직업의 공기에 끝까지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말로 당시 핑크필름계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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