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52)/ 보수 사회와 색정(色情)의 영화계
일본영화 경제학(52)/ 보수 사회와 색정(色情)의 영화계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4.04 16: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남자는 괴로워'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70년대는 일본과 한국 모두 영화계의 침체기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각 가정마다 텔레비전들이 보급되어 ‘안방극장’이 확산되었다. 최신 영화는 물론 할리우드 영화들까지 수시로 방영되었고 특별히 볼만한 영화가 아니라면 굳이 극장을 찾을 이유가 드물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일본과 한국은 정반대의 방법으로 탈출구를 찾았다. 

한국은 매달 학교에서 정해준 영화를 날짜에 맞춰 단체관람을 하는 것으로 주로 ‘문화영화’ 혹은 ‘문예영화’를 대상으로 했다. 우수영화 보상제도(한국영화 4편을 만들고 그중 1편이 우수영화로 선정되면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졌던 제도)라는 인센티브가 국가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검열도 피하면서 수요가 있는 ‘하이틴 영화’가 대세를 이뤘다. 

하이틴 스타 몇몇을 제외하고는 출연료가 낮았고 제작비 절감 효과도 있었으며 검열도 피해갈 수 있었던데다가 권위주의 시절이었지만 ‘극장’을 도피적 해방구로 삼아 흥행도 쏠쏠했다. 반면 일본이 선택한 카드는 ‘에로영화’였다. 로맨틱 포르노 노선을 선택하여 1970년대를 버텨냈다. 

저예산으로 급속히 만들어졌지만 역시 출연료가 낮고 제작비마저 절감 효과가 있었던데다가 풍부한 상상력이 더해진 이 영화들은 대형 메이저 영화사들(특히 쇼지쿠와 도에이)까지 나서서 노골적으로 이윤을 노리고 배급을 담당했는데 여기에 ‘일본영화계의 누벨바그’ 영화인들까지 유입되면서 ‘생태계’를 바꿔 놓았던 것이다. 사실 눈앞의 이득에 급급한 메이저 영화사들의 좁은 안목에 의해 제작 되었지만 상업성만큼은 충분히 보장되었기에 침체기를 버티는 원동력이 되어 준 것이다. 

1970년대 도쿄의 맥도널드 햄버거

▲사회의 보수화와 허무주의
1960년대가 일본 학생운동의 전성기였다면 1970년대는 학생운동이 급속하게 쇠퇴하면서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보수화되는 시기였다. 어느새 일본 사회는 ‘전쟁’에 관한 과거를 잊기 시작했다. 경제는 도쿄 올림픽을 기점으로 고속 성장을 하기 시작했으며 비록 1970년대 초반 국제통화위기와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여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유류 파동 이후 일본은 경제를 3차 산업 위주로 구조가 재편되었다. 

때문에 마이크로 전자공학 혁명이 발생하여 신기술 혁신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매우 낮은 실업률을 기록했으며 안정적 노사 관계가 유지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민들의 경제적인 수준이 폭넓게 향상되었으며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이 (평균)2층 집에 (평균)19인치 칼러 텔레비전을 들여놓고 자가용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80년대까지를 1억명의 인구가 중산층이 된 일억총중류 시대(一億總中流時代)라고 부른다. 

경제적 여유와 함께 빈부격차 및 불평등이 줄어들면서 보수적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따라서 1970년대 일본인들에게 극장은 ‘가정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단순히 인식 되어졌다. 1970년 일본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평론가, 정치 운동가로 우익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할복자살과 1972년 극좌파 연합적군 린치 사건으로 인해 학생운동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특히 1971년부터 1972년에 걸쳐 적군파 게릴라인 연합적군(聯合赤軍)이 일으킨 집단폭행 살인사건 이후 좌파 학생운동권의 이미지는 최악으로 치닫고 사실상 일본 내에서의 활동은 끝장이 났다. 문화 예술계 역시 전위와 예술, 실험주의, 사회고발 등을 다루기보다는 사상이나 감정들은 되도록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세상과 인생을 여유롭게 즐기자는 기조가 주류였다. 

일본 국민들은 좌파 사회운동 등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점차 돈벌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또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 집권 후 ‘일본열도 개조론’(日本列島改造論)이 나오기까지 했다. 공공 투자를 축으로 산업을 분산하여 도시의 과밀을 해소하고 지역 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여 경제부흥을 꾀해 ‘돈벌이’가 넘쳐났던 것이다.

아베사다 사건을 다룬 1936년 5월 19일자 아사히신문 기사

▲영륜의 검열과 대중의 도덕성
사회는 비록 보수적으로 흘러갔고 경제는 초고속으로 성장해 갔지만 그만큼 일본 열도는 충분한 오락거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사회의 보수화와 ‘영화검열’이라는 걸림돌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영화검열단’이라고 불렸던 ‘영화윤리규정관리위원회(映畫倫理規程管理委員會, 이하 영륜)’가 바로 그것으로 영화를 관객에게 대중적으로 보여져야 하느냐 아니냐 하는 점과 제한을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지에 관한 엄격한 규정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참고적 의견만을 제시하는 것이었지만 ‘대중의 도덕성’에 모욕을 가했다고 주장하는 순간 경찰이 개입하여 고소당한 영화를 압류하고 제작을 책임진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 1972년 9월 도쿄 검찰총장이 경찰의 탄원으로 비도덕적으로 판정된 닛카쓰(日活)의 로망 포르노(ロマンポルノ) 영화들의 제작과 배급을 책임진 9명을 고소한 사건이 사례다. 

영화 ‘감각의 제국’

가장 유명한 소송은 1976년에 있었던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愛のコリーダ, L'Empire des Sens, 1976)이다. ‘외설’(猥褻)로 판정이 났을 뿐만 아니라 검열을 거쳐 도쿄에서 상영되었는데 프랑스 합작영화이며 외국의 포르노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프랑스어 자막까지 넣었지만 소송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사실 궁색한 변명이기도 했다. ‘감각의 제국’은 실화를 바탕으로 ‘모티브’를 제공 받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1936년 이른바 ‘아베 사다 사건’(阿部定事件)이 바로 그것으로 아베 사다라는 여성이 내연남과 성관계 도중 내연남을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성기를 절단하여 지니고 다녔다는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다. 2012년 영화인 ‘감각의 제국 2–사다의 사랑’(定の愛)이라는 괴작이 있는데 아베 사다 사건을 다룬 에로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의 제국’이라는 타이틀을 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개봉 유료관객 ‘2명’을 기록한 영화이기도 하다. 

▲로맨틱 포르노그래피
1970년대를 강타한 로망포르노는 종종 ‘로맨틱 포르노그래피’의 줄임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어 ‘로망포르노그래픽’(Roman Pornographique), 즉 포르노그래픽 소설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이는 성애(性愛)를 다룬 소설을 가리키는 말로 마르퀴 드 사드(Marquis de Sade)의 저작에서 생겨 난 말이기도 하며 ‘사디즘’(sadism,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이라는 단어가 그의 이름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안느 데끌로스(Anne Desclos 혹은 폴린 레아주[Pauline Réage])의 ‘O의 이야기’(L’histoire d'O), 프랑스 태생의 미국 작가인 아나이스 낭(아네스 닌, Anaïs Nin)의 ‘델타 비너스’(Delta of Venus)등의 작품을 아우른다. 이처럼 유럽 문단의 문학작품에서 단어들을 끌어다 쓴 것은 어휘 자체를 색정(色情)적인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핑크영화들 보다는 고상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영화 'OL일기 - 암코양이의 냄새'와 ‘여고생 게이샤’

닛카쓰는 기본적으로 회사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핑크무비를 양성화하기에 이르렀지만 메이저 영화사라는 회사의 위상을 생각하여 고상하게 보이도록 관객들을 위해 다시 포장하였다. 한마디로 섹스영화들을 고급시장으로 진출시키는 전략을 쓴 것이다. 초기의 로망 포르노 영화들은 따라서 ‘키네마 준보’(キネマ旬報)와 같은 저명한 영화 잡지의 비평가들과 보편적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데 성공한다. 

‘에로영화라고 다 같은 에로영화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키네마 준보’가 ‘올해의 베스트 영화 10’의 목록에 로망 포르노 작품들을 올려 놓는 기염을 토하면서 즉각적으로 도쿄 경시청도 발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1972년 경찰은 당시 상영중이던 후지이 가쓰히코(藤井克彦)의 ‘OL일기 : 암코양이의 냄새’(OL日記 牝猫の匂い와 우메자와 가오루(梅澤薫)의 영화 ‘여고생 게이샤’(女子高生芸者), 야마구치 세이치로(山口清一郎)의 ‘러브 헌터’(恋の狩人, ラブ・ハンター)등의 프린트를 압수한다. 

영화 '러브 헌터 : 욕망'

여기에 곤도 유키히코(近藤幸彦)를 포함하여 이들은 ‘외설재판’(猥褻裁判)에 회부 되었고 1980년에 가서야 고등법원의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경찰은 형법 175조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닛카쓰의 스텝 및 감독들을 체포했는데 몇몇 영륜의 감독관들이 그러한 노골적인 내용들이 법을 빠져나가도록 방치했다는 이유로 함께 ‘공범’이 되어 기소되었다는 점이다. 

다나카 마리

경시청 보안(외설물 진열죄) 1과에서 적발하여 다음 해 닛카쓰 로망 포르노 재판으로 발전, 모두 외설 재판의 피고가 되었다. 그리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는데 야마구치 세이치로의 돌발적인 행위 때문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랑의 사냥꾼, 러브 헌터’의 여주인공이었던 ‘다나카 마리’(田中真理) 주연의 영화인 ‘러브 헌터: 욕망’(恋の狩人, ラブ・ハンター: 欲望)을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저녁에 스트리퍼로 일하는 학생이 ‘공공외설죄’ 혐의로 체포되는 것을 다뤘다. 기소자 입장에서는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닛카쓰는 급기야 그를 해고하기에 이른다. 경찰이 처음 ‘러브 헌터’를 기소했던 의도는 영화사들과 영화산업전반을 겨냥해 ‘너무 극단적으로 흐르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재판이 길어지는 동안 닛카쓰가 로망 포르노 영화를 200편 이상 제작하고 라이벌이었던 도에이(東映)의 ‘핑키 바이올런스’(Pinky Violence) 시리즈가 등장하면서 이 기소는 무의미해져 버렸다. 특별히 이 시리즈는 여자만으로 구성된 패거리들, 심지어 수녀들이 등장하는 레퍼토리로 구성되는 소위 ‘물량공세’ 핑크계열 영화들이었다.

도에이의 '핑키 바이올런스' 시리즈와 '델타 비너스'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
1970년대 일본영화계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와 전속제 폐지 등 여러 지각변동이 있었다. 대형 실업 사태에 직면해 있었고 전속제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배우들은 생존을 위해 다작 혹은 로망 포르노 같은 장르나 텔레비전으로 옮겨 갔다. 이러한 경영압박은 심지어 대작 위주로 돌아가던 다이에이(大映)같은 메이저 스튜디오마저 나중에는 자극적 장르의 영화를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시시도 조

그러나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1971년 총 367편(10년 전의 70%에 불과)을 제작한 일본 영화계는 그 비율에 있어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했음을 나타내는 충분한 지표가 남아 있다. 이중 6대 메이저 영화사의 제작 편수가 160편에 불과했고 저예산의 에로 영화가 159편, 독립영화가 48편에 이르른 것이다. 닛카쓰는 1차례 도산했으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재건하여 1971년 ‘로망포르노’를 런칭하면서 촬영장을 다시 매입하고 80년대 초까지 명맥을 유지 할 수 있었다. 

고바야시 아키라와 와타리 데쓰야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배우와 감독들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이 영화사를 떠났다.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왕년의 스타였던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旭)와 와타리 데쓰야(渡哲也)마저 도에이로 옮겨 액션영화에 등장했고 시시도 조(宍戸錠)는 텔레비전의 개그 프로로 옮겨가 더 유명해졌다. 사실 닛카쓰의 영화관들은 연중 더블 프로그램을 맞추기 위해 1주일에 평균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해야 했는데 ‘로망 포르노’는 가장 적합한 영화였다.

다이에이는 1974년에 재건했지만 전용 촬영장은 없는 작은 독립프로덕션의 지위에 머물렀다. 다만 도호(東宝)와 도에이는 기업의 합리화를 추진하면서 스펙터클 영화, 전쟁 대작 영화를 중심으로 제작했지만 그 업적은 크지 않았다. 쇼치쿠의 경우에는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시리즈로 10년을 유지했다. 전속제 폐지로 스타 시스템이 붕괴 되면서 배우들은 작품마다 새로 계약하는 한편 차츰 개인 프로덕션을 만들었다. TV 탤런트와 영화배우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가수가 스크린에 등장했다. 

데라야마 슈지

또한 1960년대 화려했던 감독들은 모두 몰락하거나 슬럼프에 빠져 해외로 제작자를 찾아 나섰다. 경직화된 197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창작이 빈곤했는데 이 시기에 발굴된 재능있는 영화인은 ‘데라야마 슈지’(寺山修司)가 유일했다. 그러나 그는 극작가에 가까웠고 일본 영화계에서 그나마 1970년대에 두각을 드러낸 것은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이었으며 일본 영화계는 점점 ‘색정’(色情)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