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53)/ 도에이 도쿄의 ‘실록노선’
일본영화 경제학(53)/ 도에이 도쿄의 ‘실록노선’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5.0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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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다카쿠라 겐 

<미국 LA=이훈구 작가>1970년대 일본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가져오고 좌익 학생운동이 종말을 고했지만 사회적으로는 3가지의 새로운 '사회적 문제'들이 등장했다. 그 첫째는 폭주족이고 둘째는 연쇄테러 셋째는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단어인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 은둔형 외톨이)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폭주족은 규모가 점점 확대되어 야쿠자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그 세력이 확장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항쟁(抗爭)이란 이름으로 벌어진 폭주족 간의 집단 패싸움이나 금품갈취, 공갈, 협박, 납치, 살인이 빈번했다. 야쿠자들과 세력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전국 곳곳에 조직이 생겨났으며 전국구 폭주족도 등장했다. 

특히 야마하(YAMAHA) 오토바이의 비약적 발전은 모터크로스와 트라이얼 양쪽의 요소를 겸비하여 오프로드에서도 주행 가능한 신형 모터사이클을 잇따라 등장시키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오토바이 열풍이 일본 열도를 강타했다. 이때 불량배, 폭주족들을 일컬어 ‘양키’(ヤンキー)라고 불렀다. 

또한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East Asia Anti-Japan Armed Front)이라는 극단주의 단체가 결성되어 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군 기업들을 대상으로 테러행위를 일삼아 열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1977년도에 이르러서는 청산콜라‘ 살인사건도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이후 일본이 페트병 콜라 보다는 ‘병 콜라’나 ‘캔 콜라’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바뀌어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1970년대 일본의 극장가

한편으로 일본은 집단주의에서 벗어난 개인주의 문화의 싹도 자라나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전근대 일본에서 찾을 수 있는 개인주의 문화로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 物作り, 장인정신)가 있었다. 그러나 모노즈쿠리는 말을 그대로 풀면 ‘물건 만들기’라는 의미이면서 물건을 만들 때 혼을 실어 만듦을 강조, ‘장인정신’이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해 왔다. 대를 이어 가업을 승계하고 혼을 실어 물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단어인 히키코모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틀어박히다’라는 뜻의 일본어 'ひきこもる(히키코모루)‘의 명사형으로 사회생활에 적응 못해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을 뜻한다. 이후 장인정신과 개인주의가 결부된 현대의 일본문화가 바로 ’오타쿠‘(おたく, 宅, 영어로 mania, 마니아)다. 낚시광, 바둑광, 골프광 등으로 불리는 ’광‘(狂)이라는 말이 이때 등장했다. 

▲도쿄 스튜디오의 액션시리즈
영화계 역시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하기 시작했는데 메이저 영화사들마저 몰락하면서 도에이(東映)가 실록노선(實錄路線)이라는 이름으로 도쿄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액션 영화들을 런칭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 도에이는 교토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한 의협(義俠)영화들을 전면에 내세웠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낡은 노선으로 평가 받았다. 

이에 따라 (사내에서)‘만년 2인자’였던 도쿄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전후 일본사회의 어두운 면이나 1970년대의 새로운 시대상을 영화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생겨난 장르가 바로 ‘헬즈 엔젤스’(Hell’s Angels :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들의 폭주집단)영화들이다. ‘헬즈 엔젤스’라는 말은 미국에서 탄생하여 세계 수십 개국 여러 나라에 2000여명의 멤버를 가지고 있는 유명한 바이커 갱(BIKER GANG), ‘Hells Angels’(헬즈 엔젤스)에서 따왔다. 

‘헬즈 엔젤스’(Hell’s Angels)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의 활동상을 그린 영화 ‘지옥의 천사들’(Hell's Angels, 1930, 영화 에비에이터에도 등장하는 영화로 하워드 휴즈가 감독 및 제작)을 보고 영감을 얻어 헬즈 엔젤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때문에 로고도 영국 공군 폭격기의 로고 등을 모방해 완성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1953년 ‘말’(馬)이 대부분인 서부 영화에서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마을에 나타나 악행을 저지르는 바이크 갱단의 영화 ‘The Wild One’에서 주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에 오토바이족을 결성 하였다고 하니 ‘폭주족’의 유래는 영화로 시작해서 영화로 마무리 된 셈이다. 

나이토 마코토’(內藤誠) 감독

도에이 도쿄 스튜디오의 ‘나이토 마코토’(內藤誠) 감독이 ‘헬즈 엔젤스’영화의 시발점을 이뤘다. 나이토 마코토에 관한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배우 겸 감독이었는데 사실 시나리오작가로서 더 명성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와세다(早稲田)대학교 출신으로 1979년 제26회 교육영화 콩쿠르 문부대신상을 받은 감독이다. 

폭주족 등 당시 젊은이들의 모습을 르포타주(reportage)형식으로 영화로 만들었는데 피카레스크(Picaresque, 주인공들 대부분 악당 요즘은 빌런으로 주로 불린다)적 청춘들을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 폭주족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로 통했는데 의협영화를 통해 협객들의 세계를 그려내던 도에이가 ‘액션 시리즈’(アクションシリーズ)물로 그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이토 마코토의 폭주족 영화 '지옥의 천사'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야쿠자들을 다룬 영화에 대한 노하우가 풍부했기 때문에 제작에 부담이 없었고 학생운동의 소멸로 허탈감에 빠져 있던 청년층에게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반항적 의미의 하나로 ‘폭주족’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들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반면 빌런 주변의 청순한 여주인공이 주목을 받아 ‘모리시타 아이코’(森下愛子)같은 청춘스타가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1970년대 일본영화에서 10대 여학생 역할을 자주 맡았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연기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배우 모리시타 아이코

▲여죄수 사소리 시리즈와 카지 메이코 그리고 수라설희
같은 맥락에서 이토 순야(伊藤俊也)감독의 ‘여죄수 사소리’(女囚さそりシリーズ, 여죄수 별명이 사소리이며 이를 번역하면 전갈)시리즈 역시 복수심과 증오에 가득 찬 여인이 본 국가와 권력의 모습을 그렸다. ‘사소리’는 영화 속에서 코드네임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구가했고 ▲여죄수 사소리 1 - 701호 여죄수 사소리(女囚701号/さそり, 1972) ▲여죄수 사소리 2 - 41호 감방(女囚さそり 第41雑居房, 1972) ▲여죄수 사소리 3 - 짐승의 감방(女囚さそり けもの部屋, 1973) ▲여죄수 사소리 4 - 원한의 노래(女囚さそり 701号怨み節, 1973)까지 4편이 만들어졌다. 

배우 카지 메이코

여성의 복수극, 여자 감옥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묘사와 같은 특징들은 후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폭력적인 여감옥에 대한 묘사는 사실상 이 영화가 원조격이다. 때문에 훗날 ‘킬빌’(Kill Bill), ‘친절한 금자씨’ 같은 영화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인 카지 메이코(梶芽衣子)는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영화 ‘킬빌’의 원전으로 알려진 ‘수라설희’(修羅雪姫 1973) 시리즈로도 더 유명한데 그녀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았다. 

액션에도 남달랐던 카지 메이코

“잘 보이려고 아양 떨지 말고, 괜히 기죽지 말고,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지 당당하게 복수를 하고 피가 난자하는 현장에서도 냉정한 여자 사무라이 역할을 잘 소화해 냈으며 가수로도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원한의 노래’ (恨み節, 1972)의 경우에는 한국프로 ‘미우새’에서 배우 임원희의 주제곡으로 귀에 익은 노래이며 수라설희의 주제곡인 ‘수라의 꽃’(修羅の花, The Flower of Carnage)은 킬빌의 후반부 우마 서먼(Uma Thurman)과 루시 리우(Lucy Liu)간 눈밭의 칼싸움에서 테마곡으로 쓰여 전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노래이기도 하다.

야쿠자 영화의 원조로 불리우는 영화 '진기 없는 전쟁' 시리즈의 1편 스틸사진

▲진기(仁義)없는 전쟁 5부작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1970년대 도에이를 빛난 감독은 후카사쿠 긴지(深作欣二)이다. 그는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인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일본 최초’ 영화과에서 영화를 공부한 후 3학년 때 대본을 쓰기 위해 문학과로 전환해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영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명시나리오 작가인 ‘노다 코고’(野田高梧)에게 사사를 받은 실력파다. 훗날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포기한 할리우드 영화인 ‘도라! 도라! 도라!’(Tora! Tora! Tora!, 1970)의 일본 측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가 만든 ‘진기(仁義 : 도박꾼이나 깡패 집단에서 상하간의 도덕, 혹은 서로 의리를 표현하기 위해 나누는 인사)없는 전쟁’(한국에서는 ‘의리 없는 전쟁’으로 번역함) 5부작은 도에이 도쿄의 작풍(作風)을 ‘실록(實錄)노선’으로 부르게 만들었다. 원래 ‘진기(仁義)노선’의 영화는 도에이 교토의 라인업이었다. 전통적 양식에 대한 향수나 멜러드라마적인 감상적 내용들이 들어간 의협 영화들로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처럼 협객의 이미지나 매 시리즈 마다 여인과의 로맨스가 등장하는 등의 장면들이 공식처럼 나왔다. 

후카사쿠 긴지(深作欣二) 감독

그러나 ‘진기 없는 전쟁’의 경우는 DNA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전후 일본사회 음지의 지배자였던 폭력단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가미했다. 등장인물들이 새로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이름과 함께 소개하는 자막을 넣는 형식을 취했다. 뿐만 아니라 뉴스화면을 보듯 무표정하게 등장인물의 숨은 이야기들을 보여주었다. 

영화 '배틀로얄'

그의 영화에서 선과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폭력단끼리의 세력다툼을 다큐멘터리처럼 세세히 기록하는 카메라의 움직임만 보여주었다. 사실 그는 한국에서는 기타노 다케시‘(北野武)의 배틀로얄’(バトル・ロワイアル, Battle Royale, 2000)시리즈로 더 유명하지만 사실 ‘야쿠자 영화’의 원조라는 수식어가 붙는 1970년대 도에이에서 가장 활약한 감독이었다. 그는 ▲의리 없는 전쟁(仁義なき戦い, 1973) ▲의리 없는 전쟁: 히로시마 사투(仁義なき戦い 広島死闘篇, 1973) ▲의리 없는 전쟁: 대리 전쟁(仁義なき戦い 代理戦争, 1973) ▲의리 없는 전쟁: 정상 작전(仁義なき戦い 頂上作戦, 1974) ▲의리 없는 전쟁: 완결편(仁義なき戦い 完結篇) 등 5부작을 만든다. 특히 후카사쿠 긴지의 작품들은 한국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베르만 형사’(ドーベルマン刑事, 1977)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포맷을 연예계 비리에서 군으로 바꾸었을 뿐 형식은 매우 비슷하다.

배우 기타오지 긴야

▲진기영화의 ‘4대 천왕’
이 영화들은 굵직한 스타 배우들을 양산했는데 다카쿠라 겐(高倉健), 스기와라 분타(菅原文太), 기타오지 긴야(北大路欣也), 와타리 데쓰야(渡哲也)같은 이가 이때 혜성처럼 등장해서 화제를 모았다. 관객들은 다큐멘터리 같은 전개에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열광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협객 김두한’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유명세를 얻었고 드라마 ‘야인시대’ 역시 숱한 스타를 양산했었다. 한국의 무협영화나 드라마들은 예외 없이 후카사쿠 긴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배우  스가와라 분타

다카쿠라 겐(2014년 작고)은 의리(義理)와 과묵함이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는 야쿠자 역 뿐만 아니라 형사 역에도 잘 어울리는 배우였다. 협객영화에서 부조리에 맞서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기 때문에 시종일관 정도를 걷는다. 그러나 스가와라 분타(2014년 작고)가 맡은 역할은 매우 냉혹한 현실주의자로 하극상의 야심을 불태우며 배신과 배반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배우  와타리 데쓰야

아직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는 기타오지 긴야는 오직 파멸을 향해 달리는 야쿠자의 비장미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냉정하고도 비장한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캐릭터로 굳혀져 있다. 반면 와타리 데쓰야(2020년 작고)는 1960년대 닛카쓰(日活)에서 보여주었던 명랑한 이미지를 버리고 불길하면서 광기에 가득 찬 야쿠자 역할을 연기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들 중 ‘진기의 묘지’(やくざの墓場, 1976), ‘야쿠자의 묘지‧치자꽃’(やくざの墓場 くちなしの花, 1976)에 출연하여 완벽한 연기변신에 성공한다. 그는 사실 다카하시 히데키(高橋英樹)와는 닛카쓰에서 라이벌 관계였다. 그러나 태양족 스타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쟁구도로 버티던 그에게 도에이 도쿄는 ‘신천지’였고 197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활동하는 배우의 기틀을 닦았다. 사실 일본 사극 등에 등장하는 대배우들은 1970년대 진기 계열의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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