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54)/ 도에이(東映) 야쿠자 영화의 의미
일본영화 경제학(54)/ 도에이(東映) 야쿠자 영화의 의미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6.08 1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야마시타 고사쿠 감독

<미국 LA=이훈구 작가> 일본 영화 역사가로서 필자는 닛카쓰(日活)의 ‘야쿠자 영화’와 도에이(東映)의 ‘야쿠자 영화’를 엄밀하게 구분하고 싶다. 이건 적어도 일본영화를 알고 싶어 하는 팬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냥 ‘야쿠자 영화’가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스타일이나 철학 자체가 다르다. 도에이 도쿄의 ‘실록 노선’을 설명하면서 연재를 2회로 늘린 이유이다. 

같은 주제를 다뤘지만 확연히 다른 작풍(作風)을 보여줌으로써 야쿠자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닛카쓰’에서 제작한 것인지 ‘도에이’에서 제작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하고 골라보는 재미를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화의 스타일 면에서는 닛카쓰의 (야쿠자)영화들이 할리우드나 ‘홍콩 누와르’ 영화들에 더 영향을 준 듯하다. 

그러나 일본 내부적인 문제나 전후 사회에 처한 상황묘사 있어서는 도에이의 (야쿠자)영화들이 더 리얼하게 다뤘던 것이 사실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닛카쓰가 ‘무국적’을 지향하였다면 도에이는 ‘일본’이라는 국적을 확연하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거장 야마모토 사쓰오와 나카지마 사다오 감독

▲닛카쓰 야쿠자 영화의 특징들
우선 닛카쓰의 경우 ‘무국적’(無國籍)액션 영화를 지향했다. 즉 비록 ‘일본 영화’이고 야쿠자가 등장하지만, 일본이 아니어도 딱히 상관없는 영화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스즈키 세이준(鈴木清順)으로 대표되는 닛카쓰는 한 마디로 ‘스타일’을 중요시 여겼다. 흑과 백을 넘나들며 장면 마다 수시로 바꿔 등장하는 색감은 빠르면서 클로즈 업을 반복하는 카메라의 현란한 이동만큼 입체적이어서 제한된 공간에서도 역동적이면서 세련된 액션을 보여주었다. 

때문에 70~80년대 B급 영화 상영관에서 꾸준히 재상영되며 세대를 초월한 지지와 찬사를 보내며 ‘팬덤’을 형성하더니 훗날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같은 할리우드 감독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실 생략이 많고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하고 빠른 전개로 주목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필름을 아끼기 위해 당시 제작부에서 엄청난 압박을 해 왔기 때문에 되도록 불필요한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필름시대’에는 할리우드 같은 거대 메이저 스튜디오를 제외하고는 심지어 배우가 ‘N.G’가 나도 역적이 되는 환경이었으니 액션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있어서 ‘생략’은 상당한 고심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스즈키 세이준은 ‘컷의 과감한 생략’이 전매특허였다. 

영화 '살인의 낙인'(1967)과  '도쿄 방랑자'(1966)

스토리 면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협객영화를 약간 비틀어 ‘조직에 버림받은 주인공’이 그 특징이었다. 훗날 ‘피스톨 오페라’로 리메이크 되기도 한 영화 ‘살인의 낙인’(殺しの烙印, 1967)은 스즈키 세이준을 ‘아티스트’ 반열에 오르게 했으며 장르의 혁신가로 추앙받게 된 작품이다. 시시도 조(宍戸錠) 주연의 이 영화는 조직에서 넘버3에 불과했던 킬러가 한 여자의 의뢰에 실패하면서 아내와 조직에 배신당한 후 결국 우여곡절 끝에 넘버1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스즈키 세이준은 ‘심리묘사’를 카메라 앵글로 대체하는 신기를 발휘한다. 이때 빈번하게 등장하는 기법이 바로 ‘Till up’과 ‘Till down’으로 카메라의 위치는 고정 시키고 앵글만 상향, 하향을 반복하여 불규칙적인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식이다. ‘도쿄 방랑자’(東京流れ者, 1966) 역시 원작이 엔카 ‘도쿄 방랑자’인 관계로 시도 때도 없이 노래가 나오기도 하지만 역시 조직에 버림받은 킬러의 이야기가 주요 스토리이며 ‘10미터 내의 사격 명수’라는 설정답게 특정 사거리에서 사정거리에 시야를 클로즈업하고, 주인공이 달려 나가면서 총을 쏘는 장면은 훗날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

▲도에이 야쿠자 영화의 특징들
닛카쓰의 야쿠자 영화들이 무국적인데다 시점도 모호해서 21세기로 넘어 온 현재까지도 B급 영화로서 극장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상영될 수 있었던 반면, 도에이 야쿠자 영화는 가장 ‘일본적’인 영화를 지향한다. 도에이의 야쿠자 영화는 ‘스타일’보다는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역동적이고 다큐멘터리적인 연출 스타일의 진수를 맛보게 한 것도 도에이다. 

‘실록’(實錄)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 야쿠자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는데 그 의의를 두고 있다. 일본의 전통적 가치를 다룬 도에이 야쿠자 영화가 대중적인 장르가 되면서 영화는 일본의 전통과 서구·현대의 가치, 즉 전통적인 좋은 야쿠자와 현대의 나쁜 야쿠자에 대해 대립적인 입장을 철저하게 취한다. 

이러한 주제는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표현되는데 ‘좋은 야쿠자’는 일본 전통 기모노를 입고 전통적인 거리와 건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묘사하는 반면, 현대의 ‘나쁜 야쿠자’는 그 조화의 파괴자로 대표되는 서양식 양복을 입고 등장한다. 야쿠자들의 의리와 협행(俠行)을 부각시켜, 이른바 임협(任俠) 영화가 탄생한 배경이 되었다. 야쿠자 스스로 높여 부르던 ‘협객’(俠客)으로 그려짐으로 전후 패배주의를 씻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원래 ‘임협’이라는 말뜻이 약자를 돕고 강자를 물리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야쿠자의 역사가 14세기 무로마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때 오야붕(親分)-꼬붕(子分) 관계로 뭉치는 집단으로 시작하여 에도시대에는 무뢰한(無賴漢)으로까지 불리던 그들이 좋고 나쁘고가 있다는 점이 흥미롭지만 ‘협객’(俠客)이라는 말 자체가 그들이 도박 등에 관여하면서 벌인 ‘협상’(俠商) 때문에 붙여진 유래가 있다. 

좀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도에이의 야쿠자 영화는 실제 야쿠자에서 소제를 찾은 작품들이 대다수였고 심지어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감독들조차 다루지 않으려는 재일 조선인 야쿠자까지 소재로 삼았다. 그만큼 전후 사회에 처한 야쿠자들의 상황을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묘사하고자 했다. 

그중 가장 선두는 ‘야마시타 고사쿠’(山下耕作, 야마시타 코사쿠)였다. ‘후지 스미코’(富司純子) 주연의 ‘붉은 모란 도박꾼’(緋牡丹博徒)으로 한국에서는 잘 알려진 감독이지만 일본에서는 실제 야쿠자들을 소제로 담아 큰 인기를 얻었다. 물론 도박꾼들의 세계를 잘 다루면서 여성 야쿠자, 야쿠자의 아내 등 소재를 다양하게 다룬 감독이었다.

▲야마시타 고사쿠
교토대학(京都大学) 졸업 후 도에이의 입사 시험에서 1위로 합격을 했지만 면접에서 반항아적 성격이 불채용으로 결론이 나는 상황이었는데 프로듀서이자 훗날 도에이의 중흥을 이끌고 회장이 되는 ‘오카다 시게루’(岡田茂)가 “이 아이야말로 근성이 있으니 영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ああいうのこそ根性があるから、映画をやらさないといかん)는 말로 채용했다. 

도에이 도쿄 촬영소장인 마키노 미츠오(牧野満男) 역시 “오카다, 네가 선택한 녀석을 넣어라”(岡田、お前が選んだ奴を入れろ)하는 찬성도 있어서 입사 할 수 있었다. 그가 도에이의 야쿠자 영화에 기념비적으로 남긴 작품은 ‘야마구치구미 제3대’(山口組三代目, 1973)으로 다카쿠라 겐(高倉健)주연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야마구치 제3대'의 실존인물 타오카 이츠오(오른쪽)와 배우 다카쿠라 겐

실제로 야마구치구미의 3대 조장(두목)인 ‘타오카 이츠오’(田岡一雄)와 협상 끝에 영화화 하는데 성공했는데 평소 오카다 시게루와 ‘지콘’(형제처럼 친밀한 사이, 昵懇)이라고 불리울 만큼 친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연히 대히트를 기록했으며 야마구치구미가 일본 제1의 야쿠자였음을 감안 할 때 관객들의 호기심도 절정에 달했다. 실존하는 조직과 조장이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전례가 없는 영화였기에 선전의 필요도 없었고 단숨에 타오카 이츠오는 ‘영웅’이 되었다.  

도에이의 관객 조사 만족도는 92%로 관객의 대부분은 타오카 이츠오 조장의 인간 드라마에 감동했다는 데이터가 나왔다. 이후 야마구치구미의 스토리는 도에이의 단골 영화 소재였다. 게다가 오카다 시게루는 타오카 이츠오의 아들인 ‘타오카 미츠루’(田岡満)를 프로듀서로 영입한다. 이에 타오카 이츠오는 각본을 체크 하면서도 “협력은 해도 간섭은 하지 말라”(協力はしても反対はするな)는 지시를 내려 각별하게 신경을 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 왜 ‘야마구치구미’였을까? 야마구치구미는 전통적으로 가난함과 배척 때문에 일반 사회에서 살기 어려운 자들을 인수해주는 마지막 보루였으며 ‘정치 권력’과는 거리를 둔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일본폭력열도·게이한 살인군단'(1975)

‘일본폭력열도·게이한 살인 군단’(日本暴力列島 京阪神殺しの軍団, 1975)은 재일 조선인 야쿠자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그들이 전후 사회에서 처한 상황을 묘사했다.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旭) 주연으로 ‘지금까지의 야쿠자 영화와는 다른’ 작품으로 승부를 보자고해서 발굴해 낸 소재였다. 오사카에 본부를 둔 ‘야나가와구미’(柳川組)가 모델이며 야마구치구미의 무장 투쟁파로 ‘살인의 군단’(殺しの軍団)으로 불렸다. 

다른 조직에 비해 재일조선인이 많이 속해 있었으며 초대 조장은 ‘야나가와 지로’(柳川次郎, 한국명 양원석), 2대 조장 타니가와 야스타로(谷川康太郎, 한국명 강동원)였다. 픽션과 넌픽션을 적절히 섞은 시나리오가 일품이었다. 일본폭력열도(日本暴力列島"シリーズ)의 ‘제1탄’(第一弾)으로 홍보했으며 잔인한 살인묘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 외
도에이의 실록노선은 1970년대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나카지마 사다오(中島貞夫)의 ‘일본의 수령’(日本の首領) 3부작(1977-1978)이다. 그는 갱스터 무비의 대가로서 훗날 오사카 예술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는데 실록노선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장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일본의 수령 시리즈는 기존의 도에이 작품들과는 달리 ‘도에이 쿄토’(東映京都撮影所)에서 촬영되었다. ‘야쿠자 전쟁 – 일본의 수령’이라는 제목답게 야마구치구미를 모티브로 한 3부작 영화다. 

스즈키 노리후미 감독과 영화 '트럭 야로'시리즈

1부가 야마구치구미의 전국 제패 과정을 그렸다면 2부는 오사카와 도쿄간 2대 파벌의 싸움에 포커스를 맞췄고 미후네 도시로 (三船敏郞)가 출연한 3부에서는 동서간 대립과 정·재계 이야기가 더 해진다. 이 영화들은 한국의 조폭영화들에도 영향을 끼쳐서 ‘전국구’ 같은 아류작들을 양산하게 된다. 나카지마 사다오는 후카사쿠 긴지(深作欣二)와 함께 도에이 실록노선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다. 

후카사쿠 긴지는 지난회에서도 언급했지만 야쿠자를 소재로 한 영화들을 통해 사회비판적인 성향을 보여 왔으며 ‘실록(實錄)노선’의 마침표를 찍은 감독이기도 하다. ‘진기(仁義 : 도박꾼이나 깡패 집단에서 상하간의 도덕, 혹은 서로 의리를 표현하기 위해 나누는 인사)없는 전쟁’(한국에서는 ‘의리 없는 전쟁’으로 번역함) 5부작이 마무리되자 도에이의 간판 배우 스가와라 분타(菅原文太)는 스즈키 노리후미(鈴木則文)감독의 ‘트럭 야로’(トラック野郎, Torakku Yarō: Goiken Muyō)시리즈로 도에이가 야쿠자 영화만 제작하는 스튜디오는 아님을 알렸다. 

배우 시마다 요코와 나카지마 유타카

1970년대, 일본 물류의 주역이 철도운송에서 트럭운송으로 이행하던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시리즈로 요란스러운 장식물들로 치장한 트럭에 짐을 싣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트럭 야로’의 사랑과 싸움에 관한 코미디물이다. 일본 시리즈물의 특징으로 매 시리즈 마다 여주인공을 바꾸는 전략을 쓴다. 시마다 요코(島田陽子), 나카지마 유타카(中島ゆたか) 등이 이 시리즈에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도에이는 예술 시대극을 부활시키기 위해 ‘아코성 단절’(赤穂城断絶, 1978): 주신구라(忠臣藏) 등 대작을 제작 하지만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