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인사들 정책포럼 ‘사의재’와 다산 정약용
문재인 인사들 정책포럼 ‘사의재’와 다산 정약용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3.01.16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와서 처음으로 묵은 곳인 주막집 사의재.

문재인 정부 인사들로 주축이 된 정책 연구 포럼 ‘사의재’(四宜齋)가 1월 18일 출범한다. 사의재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중 머물렀던 주막집 이름이다. 한편, 문 전 대통령은 조만간 경남 양산 평산마을 인근에 북카페를 열 예정이다. 문 전 대통령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국으로 연대하는 북클럽을 통해 책 읽기 운동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약용과 사의재 역사를 더듬어 본다. <에디터 이재우>

1801년 2월 발생한 신유박해(천주교 박해 사건) 당시, 정약용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됐다. 신앙을 굳게 지키던 정약용의 막내 형 약종이 참수됐다. 다행히 몇 해 전 천주교와 단절한 둘째 형 약전과 약용은 유배형으로 감형됐다. 그렇게 유배 간 곳이 경북 포항의 장기현이다. 

충북 제천 배론성지의 황사영 토굴.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은 1801년 2월 말 신유박해를 피해 배론에 살던 신자의 집에 숨어 지냈다. 옹기 저장고로 위장한 토굴에서 8개월간 은신하며 122행, 1만3384자의 백서를 작성했다. 북경의 주교에서 보내려 했던 것. 그해 9월 29일 의금부에 체포되어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 죄로 처형되었다.
토굴 안에 있는 백서. 

그런데 그해 9월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이복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다. 황사영은 은둔지 배론에서 신유박해의 전말을 담은 백서를 작성해 베이징 주교에 보내려다 발각됐다. 백서 사건 두달 뒤인 11월, 정약용 형제는 한양으로 불려가 다시 추국을 받았다. 

그 결과, 정약전은 나주목의 흑산도로, 정약용는 강진현으로 이배됐다. 유배령이 떨어진 보름후인 11월 22일, 나주 율정점 주막에서 형제는 마지막 이별을 했다. 그렇게 정약용의 ‘강진 18년’ 유배가 시작됐다. 

정약용은 주막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빌려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붙였다. '생각, 용모, 언어, 행동' 4가지를 바르게 한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의재, 강진 유배에서 머물렀던 주막집 이름
정약용이 강진에 도착한 날은 1801년 11월 23일. 처음으로 묵은 곳은 주막집이었다. 정약용은 주막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빌렸는데, 4년 기거했던 그 주막집 당호(堂號)를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적게, 행동은 무겁게)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로 명명했다. 정약용은 사의재기(四宜齋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의재라는 것은 내가 강진에 귀양가 살 때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단정해야 하니 단정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하게 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행동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것을 그 방에 이름 붙여 사의재라고 한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중 거처를 네 번 옮겼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신유년(1801년) 가을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밖 주막집에 우거하였다. 을축년(1805) 겨울에는 보은산방(고성사)에서 기식하였고, 병인년(1806년) 가을에는 제자 학래의 집에 이사 가서 있다가, 무진년(1808년)) 봄에야 다산(다산초당)에서 살았으니 총 유배지에 있었던 게 18년이다.>
 
현재 강진 읍내에는 정약용이 묵었던 주막집 사의재가 재현되어 있다. 마당 앞엔 평상이 펼쳐져 있고, 술병을 든 할머니와 여인상이 자리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