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경제학(72)/ 국민 여배우 요시나가 사유리
이훈구의, 일본영화경제학(72)/ 국민 여배우 요시나가 사유리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3.12.08 1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1970년대의 일본영화사를 정리하면서 언급할 만한 두 명의 여배우가 있어 2회에 걸쳐 차례로 소개할 것이다. 첫 번째 여배우는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이고 두 번째 여배우는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恵)이다. 사실 요시나가 사유리는 1960년대에도 언급된 바 있는데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현역으로 뛰며 활약하는 국민 여배우다. 

다만 1970년대는 조금 활동이 뜸했지만 어디까지나 1960년대 ‘국민 여동생’의 이미지를 넘어서기 위한 과정으로 읽혀진다. 다른 한 사람 야마구치 모모에의 경우에는 그녀를 빼고 1970년대의 일본 영화계를 이야기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녀는 단순한 아이돌을 넘어서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 연예인이자 아시아의 스타였기 때문이다. 이번 편에서는 먼저 요시나가 사유리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1945년생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이다. 나무위키 등을 검색해 보면 ‘국민 딸 – 국민 여동생 – 국민 연인 – 국민 아내 – 국민 엄마 – 국민 할머니’로 차례차례 진화하며 지금도 여전히 인기 순항 중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아역배우로 출발하여 노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는 배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대부분 ‘성장통’을 겪기 마련이고 특히 아역배우 출신들은 이미지 때문에 성인 배우로 도약하는데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나가 사유리는 11세부터 연예 활동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198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한편 이후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여전히 현역 주연배우로 종종 캐스팅 되고 있다.

아역배우 시절의 요사나가 사유리와 데뷔작 '아침을 부르는 휘파람' DVD

▲지성과 미모를 겸비
요시나가 사유리는 연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여 청춘스타로써 활약했다. 물론 그녀는 6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1970년대에도 꾸준했다. 작곡가 ‘요시다 마사’(吉田正)의 문하생으로 출발한 가수로서도 수많은 앨범을 내며 인기를 얻은바 있는 만능 엔터테이너다. 남편 역시 후지 TV 디렉터, 공동 TV 사장, 회장, 이사 상담역을 역임한 오카다 타로(岡田太郎)다. 당연히 연예계에서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도록 생성된 팬덤이 워낙 광범위하여 일본인들의 요시나가 사유리 앓이를 하는 광팬들을 일컬어 ‘사유리스트’(サユリスト)라고 부르고 있다. 

아역배우 출신으로 학업을 병행하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최고 전성기인 1965년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 서양사학 전공으로 입학해서 1969년에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1960년에 닛카쓰(日活)촬영소에 입사한 이후 배우와 가수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느라 고등학교를 중퇴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치열한 준비 끝에 이룬 입학이었다. 지성과 미모를 겸한데다가 도쿄도 시부야구 출신으로 ‘시네마 로맨스’(映画のロマンス)라는 잡지를 발간했던 아버지와 상류 가정에서 태어나 가수의 길을 걷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니 연예계에 진출할 유전자는 타고 났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사랑과 죽음을 바라 보며'

그녀는 1957년 시부야 구립 니시하라 초등학교 6학년 때 라디오 드라마 ‘아카동 스즈노스케’(赤胴鈴之助)로 데뷔했다. 후쿠이 에이이치(福井英一)와 ‘타케우치 츠나요시’(武内つなよしに)의 원작으로 ‘현무관’(玄武館)의 소년 검객 ‘가네노 스즈노스케’(金野鈴之助)의 활약을 그려낸 당대 인기 만화였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붉은 몸통 스즈노스케’정도인데 같은 해 10월, 라디오 도쿄 제작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추진하여 이에 출연하였다. 이어 1959년에 쇼지쿠(松竹)에서 제작한 ‘치사토 이코마’(生駒千里)감독의 ‘아침을 부르는 휘파람’(朝を呼ぶ口笛)으로 영화에 데뷔 함으로서 본격적인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원작은 요시다 미노루(吉田稔)의 ‘신문배달’(新聞配達)로 전국 중학, 소학교 학생 철자법 콩쿠르에서 문부대신상(文部大臣賞受賞)을 수상한 작품이다. 소년가장이 야간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신문배달을 하며 꿈을 키워 나가는데 그를 돕기 위해 나선 동료들과 꿈을 이뤄 나가도록 격려하는 소녀가 등장하는 내용이다. 요시나가 사유리는 이 영화에서 격려하는 ‘소녀’로 나왔는데 주목을 받았으며 텔레비전과 영화 모두 성공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국민배우’로서의 출발이다. 

▲1960년대를 평정하다
1960년 닛카쓰(日活) 촬영소에 입사하면서 그녀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대개의 아역배우들이 그러하듯이 그녀도 학업과 영화 일을 병행하는 일정이었다. 처음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탁구부 활동을 하다가 흥미를 잃고 방송부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훗날까지 인연이 되는 선배를 만나게 된다. 바로 일본의 싱어송 라이터이자 작사가, 작곡가이면서 배우인 ‘가토 토리코’(加藤登紀子)가 방송부장이었던 것이다. 

요시나가 사유리의 100번째 영화 '츠루-학'(1988) 스틸

물론 요시나가 사유리가 1년 후 전학을 가게 되어 둘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훗날 인연이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1961년 우라야마 키리로(浦山桐郎)감독의 ‘큐폴라가 있는 거리’(キューポラのある街)의 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가 제13회 블루리본상(ブルーリボン賞)을 휩쓸어 버렸다. 작품상과 신인감독상 외에도 요시나가 사유리가 17세, 역대 최연소 나이로 ‘주연여우상’(主演女優賞)을 수상한 것이다. 그녀는 이 영화를 계기로 배우로서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 칸영화제에 출품되었는데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Roland Truffaut)가 이듬해 4월에 제3회 프랑스 영화제(フランス映画祭)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왔을 때 특별히 언급할 만큼 작품성이 있었다. 

키네마 준보(キネマ旬報)에서는 동년 일본 영화 베스트 2위, 영화평론(映画評論)에서는 베스트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낸다. 공장지대에서 여러 가지로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는데 사실적 묘사는 물론 일본인 어머니를 홀로 남기고 북송선을 타는 가족도 등장할 만큼 당대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호평을 받았다. 취업과 입시 그리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 그리고 당대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등장인물들의 그 가족들까지 묘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청소년 물’이면서도 소녀들의 이야기였기에 더욱 인기몰이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같은 해 4월 자신의 주연 영화인 ‘붉은 싹과 흰 꽃’(赤い蕾と白い花)의 주제가 ‘추운 아침’(寒い朝)을 불러 가수로서도 50만장의 히트 앨범을 내더니 9월에는 하시 유키오(橋幸夫)와 듀엣으로 ‘언제라도 꿈을’(いつでも夢を)을 불러 300만장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를 계기로 ‘하마다 미츠오’(浜田光夫)와 함께 ‘닛카쓰의 간판 배우’로 불리면서 두 사람을 콤비로 한 ‘순애 & 청춘영화’(純愛&青春映画)가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닛카쓰의 라인업이 남성 중심의 액션영화들이 대부분이었음에 비추어 이 두 사람 주연의 영화들은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는데 1963년의 ‘진흙 투성이의 순정’(泥だらけの純情), 1964년의 ‘사랑과 죽음을 바라보며’(愛と死をみつめて) 등이 바로 그것이다. 

쇼와 시대의 미녀 여배우로 상징 되던 요시나가 사유리

이중 ‘진흙 투성이의 순정’은 훗날 야마구치 모모에 주연으로 1977년에 리메이크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는데 한국에서는 표절작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년)의 원안 영화로 알려져 있다. 외교관 딸인 마미와 야쿠자 지로가 사회적 신분 차이와 조직의 방해를 뛰어넘어 사랑을 이루고자 하지만 비극적 결말을 맞는 과정을 그린 멜로 드라마이다. 일본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자신의 남편인 ‘미우라 토모카즈’(三浦友和)와 함께 리메이크작에 주연으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랑에 빠졌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영화다. ‘사랑과 죽음을 바라보며’는 난치병에 걸린 여고생이 입원하게 되면서 같은 병동에서 만난 남학생과의 사랑과 우정을 배경으로 한 순애보 영화다. 이후 요시나가 사유리의 브로마이드가 너무 잘 팔려 닛카쓰에서 기획 상품을 내놓기도 했는데 마츠바라 치에코(松原智恵子)와 이즈미 마사코(和泉雅子)를 묶어서 ‘닛카쓰 3인의 딸’(日活三人娘)이라는 기획 상품을 내놓아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또한 요시나가 사유리는 아사오카 루리코(浅丘ルリ子), 아시카와 이즈미(芦川いづみ), 나카하라 사나에(中原早苗) 등과 함께 ‘닛카쓰 펄(진주) 라인’(日活パールライン)이라고도 불렸다. 바쁜 일정에도 차질 없이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1969년, 그것도 각 메이저 영화사마다 전속 제도가 유지되던 시기에 닛카쓰와 계약을 갱신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매년 닛카쓰의 영화 2편에 의무적으로 출연을 해야 하지만 양해를 구하면 타사 작품이나 이른바 ‘자주제작영화’(自主制作映画, 개인 제작 개념)에도 출연할 수 있는 일종의 ‘부분적 자유계약’이었다. 당시의 관행으로서는 파격이었다.

생전 종종 낭독회를 진행한 요시나가 사유리와 사카모토 류이치

▲세월이 흘러도 현재진행형
1973년 그녀는 스캔들에 가까운 결혼식을 했다. 15년 연상인 ‘오카다 타로’와 결혼하였는데 유부남과의 불륜이었기 때문에 일본열도에 충격을 안겨 줬다. 국민 연인의 충격적인 결혼 때문인지 슬하에 자녀를 두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활동이 뜸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는데 기존의 청순한 이미지와 다른 행보(불륜)에 부모가 결혼에 반대하여 예식에 불참하는 사건까지 겹쳐 부침을 겪었다. 1973년 결혼 당시의 일본 영화계는 로망 포르노의 전성기로 대담하게 정사(情事) 씬을 연기하는 젊은 여배우가 다수 등장했다. 

따라서 요시나가 사유리가 1960년대에 연기한 ‘청순한 아가씨’(清純なお嬢さん)상은 유형적이고 과거의 유물 같은 인상이되어 버렸다. 때문에 결혼 이후 이미지 변신을 꾀하게 되는데 1975년, ‘청춘의 문’(青春の門)이 그것이다. 이츠키 히로유키(五木寛之) 원작의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후쿠오카(福岡) 현의 탄광지대에서 태어난 청년이 2차대전 후 일본 사회에서 삶의 목적을 탐색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이후 다시 인기를 회복하게 되고 1988년 영화 ‘츠루 - 학’(つる-鶴)의 주연을 맡았는데 통산 100번째 출연작이다. 

일본의 민화인 ‘학의 보은’(鶴の恩返し)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이치가와 곤(市川崑)이 감독했다. 도호(東宝)에서 제작, 배급한 로맨스 판타지 영화다. 눈 내리는 밤, 가난한 농부 ‘다이주’(大寿)의 집에 아름다운 여성이 찾아오는데 바로 이름이 ‘츠루(つる, 학)’이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에게는 중풍으로 누워만 있는 모친 ‘유라’(由良)가 있었는데 츠루는 엄청 부지런 한데다가 효부였다. 유라의 베틀을 발견하고는 베를 짜기 시작한다. 다이주에게는 베를 짜고 있을 때 훔쳐보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완성된 아름다운 천을 팔러 나갔는데 츠루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다. ‘학의 보은’ 의미가 무엇인지 떠오를 것이다. 이 영화는 도호 측에서 상영 전에 ‘눈’(雪)을 이미지화한 조명효과로 더 화제를 몰고 왔다. 

요시나가 사유리의 최근 모습

1990년대부터는 배우로서는 ‘영화’에만 전념하고 있지만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역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반원전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면서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서 개런티 없이 음성 안내를 녹음하는가 하면 반원전에 관한 시를 낭독하거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지난 4월 작고한 일본음악계의 대부이자 세계적 영화음악가인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와 종종 낭독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왕성하게 C.F에 등장하고 TBS 라디오에서 ‘오늘밤은 요시나가 사유리입니다’(今晩は 吉永小百合です)를 오래도록 진행해 오고 있다. 한마디로 요시나가 사유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021년 나루시마 이즈루(成島出)감독의 영화 ‘생명의 정거장’(いのちの停車場)의 주연을 맡아 열연하여 2022년 제45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주연 여배우상’을 수상 하기도 했다. 현역 내과 의사인 ‘미나미 교코’(南查子)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대형종합병원에서 응급의로 일하던 62세 여의사 ‘시라이시 사와코’가 긴박한 상황에서 비의료인의 의료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사 후 지방에 내려가 묵묵히 일하는 모습을 그린 휴먼스토리 영화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7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청초함과 탄탄한 연기력으로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진 환자들과의 만남과 이별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사로서의 열정과 고뇌 그리고 그 주변부 인물들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다뤘다. 

1960년대 최대 스타였던 요시나가 사유리를 1970년대의 일본 영화계를 마무리하면서 언급한 특별한 이유는 바뀐 생태계에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롱런을 했다는 점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과거의 유물처럼 묻혀 질 뻔한 상황에서도 이를 노력으로 극복했으며 그 연기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민배우’로서 철저한 자기 관리로 연기 생활을 중단하지 않으면서 좋은 원작이나 시나리오가 있다면 스스로 ‘기획’에 참여하여 일본 영화계의 많은 감독들을 세웠다. ‘감독과 배우의 좋은 관계’를 정립하면서도 현장에서 배우들간의 신구조화를 잘 이뤄 나가는 그녀의 연기는 지금도 찬사로 이어지고 있으며 다른 연기자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되어주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