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75)/ 카도카와 하루키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75)/ 카도카와 하루키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4.03.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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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도카와 하루키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 대표)> 관객은 감소하고 영화관 입장료는 급상승한 데 반해 컨텐츠의 수준은 떨어진 198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글자 그대로 위기였다.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질 낮은 프로그램 픽처들을 양산한 후유증도 있지만 대형 스튜디오들의 체계가 무너진 탓도 있었다. 

특히 5-60년대 감독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던 조감독직은 오랜 수련기간의 의미를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다. 대형 영화사들은 TV, 비디오, 광고 출신의 젊은 감독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배우 양성 역시 전속제가 폐지되고 연기 경력이 전혀 없는 가수, 다양한 출신의 탤런트들이 기용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묻지마 캐스팅’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지만 경제 논리로 움직여야 하는 대형 영화사들이 앞 다투어 제작편수를 줄이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 일본 영화계의 풍운아로 자리 잡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카도카와 하루키’(角川春樹)이다.

카도카와 하루키

▲카도카와 하루키
1980년대 가장 불행한 길을 걸어야 했던 제작자를 들자면 바로 카도카와 하루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따금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비교가 되는 그는 와세다대학의 동기이기도 하다. 선대회장의 주력사업보다 2대 회장의 신종사업으로 그룹이 타격을 받게 되는데 이병철 회장이 ‘자동차’라면 그는 ‘영화’였다. 

한때 화제가 되었던 건 생년월일이다. 이병철 회장이 1942년 1월 9일, 카도카와 하루키가 1월 8일생이라는 점이다. 그는 일본의 국어학자인 카도카와 겐요시(角川源義)에 의해 설립된 ‘카도카와 서점’(현 카도카와 그룹의 모태)의 창업 이념에 따라 ‘일본의 언어’(일본 문학)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던 곳이었다.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쇼와문학대전집’(昭和文學大全集) 전 60권을 출판하여 패전 이후 일본문학 부활의 초석을 다졌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근심거리가 있었는데 바로 큰 아들인 ‘카도카와 하루키’였던 것이다. 아버지와 유독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는 처음 가업을 잇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카도카와 겐요시에게 암 선고가 내려지면서 결국 입사를 하게 된다. 

입사 2년차에 자신의 첫 번째 기획물로 배우나 성우가 낭독하는 음성을 수록한 칼러판 ‘세계의 시집’(전 12권)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서 편집자로서의 능력을 인정 받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일본근대문학대전’(전 60권)까지 성공을 거두면서 편집국장으로 승진까지 하여 입지를 굳혀 가던 그는 1975년 카도카와 겐이치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불과 34세의 나이에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이것이 비극의 출발이다. 카도카와 하루키가 뜬금 없이 종합 미디어 그룹을 표방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누가미가의 일족'(犬神家の一族, 1976)

▲쓰레기통 광고
카도카와 하루키는 ‘카도카와 서점’을 혁신 시키겠다는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그의 혁신 의지를 담은 그 유명한 ‘쓰레기통 광고’이다. 내용은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카도카와 문고를 읽고는 내릴 때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이 광고를 통해 카도카와 하루키는 더 이상 딱딱한 책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 누구나 재미있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이 광고는 기존 카도카와 서점의 이미지를 바꿔 놓았고 기존 출판업계의 점유율까지 바꿔 놓았다. 이러한 성공이 카도카와 하루키가 그토록 선친 때부터 반대에 부딪혔던 ‘영화’에 진출하게 된 계기였다. 

사실 그는 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5번의 이혼과 6번의 결혼을 할 만큼 끼도 다분했고 대학 시절에는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나는 절대다. 나는 완전하다. 나는 신이다.” (私は絶対だ。私は完全だ。私は神なのだ。) 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리고 당시 영화계 관행상 제작부장들은 서점을 찾아가 문학서적들을 읽으며 소재를 찾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한 셈이었다. 

필진도 화려해서 추리소설의 대가인 요코미조 세이시(横溝正史), 사회파 추리소설가 모리무라 세이이치 (森村誠一), 역시 추리소설가인 아카가와 지로(赤川次郎), 하드 보일드 소설로 유명한 오오야부 하루히코(大藪春彦) 등의 작가들이 밀리언셀러들을 양산하고 있었기에 영화사에 판권만 팔기 보다는 직접 제작에 뛰어들자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 '인간의 증명'(1976)

▲이누카미가의 일족
마침내 1976년 카도카와 하루키는 '이누가미가의 일족'(犬神家の一族)의 영화 제작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카도카와 하루키가 스스로 제작 총 지휘로서 영화 제작에 참가했으며 감독은 이치가와 곤(市川崑), 음악은 재즈 음악가 오노 유지(大野雄ゆう)가 담당했다. 또한 카도카와 하루키는 영화 홍보에 있어서 독특한 방법으로 선전하는 기발한 방법을 썼다. 완성된 영화의 일부를 TV CF를 대량으로 흘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일부 지식인들은 경악했다. 카도카와 서점의 주요 매출이 교과서 관련 서적을 주로 취급하던 출판사인데 갑자기 영화 사업에 참가하는 것은 전대 미문이었고 이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영화 평론가인 시라이 요시요(白井佳夫)가 “카도카와 영화는 예고편을 본편이 압도한 적이 없다”고 단언적이고도 매끈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를 비웃듯 카도카와 하루키가 승부수로 던진 대량 선전은 대 성공했고, 많은 관객들이 영화관에 몰려들어 15억엔의 흥행수입을 기록하며 그 해 순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게다가 영화를 본 관객들이 곧바로 서점으로 몰려가 원작소설을 구입해 읽는 바람에 무려 1800만부 판매의 기록을 올려버린다. 이 영화는 일본의 제약왕 ‘이누가미 사헤에’의 유언장과 살해 그리고 사후 이를 둘러 싼 유산상속의 분쟁 속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을 그려내고 있다. 당연히 이에 고무된 카도카와 하루키는 “읽고 나서 볼까? 보고 나서 읽을까?”라는 기발한 카피로 TV CF를 제작해 또다시 히트를 치며 장안의 유행어로 만들어 버린다. 

영화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불다'(1979)

이 흥행의 결과로 범죄 미스터리 영화인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원작을 토대로 한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도 대히트를 기록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카도카와 영화는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이와 관련하여 카도카와 서점의 책도 영화와의 시너지 효과로 많이 팔렸다. 또 이 카도카와 영화의 큰 성공을 본 일본의 추리 작가, SF 작가들은 카도카와 서점을 의지해 자신의 작품을 ‘카도카와 문고’에서 잇달아 간행 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행보였다. 이처럼 카도카와 하루키의 영화와 서적을 동시에 팔아내는 방법은 ‘카도카와 상법’, ‘미디어 믹스’라고 불렸고 언론들이 앞다투어 출판 업계의 카리스마 경영자로 추앙했다. 

영화 '전국자위대'(1979)

▲히트 메이커 혹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카도카와 하루키가 제작하는 영화들은 성공을 거뒀다. 1979년 제작한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불다’(悪魔が来りて笛を吹く)와 1981년작 ‘마계전생’(魔界転生)의 경우 도에이(東映)의 제작으로 나갔지만 실상은 카도카와 하루키의 기획과 협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이 같은 전략은 당시 도에이의 사장이었던 ‘오카다 시게루’(岡田茂)가 기획력이 뛰어난 카도카와 하루키를 프로듀서로 등용한 결과이다. 

‘마계전생’은 ‘사무라이 환생’(Samurai Reincarnation)이라는 의미의 영어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81년 일본의 다크 판타지 영화로 오카다 시게루가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인터뷰를 통해 “카도카와 하루키씨는 영화 프로듀서가 아니라 이벤트 가게”라고 평가할 만큼 흥행에도 성공했다. 후카사쿠 긴지(深作欣二)는 ‘의리 없는 전쟁’(仁義なき戦い)으로 명성을 얻은 감독으로 이 영화는 향후 침체되어 있던 도에이교토촬영소(東映京都撮影所)의 공백기를 완전히 메워준 작품이다. 

영화 '부활의 날'(1980)

이 영화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시대인 1638년,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을 배경으로 권력에 눈먼 인간을 이용해 환생하려는 마계의 영웅 무리를 용기백배의 정의로운 사무라이가 막아 선다는SF, 액션, 판타지물이다. 야마다 후타로(山田風太郎)의 기상천외한 SF소설을 원작으로, 카도카와 하루키는 ‘대담한 시대극 액션을 만드는 것’을 기획의도로 했다. 

카도카와 하루키의 성공 요인은 공개 오디션으로 캐스팅 시스템을 구축하여 배우들의 개런티를 대폭 줄인 반면 실 제작비에 올인하여 고 퀄리티의 영화를 만들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경쟁하는 전략 때문이었다. 1979년 제작되어 공전의 인기를 얻은 ‘전국자위대’ (戦国自衛隊)가 그 예이며 히트작인 ‘세일러복과 기관총’(セーラー服と機関銃, 1981) 역시 카도카와 계열의 대표영화 중 하나로 손꼽고 있다.

영화 '세일러복과 기관총'(1981) 

‘전국자위대’의 경우 할리우드 영화 ‘파이널 카운트다운’(Final Countdown)보다 1년이나 앞선 타임슬립 영화의 선구자적 작품이고 ‘세일러복과 기관총’의 경우 야쿠시마루 히로코(薬師丸ひろ子)를 일약 스타로 만들고 주제가까지 대히트하며 1위 영화로 단숨에 등극하였다. 그러나 카도카와 하루키가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명 ‘카도카와 영화’(角川映画)는 지명도가 올라 일본 영화계에 널리 정착해 갔지만 제작 10년째를 맞이한 1980년대 후반 이후 서서히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영화 ‘부활의 날’(復活の日, 1980)로 보는 견해가 많다. 1980년대를 이야기 하면서 그것도 1980년에 제작된 영화를 언급하는 것이 의아할 지 모르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일본침몰’로 유명한 SF 작가 ‘고마츠 사쿄’(小松左京) 원작의 이 영화는 원작자가 일본의 기술로는 도저히 찍을 수 없다는 쓴 소리까지 한 작품이다. 인류가 멸망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이니만큼 천문학적 제작비가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24억엔(지금까지도 일본 역대 2위)의 제작비가 투입되었고 ‘배틀 로얄’(Battle Royal)의 후카사쿠 킨지(深作欣二)가 감독하였는데 할리웃의 배우들을 대거 투입하여 관객들조차 일본영화인지 할리우드영화인지 헷갈려 했다. 로버트 본(Robert Vaughn), 글렌 포드(Glenn Ford), 조지 케네디(George Kennedy),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 등 호화캐스팅을 자랑하였다. 

200일간의 남극 로케이션(기네스북 등재)까지 감행하는 등 숱한 기록들을 남겼는데 결국 24억엔을 투입하여 고스란히 ‘24억엔’이 들어와 손해는 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익을 낸 것도 아닌 영화가 되었다. 카도카와 히로키는 이후 이러한 영화들을 양산해 내면서 수익성 악화를 불러 일으킨다. 설상가상으로 민방의 후지TV가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면서 카도카와의 주식을 대량 매입하는 등의 견제까지 받으며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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