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미국리포트/ ‘도산’이 지금 살아 있었으면
생생 미국리포트/ ‘도산’이 지금 살아 있었으면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3.12.27 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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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시대, 안창호 선생에게 길을 묻다
도산 안창호 선생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내년 총선을 앞두고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이곳 캘리포니아의 한인 사회도 극심한 분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재외국민투표선거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특히 연말연시를 맞아 여러 모임들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우후죽순격으로 열리고 있다. 사실 교포사회에서 한국의 정치를 끌어들여 분열하는 것도 모자라 내년에는 미국 대선까지 겹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위안을 주는 것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하 안창호 선생)에 대한 기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도산의 4대 정신은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으로 대표 된다. 그러나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정직(正直)과 통합(統合)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도산 선생은 한국인들의 거짓과 부정이 나라를 망국의 길로 몰고 왔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최고령 철학자 김형석(103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2월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분노와 혐오의 정서를 극복할 해법으로 ‘안창호 리더십’을 제시한 바 있다.

미주 도산기념관 설립을 위한 정책 토론회 참석자들

▲파차파 캠프(Pachappa Camp)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9일 출생해 1938년 3월10일에 생을 마감한 글로벌 교육개혁운동가이면서 ‘민족 개조론’을 외친 애국 계몽운동가였다. 한국의 경우 그를 기린 ‘도산공원’이 있지만 그저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 혹은 도로명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직접 방문하고 나서야 안창호 선생을 기념하는 곳임을 실감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무치게 사랑했던 조국보다 유학하며 살면서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라고 역설하던 이곳 미국에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수년 전 켄 쿨리(KEN COOLEY, 당시 법사위원장, 민주당)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이 그의 이력을 동료 의원들에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차근차근 소개한 적도 있다. 캘리포니아의 리버사이드(Riverside)시는 동상을 건립했고, 메인 고속도로의 이름까지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Dosan Ahn Chang Ho Memorial Interchange)라고 개명했을 정도이며 그의 이름을 딴 학교와 비록 철거 뒤 자리를 옮기고 있지만 ‘도산 안창호 우체국’도 있다. 

리버사이드는 100년 전 한인들의 중심지 같은 곳이었고, 미국 내 도산 프로젝트인 파차파 캠프를 건설한 곳이기도 하다. 파차파 캠프는 미국 최초로 한인 동네(타운)가 생긴 곳이다. 1908년 뉴욕의 산본 보험회사가 제작한 지도에 파차파 캠프를 ‘한인 마을’ (Korean Settlement)로 표기하고 있으며 1910년 10월 5일자 신한민보에는 ‘미국에서 최초로 생긴 한인 마을’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고 발상지이기도 했다. 1905년 공립협회가 리버사이드 한인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1906년에는 신민회가 발기되었다. 

또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최초로 설립되었으며 북미총회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안창호 선생은 이곳 파차파 캠프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험하였다. 대의원 제도를 도입하여 민주 절차에 따라 운영하였고 그의 평전에 등장하는 ‘이상촌 건립’에 관한 실험을 했으며 남녀평등이 실현된 곳이기도 했다. 그러한 까닭에 지금 이곳 캘리포니아에 부는 ‘안창호 열풍’은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니다. 

전미 최초 코리아타운이었던 파참파 캠프의 초기 한인들

▲애기애타(愛己愛他)
안창호 선생의 강연과 설교를 직접 듣고 인생이 변화했다고 밝힌 김형석 명예교수는 “이제 한국 사회는 권력국가에서 법치국가를 지나 질서 국가로 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직, 정의, 자유, 그리고 인간애와 같은 사회 가치를 적극 이어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안창호 선생은 무실역행(務實力行), 충의용감(忠義勇敢), 애기애타(愛己愛他)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는데 사람의 인격이 건강해져야 국가와 민족이 발전한다는 이념을 담아내고 있다. 그중 지금 이 세대에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는 바로 ‘애기’(愛己)와 ‘애타’(愛他)일 것이다. 쉽게 풀어 요약하자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하고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혐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 남을 사랑(愛他)하기에 앞서 ‘애기(愛己)’, 즉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인데 질식할 것만 같은 경쟁 사회의 현실을 통해 스스로 상처받고 소외된 현대인들이 그 표출을 타인에게 배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차별과 혐오를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안창호 선생은 이를 위해서 ‘덕체지’(德體知)를 갖추기 위한 수련과 봉사를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애기인’(愛己人)이 되며 이들이 많아 질수록 분노와 혐오의 정서 역시 사라져 갈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아마도 안창호 선생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 것이 먼저이고 갈등이 폭발하여 나눔과 배려의 삶이 사라져가는 메마른 한인 사회를 목격하면서 나라와 가정을 세우려면 먼저 인격을 바로 하고 상호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이야기하였다. 유학을 왔지만 한인들의 무지와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미국인들에게 비난 받고 차별받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학업까지 포기하고 정신적 각성과 계몽운동을 펼쳐 나갔다. 

안창호 선생은 ‘한인들의 행동을 바르게 해서 커뮤니티의 모범이 될 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이 있다’라고 보았으며 더 나아가 낮은 시민의식으로 서로 헐뜯고 살지 않으며 미국 시민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생활의 모범을 주장하였다. 교민사회의 대중적 지도자이면서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김이 우선이었던 그였기에 자기희생이 가능했고 때문에 그의 ‘애기애타’ 정신은 오늘날까지 더욱 빛나고 있다. 

‘무실역행’을 통해 실제에 힘쓰고 온 힘을 다해 행하되 이론보다는 행동하고 실천하여 내실을 다졌기에 가능했다. 아울러 ‘충의용감’, 즉 충성과 절의를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자고 했다. 개인의 당리나 사익보다 공동체 이익을 우선으로 참되고 성실하게 살자는 태도야말로 요즘 같은 분열의 시대에 ‘통합의 리더십’으로 다가오기에 국가별, 지역별, 연령별, 성별 갈등의 골을 넘어설 핵심인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기애타'

▲거짓말, 거짓 행실, 입
사람의 인격이 건강해지면 국가도 건강해질 것이라는 선생의 말씀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는 우리 민족이 쇠퇴하여 옛 문화와 역량을 잃고 반만년 계승한 국맥(國脈)까지 끊게 한 원인을 ‘민족성의 타락’에서 찾아내려고 했다. 그것은 곧 ‘거짓말’과 ‘거짓 행실’ 그리고 ‘입’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우리 민족을 쇠퇴케 하고 망국 국민의 수치를 받게 하였다고 보았다. 부모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고 임기웅변을 잘하는 사람을 가리켜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병폐라고 봤다.

이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개탄하였다. 남의 말은 우선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하게 여겨지고 이렇게 서로를 의심하게 되니 단결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민족 자체 내에 ‘상호신용’(相互信用)이 없으니 국제적으로 신용을 바랄 수 없고 민족의 자존(自存)을 보존할 수 없다며 “이러한 것들이 내 나라를 죽인 원수”라고 일갈했다. 여기에 더 해 민족성의 타락 원인으로 ‘입’을 꼽았다. 남의 비판을 잘하고 ‘공담공론’(空談空論)이라 하여 빈말로만 떠들고 실천, 실행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대안 없이 남을 비판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현 정치권이 겪고 있는 진통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역의 일꾼이라는 국회의원을 뽑아 놓고는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안창호 선생은 이러한 폐해를 지적하면서 공론가의 특징을 ‘남에게 책임을 밀고 제 잘못은 가리우며 남에게는 잘하라고 요구한다’고 정의하였다.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꾸며대면서까지 자기 합리화하고 남의 잘못은 책망한다는 점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한마디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이 만연한 요즘 정치권에 던지는 메시지 같다. 따라서 안창호 선생은 누구를 원망하고 남탓만 하기보다는 먼저 ‘내 탓’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며 책임 전가야말로 민족의 분열을 초래하는바 그 대책은 ‘무실역행’밖에 없다고 보았다.

상해 임시정부를 방문한 도산 안창호 선생

▲한 국회의원의 노력
필자가 특정인의 이름을 거론한다고 하여 이것을 정치적 의도로 읽어서는 결코 안 된다. 건국 이후 국회가 개원한 이래 기승전(起承轉) ‘안창호 선생’과 관련한 활동을 한 유일무이한 국회의원(배현진)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LA 흥사단’의 미국 내 사적지 지정을 위한 정부 대응 촉구 결의안을 대표 발의한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기념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지난 2월 미주도산기념관 설립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개최한 데 이어 지난 8월 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시에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건립 22주년 기념식에 참석, 지원하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카탈리나 흥사단 단소를 대한민국 정부가 구입하도록 295만 달러의 정부예산을 투입 시켰으며 이 노력의 결과로 지난 3월 미국의 사적지로 지정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850만 달러를 유치하여 ‘한미유산재단’을 미국에 설립하는데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배 의원은 앞서 LA 흥사단 본부가 철거 위기에 놓이자 ‘LA 흥사단 사적지 보호 촉구 결의안’을 대표로 발의해 국회에서 통과시킨 바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으로서 국가보훈처가 흥사단 본부를 매입할 수 있도록 힘쓴 것이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으로서 ‘국가유산기본법’을 발의했는데 지난 4월 국회를 통과 했다. 문화재라는 개념을 국가 유산으로 개편하고 문화재의 분류체계도 국제기준에 맞춰 문화유산·자연유산·무형유산 등으로 전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과정은 미주도산기념관 설립에 대한 국내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취지임과 동시에 동포사회의 자존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도산기념관은 2025년 8월 착공이 목표로, 도산 선생의 서거(1938년) 90주년에 맞춰 완공될 전망이며 리버사이드시가 지난 5월 3만 9669㎡(약 1만 2000평)의 부지를 제공해 본격 시작됐다. 한국 정부가 관심을 갖게 되면 미국 정부가 설득된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카타리나 흥사단 단소와 멤버들(미주 흥사단 기록사진)

▲흥사단(興士團, Young Korean Academy)
안창호 선생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흥사단’이다. 안창호 선생은 ‘독립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치 아래 1913년에 흥사단을 설립했다. 1907년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은 1911년 일본제국의 탄압으로 해체되었으나 안창호 선생이 샌프랜시스코에 부활시킨 것이다. 미국 흥사단 본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민족 교육과 임시정부 자금 지원에 큰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10주년’이라는 업력을 갖고 있는 한인커뮤니티의 자존심과 같은 단체다. 안창호 선생이 직접 디자인한 깃발의 문양에는 ‘기러기’가 등장한다. 필자가 흥사단을 방문했을 때 “왜 기러기일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이에 대한 흥사단 측의 설명은 ‘기러기’가 반드시 떼를 지어 날아가므로 단결과 협동의 뜻을 나타낸다고 하며 또한 질서와 방향 감각이 뛰어난 특성을 배우자는 뜻도 있다고 한다. 필자가 짧은 시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흥사단은 업력에도 불구하고 안창호 선생의 설립 정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정신이란 정직과 통합을 강조한 ‘안창호 리더십’의 실천이다. 필자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거듭 곱씹게 만들었다. 회원이 되는 과정도 지난할 정도로 준비기간이 길고 특정 정당, 특정 종교를 드러낼 수도 없다. 

안창호 선생이 흥사단우를 고르는 표준이 두가지였다고 한다. 첫째는 거짓이 없는 사람, 둘째는 조화성(調和性)있는 사람이다. 단체 생활을 가능ㅋ케 하는 성질이다. 또한 조직 내에서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윤리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 단원이 되고 부부 동반 모임을 갖는다. 예비 단원에서 정식단원이 되기 위한 과정 가운데 끊임없이 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흥사단의 창립 배경인 ‘인재 양성’에 부합한 ‘단우’(회원)들을 길러내고 있기 때문에 영문 표기명이 ‘Young Korean Academy’로 풀이되었다. 

청년 양성을 위한 ‘학생 아카데미’라는 하부 조직도 존재하고 청소년들을 위한 보이스카웃, 걸스카웃 활동도 활발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흥사단의 기본 이념과 존재 이유에 대해 자연스럽게 단우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이들은 민족과 국가, 사회에 보탬에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곳곳에서 건강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끝으로 이들이 융화되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안창호 선생의 ‘대공주의’(大公主義) 사상의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공통된 목표를 위해 진영을 넘어 통합하자는 비전이다. 이러한 정신과 활동이 요즘 시대에 공감을 얻어나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무엇보다 안창호 선생은 인격적으로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정적이나 도덕성, 사생활, 인격 등에 대해서는 누구의 비판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대공주의’ 사상이야 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 실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사상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정당한 ‘주의’(主義), 이에 걸맞는 합리적 조직, 충분한 재정의 3합(三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흥사단을 통해 누군가는 이 일을 반드시 이룰 것 같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는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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