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 붕괴'의 상징적 기업인 떠나다
‘버블 붕괴'의 상징적 기업인 떠나다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4.02.20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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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소 창업자 야노 히로다케(矢野博丈) 전 다이소산업 회장. <photo=NHK>

일본 100엔숍의 선구자인 다이소 창업자 야노 히로다케(矢野博丈) 전 다이소산업 회장이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NHK 등 일본 언론들은 “야노 전 회장이 지난 12일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2월 19일 전했다. 

1985년 100엔솝 첫 등장...버블 붕괴의 상징
일본 최초로 100엔 균일 점포가 등장한 건 1985년이다. 아이치현 가스가이(春日井)시에서다. 100엔숍이라고 이름 붙인 이 점포는 불황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후 일본은 1990년대 초반 버블 붕괴를 맞으면서 헤이세이 불황(平成不況)이라는 이른바 ‘잃어 버린 10년’의 터널 속으로 빠져 들었다.

구체적으로 버블 붕괴는 주식과 토지의 거품이 빠진 걸 말한다. 이에 일본은 거품 경제의 파국을 맞으며 긴 디플레이션 불황에 빠져 들었다.

그러면서 시장의 소비 패턴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가 저하되고, 저렴한 상품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한 아이템이 100엔숍이었다. 

1943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야노 히로다케의 본명은 쿠리하라 고로(栗原五郎). 아버지는 의사였다. 전쟁 중에 중국 병원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일본이 패전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히로시마현으로 돌아왔다.

의사 집안치고는 형편이 좋지 않았다. 야노 히로다케는 “의사의 가정이라면 부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버지는 가난한 환자에겐 치료비를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며 “덕분에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고 말했다. (2018년 4월 시사매체 다이아몬드와의 인터뷰)

야노 히로다케는 고교 시절 복싱에 심취했다. 고3 때인 1964년에는 도쿄 올림픽 밴텀급 예비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복싱 탓에 공부와는 멀어졌다고 한다. 대학은 쥬오대(中央大) 토목공학과 야간부로 진학했다.

이름과 성까지 바꾼 다이소산업 창업자
결혼 후 처가에서 경영하던 양어장 사업을 ‘말아먹은’ 야노 히로다케는 도쿄로 야반도주를 하고 말았다. 백과사전 판매원으로 뛰었지만 영업사원 30명 중 실적은 꼴찌. “운은 없지만 능력은 있다”고 믿었던 야노 히로다케가 야노상점(矢野商店)이라는 이동 트럭 잡화점을 연 것은 1972년이다. 

야노(矢野)는 아내의 성이다. 그는 장사를 위해 쿠리하라(栗原)라는 성을 야노로 바꿔 버렸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뭔가 스스로 장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쿠리하라’보다는 두 음절의 심플한 야노 쪽이 기억하기 쉽고, 친해지기 쉽다고 생각했다.”

다이소(大創)로 회사 이름을 지은 이유
아버지 또한 그의 그런 결정을 존중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술 더 떴다. 이름까지 바꿔 버렸다. 그는 “나중에 나는 ‘고로’라는 이름도 바꾸어 버렸다”며 “‘고로 짱’는 경영자로서의 위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명가가 히로다케(博丈)로 지어 주었다”고 했다.

야노상점을 운영하던 중, ‘싼 게 비지떡’이라는 불만이 들려왔다. 체계화된 회사 시스템이 필요했다. 야노 히로다케는 1977년 가게를 법인화했다. 그럴듯한 회사 이름도 필요했다.

100엔짜리 장사로는 대기업이 된다는 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부부의 꿈은 컸다. ‘연매출 1억 회사를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언젠가 큰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담아 대창(大創)이라고 지었다. 대창을 일본어로 읽으면 '다이소'다.

1987년 12월 100엔숍 매장을 본격적으로 개시한 다이소는 일본 전역에 가게들이 세워졌고  2000년대 들어선 한국을 비롯한 세계로 진출했다. 일본 다이소와 한국 다이소는 엄연히 구분된다. 

일본이 한국의 아성산업에 지분 34%를 투자하는 방식이었는데, 2023년 12월 한국의 아성산업이 일본 본사 지분을 모두 되사들이면서 한국 다이소는 지금 100% 한국 기업이 되었다.

야노 히로다케는 2018년 3월, 사장직을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회장직으로 물러났다. 장남이 경영을 이어받지 않은 이유는 대학 의대 교수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100엔숍이 등장한지 40년 가까이 되고 가고 있다. 매장들도 변신을 꾀한지 오래다. 100엔 균일이라는 간판을 떼거나, ‘탈100엔’을 추구했다. 싼 값으로는 안된다며 300엔짜리 제품을 판매하고, 매장의 깔끔한 인상을 주는 등 신선함으로 승부했다.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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