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71) / 다큐의 급속한 발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71) / 다큐의 급속한 발전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3.11.06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일본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자료는 한국의 경우 많지 않다. 비단 텔레비전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만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고 극장에서 상영된 것까지 포함해서다. 한국의 경우 1995년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2’가 장편 다큐멘터리로서는 최초로 극장에서 개봉한 것으로 볼 때 영화와 달리 극장 상영용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경우 1957년부터 NHK에서 방송된 TV 다큐멘터리 시리즈 ‘일본의 본모습’(日本の素顔)이 전후 사회에서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장을 열었다. 초기 제작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창조하고 당시의 제작 현장에서의 시행착오를 극복하였으며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는 한편 인터뷰를 쌓아나가면서 표현 형식의 독자성을 밝혀나갔는지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NHK에서 방송된 TV 다큐멘터리 시리즈 ‘일본의 본모습’(日本の素顔)

이 기록을 토대로 마루야마 토모미(丸山友美)의 저서 ‘일본의 초기 다큐멘터리사’(日本の初期テレビドキュメンタリー史)라는 기념비적인 책이 발간되어 있을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이들은 ‘가두녹음’(街頭録音), 요즘으로 말하면 ‘현장 동시녹음’을 통해 기술을 쌓아갔으며 1960년대 대학가 시위 등 여러 혼란 상황이 다큐멘터리로 재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시절을 거쳐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 일본의 다큐멘터리가 급속도로 발전했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이었다.

참고로 일본 다큐멘터리사에서 민방의 경우에는 니혼TV의 ‘NNN 다큐멘트’같은 프로그램이 1970년도에 방송을 시작했는데 일요일 심야 시간대인 12시 15분에 편성을 했다. 원래 민방이라는 것이 광고를 많이 유치할수록 좋은 시간대에 편성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후지 TV의 ‘FNN 다큐멘터리’는 1990년도에 신설이 됐는데 역시 수요일 심야 시간대에 편성되었고 TV 아사히는 오전 7시에 방영하였다. 

TV 도쿄의 ‘인간극장’은 의외로 프라임 타임에 방송되고 있으나 민방 중 가장 시청률과 점유율이 낮다 보니 시간대별 시청률 차이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를 계속 만드는 이유는 계열사에 있는 PD들을 육성하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이면서 지방 계열사에서 만들기 때문에 지방색이 강한 아이템에 이따금 일본의 현실을 예리하게 밝힌 사회성 있는 소재들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호스티스가 말하는 일본 전후사'

▲이마무라 쇼헤이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은 사실 알고 보면 다큐멘터리의 선구자이다. 1968년작 ‘신들의 깊은 욕망’(神の深き欲望)과 1979년 ‘복수는 나의 것’(復讐するは我にあり)사이에 집중적으로 7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 7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고도성장과 전쟁 특수, 평화, 안보로 점철된 전후 일본을 해부하였다. 

덧붙여 미화된 전후 풍경에 안주하여 역사를 망각한 일본인의 자기반성적 시각을 요구하세 되는데 그는 이를 ‘기민’(棄民, きみん)시리즈라고 불렀다. ‘기민’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국가가 버린 국민을 뜻한다.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이거나 인권과는 거리가 먼 부류의 집단을 말한다. ‘재일교포’의 차별 이야기도 소재로 삼을 만큼 이마무라 쇼헤이는 막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고도성장을 하고 있는 전후 일본의 속살을 관전사(貫戰史)적 시각으로 촘촘하게 들여다본다. ‘호스티스가 말하는 일본 전후사’(にっぽん戰後史 マダムおんぼろの生活, 1970)에서부터 ‘무호마츠, 고향으로 돌아가다’(無法松故鄕に歸る, 1973)까지 이마무라 쇼헤이의 다큐멘터리는 공통적으로 기민(棄民)의 목소리들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냉전 시대 아시아의 관점에서 국가를 해부하기 위해 기민의 월경(越境)상태를 초국가적 차원으로 상정했지만 오늘날 ‘감성팔이’로 비난 받는 극대화나 과장, 재현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특히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으로 귀환하지 않은 군인들을 다룬 ‘미귀환 병사를 쫓아서’(未帰還兵を追って, 1971) 연작이나 같은 맥락의 ‘무호마츠, 고향으로 돌아가다’, 19세기 후반에 해외에서 매춘을 하던 일본인 여성들을 다룬 ‘가라유키상’(唐行きさん, 1973)등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국가에 의해 버려진 국내외 국민이 현재의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과거 전쟁 책임에 대해 국가가 진심으로 반성하는지 등을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다큐멘터리는 일본 국경 밖에서 관찰한 기민의 복잡한 역사와 그에 따른 다양한 월경 사례들을 통해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기민 다큐멘터리는 공식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를 병치하고,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양편을 충돌시키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내레이션과 달리 기민에 주목하지 않는 카메라의 시선과 영화 이미지가 그 특징이다. 또한 기민 다큐멘터리는 인물 개인에 주목하기보다는 이미지와 몽타주 그리고 사운드를 통해 의미를 전달한다.

쓰치모토 노리아키 감독의 특별전 포스터

▲쓰치모토 노리아키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극영화로 이야기하기 힘든 사회적인 이슈를 포착해 보다 많은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명한 일본영화역사가인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는 그의 저서에서 쓰치모토 노리아키(土本典昭)와 오가와 신스케(小川紳介)를 1970년대 일본 다큐멘터리 발전의 중심에 선 인물들로 평가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 두 사람을 다루는데 있어서 공감하면서 먼저 ‘쓰치모토 노리아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기 이전 과격한 인생을 살았다.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재학 중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되었다. 재학 중 일본 공산당에 입당하고 1952년 야마무라 공작대(山村工作隊) 활동으로 체포된다. 야마무라 공작대에서는 그는 코가와치 댐 파괴를 목표로 한 ‘코가와치 공작대’(小河内工作隊)에 소속되어 있기도 했다. 1956년에 ‘이와나미영화제작소’(岩波映画製作所)에 입사하게 된 것이 다큐멘터리 입문의 계기다. 

그러나 더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하기 위해 1년 후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1963년 국철(国鉄)의 PR 영화 ‘어떤 기관사’(ある機関助士)로 감독 데뷔한다. 이 시절 구로키 카즈오(黒木和雄), 오가와 신스케 등과 ‘푸른 모임’(青の会)을 결성하기도 했다. 구로키 카즈오는 지난 연재에서 다큐멘터리에서 독립영화로 건너가 성공을 거둔 감독으로 언급한 바 있다. 

미나마타 병을 연구한 과학 영화 3부작 상영 포스터

쓰치모토 노리아키의 최대 업적은 1965년에 처음으로 방문한 ‘미나마타시’(水俣市)에서 그 유명한 ‘미나마타병’(水俣病) 환자들을 만나보고 큰 충격을 받은 데서 비롯된다. 미나마타병은 수은중독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1956년 구마모토현(熊本県) 미나마타시의 어민들이 메탈수은 성분이 있는 조개와 어류를 먹고 집단 발병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는 ‘유학생 주아 스이 린’(留学生チュアスイリン, 1964), ‘다큐멘트 노상’(ドキュメント 路上, 1969), ‘파르티잔(빨치산) 전사’(パルチザン前史, 1969년) 등을 거쳐 1971년 ‘미나마타 - 환자와 그 세계’(水俣 - 患者さんとその世界) 발표 이후로는 미나마타병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 총 17개의 연작을 제작했다. 

그 중 ‘유학생 주아 스이 린’은 말레이사에서 지바(千葉)대학에 유학 온 한 청년이 정치적 이유로 대학 당국으로 박해받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 주목받았고 ‘파르티잔 전사’의 경우에는 교토대학의 학원 투쟁에 대해서 다루었다. 처음 그는 학생운동 출신다운 행보를 보여주었지만 이후 평생 과제는 ‘미나마타병’이었다. 공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주범인 짓소 주식회사(신일본 질소 주식회사(新日本窒素株式会社, 현재는 JNC로 사명 변경함, 줄여서 짓소(ちっそ, Chisso)의 한 주주총회에서의 규탄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이 문제를 둘러싼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 했다. 그는 이 촬영을 위해 미나마타에 직접 집을 얻어 주민들과 살면서 병을 연구하는 한편 과학 영화 3부작 제작까지 이른다. 

과학 영화 3부작이란 다름아닌, ‘미나마타 - 환자와 그 세계’(水俣 - 患者さんとその世界, 1971), ‘미나마타 봉기 – 일생을 묻는 사람들’(水俣一揆 - 一生を問う人々, 1973), ‘미나마타 리포트 – 실록 공조위’(水俣レポートI 実録公調委, 1973)다. 미나마타병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계속 이어져 후지와라 토시(藤原敏史)감독에 의해 지난 2004년 미나마타를 방문하고 지난 30년간의 투쟁을 되돌아 보는 회고록 형식의 다큐인 ‘쓰치모토 노리야키의 다큐멘터리와 삶’(映画は生き物の記録である 土本典昭の)으로 이어진다. 뭐니뭐니 해도 17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은 ‘시라누이 바다’(不知火海, 1975)라고 할 수 있으며 환자들의 일상생활 이야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근대 100년에 대한 강한 비평적 행위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농촌에 정착하여 농민의 시각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오가와 신스케 감독

▲오가와 신스케
오가와 신스케는 지역의 현안들을 발굴 해내어 다큐멘터리로 만든 감독이었다. 1960년 이와나미 제작소(岩波映画製作所)의 조감독으로 출발한 그는 홍보영화만 만들던 관행을 벗어나기 위해 독립영화 감독이 된 후 주로 1960~70년대 일본의 급진적 학원 투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6년에 발표한 ‘청년의 바다 – 네 명의 통신교육생’(靑年の海 - 四人の通信敎育生たち)을 데뷔작으로, ‘압살의 숲-다카사키 경제대학의 투쟁기록’(圧殺の森 高崎経済大学闘争の記録), ‘일본해방전선: 나리타의 여름’(日本開放戦線 三里塚の夏, 1968)등을 잇따라 내놓는다. 

이후로는 나리타(成田)국제공항 건설에 따른 토지 수용에 반발하는 ‘산리즈카’(三里塚) 주민들의 지역문제와 투쟁을 다루었다. 이후 그 역시 제작진과 함께 현지에 정착하여 1968년에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日本解放戦線 三里塚の夏)을 내놓는다. 그는 제3자의 입장에서 촬영하는 방식이 아니라 카메라의 위치를 분명하게 농민 쪽으로 두고 대치한 기동대를 정면에서 바라봤는데 이런 방식으로 1973년까지 연작 6편을 촬영했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日本解放戦線 三里塚, 1970), ‘산리즈카 강제측량 저지 투쟁’(三里塚 第三次強制測量阻止斗争, 1970), ‘산리즈카 제2요새의 농민들’(三里塚 第二砦の人々, 1971) 등을 통해 나리타공항 건설 반대 투쟁으로 상징되던 1960~70년대 일본의 진보적 다큐멘터리 영화 운동을 주도했다.

오가와 신스케의 다큐멘터리 ‘산리즈카 헤타부락’(1973)

처음에는 적을 향한 분노의 목소리로 가득했던 다큐멘터리였지만 편수가 거듭될수록 안정된 시각에서 농촌공동체를 이해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이해하려는 시각을 명확히 드러냈다. ‘산리즈카 헤타부락’(三里塚 辺田部落, 1973)에서는 농토와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체험하는 역사에 초점을 맞추며 민속학적인 시점을 가미했다. 1982년에는 ‘일본국 후루야시키 마을’(ニッポン国 古屋敷村, A Japanese Village)을 통해 1984년 베를린국제영화제 뉴시네마 포럼 부문 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미 ‘산리즈카 헤타 부락’에서부터 민속학적 시각에 눈을 뜬 그는 정치 투쟁에 대해 다루기보다는 가장 유토피아적 공동체는 ‘농촌 공동체’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농촌 생활을 긍정하는 측면을 담아냈다. 실제로 야마가타현 (山形県)의 농촌에 정착하여 살기도 했던 

그는 도시 출신 평론가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1989년에는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山形国際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祭)의 창설에 참가하여 지역발전은 물론 일본 다큐멘터리 발전에도 크게 기여 하였다. 1992년 56세라는 젊은 나이로 직장암에 걸려 사망한 그는 일본적 이데올로기로서 농촌을 이상화한 영화인이다. 1993년,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오가와 신스케상’(小川紳介賞)이 제정되었다. 

그는 또한 제한된 시간 안에 제작되어 일회적인 방영으로 끝나는 TV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작가적’ 사명감을 지닌 다큐멘터리 영화감독들이 만드는 영화들은 일정한 ‘자기검열’ 과정을 거치는 TV 저널리즘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 진실에 접근해 갈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바버라 해머(Barbara Hammer)는 다큐멘터리 ‘헌신’(Devotion, 2000)을 통해 오가와 신스케가 창립했지만 그의 사망으로 인해 1994년 해체한 ‘오가와 프로덕션’(小川プロ)의 활동과 영화사적 업적을 다뤘다. 츠치모토 노리아키와 오가와 신스케는 일본 다큐멘터리계를 대표하는 거장 감독으로 꼽히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끌어 낸 선구자로 오늘날 평가 받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