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경제학(68)/ 닛카쓰의 청춘영화
이훈구의, 일본영화경제학(68)/ 닛카쓰의 청춘영화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3.07.31 1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키요시 구미코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일본영화역사가의 입장에서 최근 한국 영화의 부진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연구를 거듭할수록 일본영화의 끈질긴 생존력이 부럽기만 하다. 사실 한국의 영화 제작사들 중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전통의 영화사는 ‘동아수출공사’(東亞輸出公司)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67년부터 2011년까지 총 85편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최근에는 2천평 규모의 영상 제작 실내 스튜디오인 넥스트스튜디오 인천’을 개관하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순수 영화 제작사로서 100편의 필모그래피를 채워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실 영화 제작사가 살아남으려면 자체 제작뿐 아니라 외화 수입과 부대사업 등 다양한 수익사업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자체 제작 영화들이 흥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그 회사만의 ‘색깔’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사의 이름만 듣고도 장르가 떠오르는 식이다.

나카하라 슌 감독

▲와(和) 문화와 장인정신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창립 초기부터 이러한 기조를 지켜왔다. 쇼치쿠가 1895년, 닛카쓰가 1912년에 설립되어 100년을 훌쩍 넘긴 업력을 갖고 있지만 쇠퇴와 정체를 거듭하고 진부한 느낌을 줄지라도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장인정신’이 유지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이러한 기업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일본은 창업 1,000년을 넘긴 회사가 21개가 되며 100년을 넘는 기업 또한 전국에 21,066개가 넘는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와’(和)라는 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한자를 풀이하자면 ‘화할 화’로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이다. 일본 음식을 화(和)식, 일본 옷을 화(和)복, 일본 과자를 화(和)과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때문에 우리가 흔히 조폭영화에서 자주 쓰는 표현인 ‘나와바리’(縄張り)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상호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바 할 일을 하는 것을 ‘평화’라고 보았다. 

게다가 일본 역시 계급사회였다. 남의 영역과 계급을 침범하는 일이 없었다. 각 지역의 ‘사무라이’(侍, さむらい)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에도시대 때는 거주 이전의 자유도 제한적이었다.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인 번(藩)을 벗어날 때도 허가를 받아야 했으니 자연스럽게 태어나고 자라난 곳에서 자리를 잡아야 했다. 

따라서 가문의 전통이 고스란히 이어져 ‘몇대째...’ 하는 자연스럽게 유산이 생겨났고 선대 때부터 단골이 생겨 오늘날에도 사이좋게 유무상통하며 운영되는 것이다. 이 전통은 영화계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스튜디오 체제가 흔들리고 영화의 제작, 배급, 흥행 시스템이 바뀌어도 자기 회사만의 고유한 색깔을 ‘프로그램 픽처’라는 형식을 빌어 유지하는 이유이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게 하는 비결이다.

이케다 도시하루 감독

▲재능있는 신인 감독의 발굴
1970년대 한때 최고 시장 점유율 40% 이상이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닛카쓰(日活)의 입장에서는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 장르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었다. 닛카쓰가 어떤 제작사인가? 과거 ‘타이요조쿠’(太陽族, 이하 태양족)영화 등 ‘청춘물’(靑春物)로 명성을 날렸던 제작사가 아니었던가? 따라서 그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 시기에 ‘로망 포르노’ 장르만 제작한 것이 아니고 청춘영화를 병행하여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이끌어 냈다. 

가네코 슈스케 감독

물론 몇몇 영화의 경우 ‘로망 포르노’ 장르의 제작사답게 섹스를 통한 성장기를 그려내기도 했지만 당대 정서를 반영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재능있는 신인감독들부터 기존의 감독들까지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무라카와 도오루(村川透)를 필두로 로망 포르노의 선구자였던 소네 주세이(曽根中生), 후지타 도시야(藤田敏八) 등 베테랑들로부터 이케다 토시하루(池田敏春), 나카하라 슌(中原俊), 구로사와 나오스케(黒澤直輔), 가네코 슈스케(金子修介)등 재능 있는 신인감독들에게 메가폰을 잡게 했다. 

구로사와 나오스케 감독

이중 나카하라 슌, 가네코 슈스케 등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감독으로 그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닛카쓰의 선구안이 적중했다. 나카하라 슌의 경우 ‘컬링 러브’(素敵な夜、ボクにください: Curling Love)가 지난 2007년 제3회 KBS 프리미어 페스티벌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다. 당시 KBS가 한국에 소개된 적이 없는 세계 각국의 영화들을 선별해 극장과 TV에 동시 상영하는 프로젝트였으며 ‘컬링 러브’도 그때 기획된 작품 중 하나다. 

영화 '컬링 러브' 스틸사진

한국 배우 김승우와 후키이시 카즈에(吹石一恵), 세키 메구미(関めぐみ)가 주연했으며 지금이야 한국에서도 ‘컬링’의 인지도가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만 인기 있던 스포츠였는데 작품성을 떠나 아기자기한 재미가 담긴 영화다. 가네코 슈스케 하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데 바로 ‘데스노트’(デスノート, 2006)이다. 일본 영화 역사상 최초로 전·후편 연속 공개로 기획되어 큰 흥행을 했으며 제25회 골든 글로스상(ゴールデングロス賞) 일본영화부문 우수 은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했으며 무엇보다도 ‘마쓰야마 켄이치’(松山ケンイチ)의 출세작으로 알려져 있다.

무라카와 도오루 감독

▲무라카와 도오루와 소네 주세이
무라카와 도오루 감독과 소네 주세이 감독은 로망포르노 영화의 필모그래피가 더 알려졌지만 나름 청춘영화 장르에서도 선전(善戰)한 감독들이었다. 먼저 무라카와 도오루 감독의 경우에는 닛카쓰를 퇴사하고 재입사하기를 반복했지만 그 이유가 ‘작품의 방향성에 대한 불일치’ 때문이었다고 한다. 오랜 조감독 생활을 보낸 탓도 있지만 에도전기(江戸前期)에 활약한 배우 ‘무라카와 소에이’(村川素英)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인물이다. 

1959년에 입사해 비로서 1972년 감독 데뷔작인 ‘하얀 손가락의 장난’(白い指の戯れ)을 통해 성공을 거뒀다. 한 소매치기 소녀가 섹스를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호평을 받은 이 영화는 사실, 로망 포르노와 청춘영화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 역시 그 이후로는 ‘관능 지대 슬픔의 여자 거리’(官能地帯 哀しみの女街, 1972) 같은 로망 포르노 계열의 영화들을 연출했다. 

영화 '하얀 손가락의 장난' 스틸사진 

그러나 그의 영화에 관한 평전이 나올 정도의 강렬함이 있었는데 타이틀에서 읽히듯 ‘하드보일드’(ハードボイルド)가 특징이었다. 불필요한 설명 없이 스피디 하면서 거친 터치로 사실만을 표현하고, 폭력·범죄·섹스 등에 대해 어떠한 감정 개입이나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한 냉정한 묘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소네 주세이의 3부작 시리즈물인 ‘오호!! 꽃의 응원단’(嗚呼!!花の応援団) 역시 대학 응원단원들의 혹독한 신입생 훈련과 순정을 유머러스하게 전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시리즈물은 아마존 프라임(prime video)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 요즈음 일본의 대학 응원단 문화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아 재미를 더해준다. 

후지타 도시야 감독

▲후지타 도시야 그리고 아키요시 구미코
이 시기 가장 인기 있는 청춘영화 감독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후지타 도시야’이다. 이 연재물 58회에 소개된바 있는 닛카쓰의 인기 있는 시리즈물이었던 ‘노라-네코로크’(野良猫ロック, Stray cat Rock, 1971-1972)로 반항적인 젊은이들의 작은 갱단(暴走集団)이 어른들이라는 권력에 대항해 가는 모습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함께 그려내 인기를 끈바 있었던 감독이다. 

‘노라-네코로크’하면 일본어의 영어 발음(Nora-neko rokku)그대로 쓴 제목이지만 ‘들고양이’ 혹은 ‘도둑고양이’ ‘롯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카지 메이코’(梶芽衣子)가 스타덤에 오르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카지 메이코와 계속 동행할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그 다음으로 아키요시 구미코(秋吉久美子)를 캐스팅하여 3부작 영화를 만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부장을 맡았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있는 그녀는 1977년에 이미 ‘한순간의 구미코’(つかのまの久美子, 青春出版社)라는 감성 에세이집을 내기도 했다. 

비록 주연은 ‘다카하시 요코’(高橋洋子)에게 넘어갔지만 1972년 소설가 모토 쿠키코(素九鬼子) 원작의 ‘여행의 무게’(旅の重さ)를 통해 데뷔했다. 1937명이 지원한 오디션에서 1, 2위를 기록했는데 사실 다카하시 요코가 지각을 해서 특별 오디션을 보기 전까지 주연은 ‘아키요시 구미코’였다. 마치 그녀의 책 제목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마침내 1973년 마츠모토 토시오(松本俊夫)감독의 ‘16세의 전쟁’(十六歳の戦争)에 주연으로 데뷔하지만 ‘장미의 행렬’(薔薇の葬列, 1969)이라는 강렬한 실험영화(물론 나중에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에 영향을 주었다)로 평단을 뒤흔들었던 인물이었던 만큼 이 영화도 난해함 때문에 1976년에야 지각개봉을 한다. 포크 가수 ‘시모다 이치로’(下田逸郎)와 함께 주연한 이 영화에서 아키요시 구미코는 시나리오에 누드 장면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감독이 납득시킨 후 그냥 연기를 했다고 한다.

아키요시 구미코의 리즈 시절.

후지타 도시야의 ‘아키요시 구미코 3부작’의 테마는 도시에 온 소녀가 고독 속에서 자아를 확립해 가는 과정을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이때 닛카쓰는 ‘로망 포르노’ 장르로 굳어져 가던 회사의 이미지를 의식한 듯 참신한 마케팅 전략으로 승부를 걸었는데 그게 성공했다. 후지타 도시야 콤비를 강조하고 ‘닛카쓰가요영화노선’의 제1부(日活歌謡映画路線の第1作), ‘닛카쓰 뉴청춘영화 3부작의 제1부’(日活ニュー青春映画3部作の第1作)등의 수식어를 사용하였다. 

영화 '주점의 빨간 등불'(1974)

영화 전문지인 ‘영화시보’(映画時報)가 그해 12월 호에 닛카쓰가 로망포르노 체제로 전환한 이후 최초로 제작한 일반영화라는 기사를 쓸 만큼 이슈가 되었다. 영화 ‘주점의 빨간 등불’(赤ちょうちん, 1974)이 바로 그것이다. 도쿄에서 조용히 동거하는 두 젊은 남녀가 서로의 마음이 엇갈린다거나 주위와의 관계에 익숙하지 않아 5번의 이사를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여성의 마음이 점점 더 아프게 되어간다는 이색적인 청춘영화다. 

이사를 한번씩 할 때마다 변화하는 여성의 심리묘사와 동거 남녀의 갈등을 그려내는 형식이었는데 남자 주인공이었던 ‘다카오카 겐지’(高岡健二)역시 작품의 인기로 3부작 중 2개의 작품에 출연하게 된다. 참고로 3부작의 경우 현재 ‘애플tv’(일본)에 런칭 되어 있다. 원래 ‘로망 포르노’ 컨셉으로 기획되다가 닛카쓰 전설의 제작자로서 태양족 청춘영화의 대부였던 ‘에모리 세이쥬로’(江守清樹郎)가 최고 고문으로 컴백 하면서 ‘닛카쓰가 로망 포르노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영화 '누이동생’ 스틸사진

두 번째 영화는 ‘누이동생’(妹, 1974)으로 부모를 여의고 학생들을 상대로 한 이사짐 센터를 운영하는 아키오(하야시 류조, 林隆三)에게 동거 상대와 헤어진 여동생 네리(아키요시 구미코)가 찾아오면서 일어나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그려냈다. 예고편에서 도쿄의 지하철 막차에서 내리며 바람 부는 쓸쓸한 거리와 어울리지 않게 청순하고 화사한 이미지로 공중전화를 거는 아키요키 구미코의 모습에서 이미 성공을 예감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버진 블루스'(1974)

세 번째 영화는 ‘버진 블루스’(バージンブルース, 1974)로 일종의 로드무비이다. 도쿄의 예비학교 여자 기숙사에 사는 하타 마미(아키요시 구미코)는 이웃 고바야시 치아키(시미즈 리에, 清水理絵)의 권유로 몇몇 기숙사 동료들과 슈퍼마켓에서 도둑질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발각되어 경찰에 쫓기게 된다. 그렇게 우연히 시작된 도피행각에서 1년 전 술자리에서 치아키가 알게 된 중년 남자 ‘히라타 요이치로’(나가타 히로유키, 長門裕之)와 만나게 되어 그녀는 본가인 ‘오카야마’ 현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해진다. 마미가 “자신은 정조 관념이 강하기 때문에 처녀성을 지키고 있다”고 말하여 요이치로에게 흥미를 유발한 까닭이다. 비록 망을 보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불안해 하던 마미는 결국 본가에도 그녀의 도둑질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요이치로와 동침(첫경험)을 한다. 

그리고 2주간의 동거가 시작되는데 어느 날 길에서 치아키가 연행되는 모습을 본 마미는 또다시 충격을 받아 요이치로에게 이별을 고하고 혼자 호텔 옆 바다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3부작 자체가 로망 포르노로 기획되었었던 작품이었지만 닛카쓰는 이걸 ‘청춘영화’로 재탄생 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당시 닛카쓰의 ‘로망 포르노’ 런칭의 기조를 반영하듯 ‘닛카쓰 청춘영화’들 역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영화들이 그 특징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