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70)/ 인디영화와 ATG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70)/ 인디영화와 ATG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3.10.1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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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의 영화 '하우스'(1977)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70년대 중반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배우들의 전속제가 소멸하고 말았는데 각 영화사들은 그때그때 캐스팅을 하여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각 영화사의 고유한 작풍이나 흐름 그리고 특징을 많이 잃어버린 결과가 나타난다. 그중 ATG(Art Theater Guild)의 예술영화와 인디영화 그리고 다음 회에 다룰 다큐멘터리 등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 시기, 각 영화사의 제작 편수가 줄어들고 전속제 폐지로 인한 문제가 점점 심화 되었다. 각 영화사에 채용되어 이른바 ‘도제’(徒弟)시스템으로 스탭과 배우들이 ‘어깨 넘어’ 영화를 배우면서 영화인들이 배출되던 기능이 상실되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이 기능을 대신하기 위한 영화 전문학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후 일본에는 4년제 대학으로 국립 도쿄 예술대학(東京藝術大学), 명문 사립인 니혼대학(日本大學)예술학부(藝術學部)와 오사카 예술대학(大阪芸術大学),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감독이 설립한 요코하마(橫浜)영화전문학원(현 일본영화학교), 일본영화대학교(JIMI: Japan Institute of the Moving Image), 뉴 시네마 워크샵(NCW) 등이 잇따라 설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일본의 영화사들이 자체적으로 영화인 교육 기능을 담당해 왔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영화 전문학교들이나 학부, 학과가 많지 않았으나 도제 시스템이 해체된 이후 ‘제도권’ 내에서 체계적인 교육이 이어졌다. ATG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제도권 밖의 영화인들에게 기량을 펼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ATG의 겨울 정기 상영회 포스터

▲새로운 풍토
영화계의 풍토가 바뀌게 되자 감독이나 조감독, 그 외 스탭들이 프리랜서가 되어 영화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물론 로망 포르노(ロマンポルノ)를 런칭한 닛카쓰(日活)는 예외로 하더라도 그때까지 조감독이나 스탭을 거쳐 감독으로 승진하던 관례가 무너지고 곧바로 ‘입봉’(立峯)하는 사례들도 속출했다. 

그때부터 감독이나 조감독이 영화인만의 ‘특권’처럼 여겨지던 관행이 무너지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러한 생태계의 재편은 각 영화사의 획일화된 성격과 경향, 장르를 탈피한 다변화된 영화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신흥강자인 TV와 영화 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도 이때이다. 텔레비전 출신이나 다큐멘터리 감독이 극영화를 만들고 사진작가, 소설가, 연극 연출가 등이 그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경력을 쌓은 구로키 카즈오(黒木和雄), 히가시 요이치(東陽一) 감독이 바로 그들이다. 또한 연극 연출가 출신의 아방가르드 시인 테라야마 슈지(寺山修司)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영화감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실험영화의 거장인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감독 역시 새로운 풍토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소형영화 컨테스트가 열려 영화감독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도제식 계승에 의해 철저한 관리를 받아 오던 양질의 영화보다 질적으로는 떨어졌지만 진입장벽은 이전보다 낮아진 점은 긍정적이었다. 

예술영화나 사회적인 영화들의 경우 스타 배우들을 기용하지 않아도 제작이 가능했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함량 미달의 오락영화들도 쏟아져 나왔다. 덩달아 배우들의 생명도 짧아졌다. ‘아이돌 스타’들의 검증되지 않은 묻지마 주연이나 깜짝 신인들의 발탁으로 배우의 생명도 짧아지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일본 영화 전체로 볼 때 질적 저하의 결과를 가져다 주었지만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풍토가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일본영화계의 대모 가와기타 카시코와 알랭들롱

▲ATG(Art Theater Guild)
새로운 풍토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ATG’(아트 시어터 길드, 일본의 얼터너티브 락 밴드에 동일한 이름이 있다)였다. 이미 수차례 연재에서 언급한바 있는 ATG는 예술영화의 배급과 상영을 위해 1961년 설립된 조직으로 일본 전역에서 10개의 예술영화전용관을 통해 예술, 독립영화를 전문적으로 소개해 왔으며 지금도 건재하다. 

연극과 영화 및 문학 쪽에서 종사하기는 했지만 본인이 직접 ‘직업은 테라야마 슈지’라고 언급할 정도로 다채로운 이력을 자랑한바 있는 테라야마 슈지가 일본 인디 영화의 기수가 된 것은 순전히 ATG 덕분이었다. 그가 칸 영화제의 단골로 남게 된 것도 ‘ATG’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본 연재 44회에 언급한 바와 같이 도호(東宝)의 회장인 가와기타 나가마사(川喜多長政)의 부인이면서 ‘일본 영화의 대모’로 불린 가와기타 카시코(川喜多かしこ)가 당시 구미권의 예술영화를 전문 상영하는 영화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일본 아트시어터 운동 모임’을 설립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현재 ATG의 영향으로 현재 일본에는 인디영화제와 실험영화에 대한 교육, 제작, 배급으로 유명한 이미지 포럼(Theatre Image Forum, シアター・イメージフォーラム), 젊은 감독들과 함께 독특한 지방 영화를 육성하고 있는 플라넷 스튜디오+1(プラネットスタジオ+1), 초저예산 영화사 이미지 링(イメージリング), 핑크 영화를 통해 새로운 정치영화 언어를 만들어 내고 있는 코쿠에이(國映)영화사 등 5개 단체의 셀렉션을 통해 일본인디영화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고 있다. 

영화 '이제는 턱을 괴지 않아'

1980년대 카도카와(角川) 프로덕션이 주목을 보일 때까지 ATG는 스튜디오 붕괴로 개인 영화나 실험영화에서 활약하던 많은 작가들을 극영화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영화 ‘히나노카게’(ひなのかげ)를 통해 나른한 분위기의 관능 세계를 묘사하여 국제적 주목을 받은 다카바야시 요이치(高林陽一)는 ATG에서 ‘본진살인사건’(本陣殺人事件, 1975), ‘금각사’(金閣寺, 1976)를 제작했다. ‘본진 살인사건’은 ‘요코미조 세이시’(横溝正史)의 동명 장편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사립탐정 ‘킨다이치 코스케’(金田一耕助,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의 제1편이기도 하다. 

히가시 요이치는 ‘이제는 턱을 괴지 않아’(もう頬づえはつかない, No More Easy Life, 1979)를 통해 학생 운동의 좌절로 남자들이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여자들은 이미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특히 이 영화의 주연인 ‘모모이 가오리’(桃井かおり)는 이 영화를 통해 세대공감을 불러 일으켜 스타가 되었다.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

▲오바야시 노부히코
그 시절 ATG하면 패스티쉬(pastiche : 패러디가 아닌  단순 모방짜깁기)적인 인디영화의 대부였던 오바야시 노부히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35밀리 호러 코믹 극영화 ‘하우스’(ハウス, House, 1977)를 비롯한 활발한 창작활동을 했는데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하우스’는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 저택으로 여행 간 여고생들이 온갖 기상천외한 유령들과 마주치고 일대혈전을 벌이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러운 유머로 재현한 공포영화이다. 사람을 통째로 잡아먹는 피아노와 사람을 때려 죽이는 침대 등 기상천외한 설정으로 부조리하고 악몽 같은 세계를 풍자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 초현실적인 비주얼, 트릭 촬영 등 실험영화 기법을 총동원한 이 영화는 고전영화, 예술영화 등을 전문적으로 출시하는 미국의 DVD·블루레이 제작사인 ‘크라이테리온’(Criterion)으로부터 “오늘날 우리 시대 가장 흥미로운 컬트의 발견”으로 재평가 받은바 있다. 한편으로 그는 ‘소년 시대에 대한 끊임없는 향수’와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한 추억’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작품에 반영했다. 

그 결실은 1980년대에 들어 사춘기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센티멘털한 감성을 담아 향수 어린 시선으로 재현한 일련의 영화들로 열매를 맺게 된다. 감독의 고향 오노미치(尾道市)를 배경으로 한 3부작 ‘전학생’(転校生, 1982), ‘시간을 달리는 소녀’(時をかける少女, 1983), ‘사비신보’(さびしんぼう, 1985)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전학생’은 한국에서 ‘체인지’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최고 인기작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지난 5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리메이크된 바 있으며 특수효과 없이 오로지 등장인물의 매력과 서사의 힘만으로 사춘기의 로맨틱한 판타지를 성공적으로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실험영화의 형식과 멜로드라마적인 낭만주의를 독특하게 결합하여 상업영화에서 찾아 보기 힘든 새로운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무성영화 스타일의 중간 자막, 그림인 게 분명한 인위적인 배경, 흑백에서 칼러로의 전환 등 독특한 스타일의 장치를 즐겨 사용했다. 일본에서 그는 초기 실험영화 경력 덕분에 ‘자주 영화의 선구자’로 불렸으며 주류영화계에 입성한 뒤에는 초현실적인 시각적 스타일 덕분에 ‘이미지의 마술사’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다. 

테라야마 슈지 감독

▲테라야마 슈지
1970년대 인디 영화 감독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테라야마 슈지’일 것이다. 그는 ‘뭘 시켜도 잘한다’는 평가를 들은 만능 예술인으로 불렸다. 한편으로는 ‘마마보이’ 그 이상의 행보를 보여서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영화감독이었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와 동일시 하기도 한다. 

원래 가수였던 테라야마 슈지는 1960년대 초 일본 누벨바그의 거장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 작품의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이후 연극실험실 ‘덴조사지키(天井棧敷)’ 극단을 설립하여 일본 아방가르드 연극사에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 한편 여러 실험영화를 만든다. 그의 영화들은 관념적인 유머가 특징이었다. 배우가 갑자기 스크린을 찢고 무대 위에 출현하는가 하면 컴컴한 방에서 조명을 찾아 더듬거리던 손이 전등의 스위치를 건드리는 순간 장내가 밝아지며 끝나는 영화 등이 그것이다. 

영화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대표적 작품으로는 플롯 없이 덴조 사지키 단원을 총동원하여 영화 관객이 실제 거리로 나가 이벤트를 전개하도록 한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書を捨てよ町へ出よう, 1971)와 자신의 출신지 아오모리(靑森)에서 조그마한 숙박업을 하는 가족과 그들의 관계, 그 악순환에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을 주제로 한 ‘전원에서 죽다’(田園に死す, 1974)가 있다. 

오오모리 카즈키 감독

▲오오모리 카즈키
ATG가 제작을 지원한 예술 영화들은 대개가 흥행에 실패하였기에 경영이 어려워져서 결국 1979년에 사사키 시로(佐々木史朗)가 사장에 취임한 ‘제3기 ATG’에 접어들게 된다. 그는 오오모리 카즈키(大森一樹),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 등 젊은 감독들과 다카하시 반메이(高橋佯明하), 나카무라 겐지(中村幻兒), 하세가와 카즈히코(長谷川和彦), 이즈츠 카즈유키(井筒和幸)등 로망 포르노 영화 출신 감독을 적극적으로 기용한다. 

영화 '히포크라테스들'

이중 오오모리 카즈키가 연출한 의대생들의 청춘영화라고 불린 ‘히포크라테스들’(ヒポクラテスたち, 1980)은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된 청춘영화로 오오모리 카즈키 감독이 실제로 의대 출신에 의사면허가 있었던 까닭에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대학병원에서 의술을 익혀가는 청년 의사들의 일상을 그려 대중과 평단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의 ‘종합병원’같은 드라마들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그는 자작 시나리오가 1977년 우수 시나리오에 주어지는 키도상(城戸賞)을 수상 하면서 바로 감독으로 입봉하는 행운이 따랐다. 해적 방송을 진행하는 청년과 두 과격파 노인 간의 우정을 그린 ‘오렌지 로드 급행’(オレンジロード急行, 1978)이 그것이다. 이후 오오모리 카즈키는 다양한 종류의 장르영화로 평단보다는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는데 그의 발굴은 대단한 수확이었다. 

제3기 ATG는 기존의 난해하고 실험적인 영화들보다는 좀 더 대중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으며 훗날 일본 영화계를 이끄는 중요한 인재들을 육성했지만 수익성 악화로 1992년 신도 가네토(新藤兼人)의 ‘묵동기담’(墨東綺譚)을 끝으로 더 이상 제작을 중단해야 했으며 지난 2018년 11월 11일 도호(東宝)에 흡수 합병되었다. ATG는 예술성이 높은 영화도 ‘비즈니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었으며 예술영화 혹은 인디영화의 안정적 제작 시스템 구축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공헌을 통해 일본영화계의 ‘화수분’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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