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73)/ 스타 탄생, 야마구치 모모에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73)/ 스타 탄생, 야마구치 모모에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4.01.13 14: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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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꽃의 고2 트리오 첫사랑 시대'에서의 야마구치 모모에(맨 왼
쪽).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지난 회에 이야기 한 대로 1970년대 일본영화사의 대미를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恵)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녀를 빼고 1970년대 일본 영화(연예)계를 이야기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배우로서나 가수로서 그녀는 눈부신 활약을 했고 업적을 남겼다. 혜성처럼 나타나 7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활동을 하는 동안 가수 활동 외에도 영화 17편과 드라마 20편에 주연으로 출연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다. 

정규음반 발매는 요약하자면 싱글이 33매, 오리지널 앨범이 22매, 베스트 앨범만 43회이니 그 외의 여러 음반은 지면을 할애하기 힘들만큼 많다. 그녀의  인기는 이미 아시아를 넘어선 것이어서 홍콩의 스타였던 ‘장국영’(張國榮)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 그는 ‘금지옥엽’(金枝玉葉, He's A Woman, She's A Man, 1994)등 그의 영화에서 수시로 언급 되었고 야마구치 모모에가 고별 공연 때 그러하였듯 그 역시 고별 컨서트에서 그녀의 노래를 불렀다. 

야마구치 모모에('꽃의 고2 트리오 첫사랑 시대' 무렵)

그녀의 31번째 싱글인 ‘이별의 저편’(さよならの向う側)을 번안한 ‘풍계속취’(風繼續吹)가 그것이다. 또한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는데 바로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이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 직후에 데뷔하고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늘 ‘제2의 야마구치 모모에’로 불렸고 철저하게 자신의 마케팅에 활용하기도 했다. 사실 그녀 역시 ‘스타 탄생!’(スター誕生!)으로 데뷔했는데 두 번의 탈락 끝에 세 번째 도전에서 부른 곡이 야마구치 모모에의 ‘몽선안내인’(夢先案内人)이었고 프로그램 방송 사상 최고 점수인 392점을 얻으며 우승하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드라마 '붉은 미로'(1974)에서의 야마구치 모모에와 우츠이 켄

▲스타탄생!
당시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은 ‘스타 탄생!’이었다. 1971년 10월 3일부터 1983년 9월 25일까지 방송된 닛폰 TV의 시청자 참여형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619회 방송되었으며 줄여서 ‘스타탄’(スタ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참가자들에게 심사위원들이 혹평을 하며 탈락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이 프로그램은 사실 스타의 산실이었다. 모리 마사코(森昌子), 사쿠라다 준코(桜田淳子) 등이 야마구치 모모에와 동시대에 이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하여 ‘꽃의 중3(중학교 3학년) 트리오’ (花の中3トリオ)라 불리며 1970년대 ‘트로이카’ 체제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은 오리콘 싱글 레코드 연간 매출, 브로마이드 매상 등에서 1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퉜는데 최후의 승자가 바로 ‘야마구치 모모에’였다. 당시 프로듀서였던 ‘가나야 이사오’(金谷勲夫)의 회고에 따르면 ‘너무 아마추어를 뽑아 스타로 키우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프로그램도 재미가 없다’는 판단하에 엄격한 심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NHK 목소리 자랑’(NHKのど自慢)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어서 차별화도 필요했다고 하는데 한국의 ‘전국노래자랑’의 원조격으로 초등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누구나 참가가 가능한 대신에 합격 기준이 모호했고 연예계 데뷔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스타 탄생!’은 10대 하이틴 중심으로 이뤄졌고 초대 챔피언이 당시 13세의 모리 마사코였는데 데뷔곡인 ‘선생님’(せんせい)이 대히트를 치면서 화제를 몰고 왔다. 이후 야마구치 모모에는 1972년 12월에 마키바 유미(牧葉ユミ)의 회전목마(回転木馬)를 불러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무려 20여개 연예기획사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그중 그녀는 ‘호리프로’(株式会社ホリプロ)에 소속하게 된다. 뒤를 이어 사쿠라다 준코도 데뷔하게 되면서 ‘꽃의 중3 트리오’의 경쟁체제가 화제가 된 까닭에 바로 이듬해인 1973년 4월 14일에 쇼치쿠(松竹)의 영화 ‘그럴 즈음’(としごろ)에 출연하게 되었고 동명의 곡으로 첫 앨범도 발매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음반은 실패했다. 청순한 이미지 하나만을 믿고 만든 결과였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 커플을 다룬 잡지 '근대영화'

▲ 푸른 과실(青い果実)
그러나 그녀는 절치부심하여 이미지 변신을 꾀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파격적이었다. 어린 소녀가 자칫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듯한 가사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 노래가 바로 ‘푸른 과실’(青い果実)로 “네가 원한다면 난 뭘 하든 상관 없어”(あなたが望むなら 私何をされてもいいわ) 같은 가사가 등장한다. 순박한 이미지의 소녀가 대담한 가사의 노래를 부른 것이 큰 화제를 몰고 오면서 대성공을 거둔다. 사실 당시 일본 연예계에서는 이른바 ‘푸른 성 노선’(青い性路線, 청순한 소녀가 성적인 표현을 암시하는 듯한 노래 등을 부르는 것)이라 하여 여자 가수들이 이러한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야마구치 모모에가 독보적인 존재로 급부상하게 된다. 

사실 중학교 3학년의 여자가수가 이러한 대담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만으로도 뉴스거리가 충분히 되었다. 당시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연예기획사에 소속은 되었지만 첫 앨범의 실패로 입지가 좁았다. ‘푸른 성 노선’에서도 당대 최고의 섹시 가수 ‘나츠키 마리’(夏木マリ)와 1970년대 화려하게 부활한 ‘야마모토 린다’(山本リンダ) 등이 이미 팬덤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때문에 나이가 상대적으로 낮고 비주얼 면에서는 순박한 소녀라는 이미지를 가진 야마구치 모모에의 등장은 당대 엔터테인먼트 업계로서는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회심의 카드이기도 했다. 

드라마 '붉은 의혹'에서의 야마구치 모모에, 우츠이 켄, 미우라 토모카즈

당시 CBS 소니의 음악 프로듀서였던 사카이 마사토시(酒井政利)는 작사가 센케 카즈야(村越英文)에게 ‘다소 과격한 표현’(より過激な表現)을 요구했는데 중학생이 스트레이트로 이런 표현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곡을 내놓았다고 한다. 사카이 마사토시는 엔카가 주류였던 일본 가요계의 생태계를 바꾼 인물로 아이돌 스타 발굴에 탁월한 선구안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인 야마구치 모모에는 곡을 받아보고 충격을 받아 녹음하는 순간까지도 우울해 했다고. 하지만 후속곡인 ‘한여름의 경험’(ひと夏の経験)까지 빅히트를 치고 거기에 당대 최고의 음악평론가인 ‘코니시 료타로’(小西良太郎)를 비롯한 평단의 지지가 겹치면서 그녀는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 

게다가 문예영화인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연기자로서도 좋은 평가를 얻는다. 이 영화에서 훗날 남편이 되는 ‘미우라 토모카즈’(三浦友和)를 만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광고를 함께 찍고 잇따라 공동 주연을 맡게 되면서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또 이즈의 무희 이후 그녀가 출연한 13편의 영화 중 무려 12편을 공동 주연하면서 이 두 사람은 일본 연예계에서 ‘골든 콤비’(ゴールデンコンビ)로 불리게 된다. 특히 야마구치 모모에는 도호(東宝)의 간판스타로서 흥행을 견인했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전성기

▲국민 스타가 되다!
1975부터 이미 그녀는 연예계를 평정한 스타였다. ‘모모에 짱 축제’(百恵ちゃん祭り)가 생겨날 만큼 인지도가 높았으며 관객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1980년 은퇴할 때까지 매년 8월 하순에 신주쿠에 위치한 ‘코마 극장’(新宿コマ劇場)에서 열렸는데 지금까지도 팬들은 그날을 기념하여 회차를 이어 올 정도다. 1975년에는 아주 특별한 영화가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했는데 바로 ‘꽃의 고2 트리오 첫사랑 시대’(花の高2トリオ 初恋時代)가 그것이다.

‘꽃의 중3 트리오’가 어느새 고교생이 되어 나란히 출연한 이 영화는 도호 제작으로 모리나가 겐지로(森永健次郎)감독이 연출하였다. 모리 마사코 , 사쿠라다 준코 , 야마구치 모모에가 동시에 출연하다 보니 에피소드가 전해오는데 각각 소속된 연예기획사와 레코드회사가 달랐기 때문에 주제가 녹음 때도 신경전이 벌어졌다. 노래의 전반부는 각각 솔로로 녹음하고 후반부에는 합창으로 녹음했다. 솔로 파트 1번은 모리 마사코, 2번은 사쿠라다 준코, 3번은 야마구치 모모에 순으로 각각 3절까지 나눠 불렀는데 이후 세 사람은 각각 싱글 앨범을 냈다. 그해 흥행 4위에 오를 정도로 성공했으며 당시 일본 대학가에 유행하던 ‘이미지 걸’(イメージガール) 선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각 대학들은 유명한 연예인을 ‘이미지 걸’로 선정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도교대학이 야마구치 모모에를 와세다대학이 사쿠라다 준코를 각각 응원하고 있었다. 

영화 '안개의 깃발'(1977)

이후 와세다 대학이 야마구치 모모에를 되찾자는 캠페인이 벌어졌고 여기에 게이오기주쿠대학이 추가로 참전하면서 다른 청춘스타들의 기존 입지를 날려버렸다. 이때부터 야마구치 모모에는 배우로서 더 큰 명성을 얻게 되는데 특히 텔레비전 드라마의 잇따른 성공이 그 원동력이었다. ‘붉은 의혹’(赤い疑惑)이 그것으로 미우라 토모카즈 외에도 야미구치 모모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우츠이 켄’(宇津井健)이다. 그와는 1974년 드라마 ‘붉은 미로’(赤い迷路)부터 함께 출연한 인연이 있었다. 그와의 인연이 각별했던 것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출생의 비밀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 자신의 어머니를 속여 결혼했기 때문에 혼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고 호적에도 당연히 오르지 않았기에 그녀를 차별했다고 한다. 따라서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 드라마를 통해 ‘인생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우츠이 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때로 연기 스승이기도 했고 그녀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으며 이후 단골 부녀지간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다. 아무튼 드라마 ‘붉은 의혹’의 대히트로 인해 극중 벽혈병에 걸린 그녀를 죽이지 말라는 전화가 방송국(TBS)에 쇄도하고 죽의 장막으로까지 불리던 중공에까지 전파되어 배우 ‘공리’(巩俐)가 훗날 ‘나의 우상’이라고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문예영화 ‘슌킨 이야기’(春琴抄)를 통해 연기력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탐미 문학의 대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의 탄탄한 원작 소설이 바탕이 된 이 영화에서 그녀는 쉽지 않은 배역을 잘 소화해 냈다. 슌킨 이야기는 주인과 하인, 스승과 제자, 연인이라는 다층적 관계에 놓인 슌킨과 사스케의 사랑 이야기다. 샤미센을 연주하는 예인(藝人) 슌킨은 사스케를 가혹하리만큼 혹독하게 다룸에도 지극하고 절대적 사랑을 보낸다. 제자를 학대함으로 삶을 지탱하는 맹인 스승의 마조히즘과 그 제자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성인 배우들도 소화해 내지 못할 연기영역을 넘어 섰던 것이다. 그녀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도 진출한다.

영화 '슌킨 이야기'

▲쇼와 시대의 정점
비록 그녀는 살인적인 스케줄들을 감당하고 그녀의 유일한 연애 상대였던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결혼을 발표하며 이른 은퇴를 하게 되지만 쇼와(昭和)시대를 대표하는 배우 겸 가수였음은 분명하다. 사실 미우라 토모카즈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운명이었다. 함께 주연한 영화가 대부분이었고 따라서 그게 데이트였다. 항상 그녀를 배려해 주는 모습에서 충분히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 

또 이 두 사람이 주연하는 영화는 항상 흥행에 성공했는데 이로 인한 황당한 일화도 있다. 영화 ‘에덴의 바다’(エデンの海, 1976)의 경우 처음으로 미우라 토모카즈가 아닌 난조 유타카(南條豊)가 상대역으로 캐스팅 되었는데 관객들의 항의로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당시 최고의 인기를 오래도록 누리게 된 것은 분명 ‘텔레비전’의 보급 때문이었을 것이다. ‘붉은 운명’(赤い運命), ‘붉은 충격’(赤い衝撃), ‘붉은 격류’(赤い激流) 등 이후의 드라마들이 모두 최고 시청율을 갱신했다. 덕분에 ‘호리프로’는 최고의 연예기획사가 되었고 덕분에 지금도 도쿄에 세운 빌딩이 ‘모모에 빌딩’(百恵ビル)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1976년 발매한 싱글 ‘요코스카 스토리’(横須賀ストーリー)의 경우 히트곡이라는 것 외에도 이후 일본의 여러 청춘영화에 등장하고 있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 기자회견.

1977년에는 ‘제6회 도쿄음악제’(東京音楽祭)에서 쟁쟁한 해외 아티스트들을 제치고 동상을 거머 쥐었다. 12월에는 추리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원작의 서스펜스 영화 ‘안개의 깃발’(霧の旗)이 개봉했는데 그녀의 첫 현대극 주연이라는 화제를 몰고 오면서 히트를 쳤다. 이듬해인 1978년에는 ‘제29회 NHK 홍백가합전’(NHK 紅白歌合戦)에서 홍조 트리(紅組トリ)를 맡게 되는데 지금까지 이 최연소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1979년에는 저명한 음악평론가인 ‘히라오카 마사아키’(平岡正明)에 의해 ‘야마구치 모모에는 보살’(山口百恵は菩薩である)이라는 책까지 등장하더니 문화인들 사이에서 ‘현대를 상징하는 스타’(現代を象徴するスター)로 불려졌다. 

그녀에 대해 가장 많은 사진을 촬영했던 일본 최고의 사진작가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은 “시대가 야마구치 모모에를 필요로 했다”는 극찬을 했으며 ‘시대와 자는 여자’(時代と寝た女)라고 평가했다. 1980년 은퇴 시점은 21세(22세 생일 약 3개월 전)로 연예인으로서의 활동은 불과 7년 반 정도였다. 은퇴까지 싱글 앨범들은 누계 1,142만장으로 1970년대에 가장 레코드가 많이 팔린 가수였다. 그녀의 은퇴 공연인 1980년 10월5일 ‘일본 무도관’(日本武道館)에서의 파이널 컨서트는 눈물의 공연이기도 했는데 마이크를 중앙에 그대로 고정하고 조용히 무대 뒤로 걸어서 떠나는 연출을 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전설이 되어 ‘마지막에 마이크를 둔’(ザ・ベストテン)이라는 액션으로 남아 수많은 공연에서 모방 되고 있다. 

은퇴 후 결혼과 출산 이후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야마구치 모모에.

그녀는 거짓말처럼 은퇴 후 활동을 전면 중단했으며 직후인 1980년의 홍백가합전 역시 “이미 은퇴했으므로 사퇴합니다”(既に引退しましたので辞退します)라는 말로 대신하며 참가하지 않았다. 다만 1987년부터 독학으로 퀼트(キルト) 바느질을 시작하여 종종 출품도 하고 2019년에는 일본 보그(Vogue Japan)사를 통해 작품집 ‘시간의 꽃다발’(時間の花束)을 내기도 했다. 남편 미우라 토모카즈가 50대에 만개하여 일본 아카데미상(日本アカデミー賞), 블루 리본상(ブルーリボン賞) 등 수많은 영화상의 조연 남우상을 획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연예인 집안을 일궜는데 장남 미우라 유타로(三浦祐太朗)가 배우 겸 가수로 활동 중이고, 차남 미우라 타카히로(三浦貴大)역시 일본 아카데미상 신인상을 수상할 만큼 배우로서의 입지가 탄탄하다. 장남 미우라 유타로의 아내 마키노 유이(牧野由依) 역시 성우 겸 가수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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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2024-01-17 11:45:44
좋은기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