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미국 리포트/ L.A 국제단편영화제 출품기
생생 미국 리포트/ L.A 국제단편영화제 출품기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8.07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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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라는 '맨땅'에서 꿋꿋하게 성공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BLIND STITCH’의 주연배우 김종만.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전 세계 영화인들의 진정한 축제인 ‘제26회 L.A국제단편영화제’에 참여하였다. 사실 이 영화제는 단순한 단편영화제가 아니다. 이 영화제를 통해 할리우드에 정식으로 데뷔할 수 있는 ‘등용문’이기 때문이다. Academy of Motion Pictures Arts & Sciences(OSCAR®), 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BAFTA) 및 그 외 다수의 인증을 받은 이 페스티벌에서 데뷔한 65명 이상의 L.A의 영화 제작자들이 ‘Academy Award®’(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니 말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영화제에 참여하였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등 ‘영화제’ 하면 떠오르는 레드 카펫의 추억보다 더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필자가 출품한 영화를 상영관에서 보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현장에서 모니터링 했던 일이다. 

화려한 영화제의 뒤편에서는 적게는 수개월에서 많게는 수년의 수고가 뒤 따랐던 작업의 결과물들이면서 우리 자신이 계속 ‘영화인’으로서 생존 할 수 있을지의 여부가 달린 일종의 ‘판관’과도 같은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이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제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들고 '제26회 L.A국제단편영화제'를 즐기는 사람들.

▲단편 영화의 매력
단편 영화는 전체 길이가 짧은 만큼 ‘노동 집약적’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훌륭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기술이 필요하다. 단편영화에서 강렬한 첫인상을 남길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장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될 것이다. 

사실 필자의 경우에도 한국 단편영화계의 기념비적인 걸작으로 남은 ‘지리멸렬’(봉준호)을 보고 단편영화만의 재기발랄한 매력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씨네21’을 정기구독하면 연장 사은품으로 매년 보내지던 게 ‘한국단편영화’ 모음 비디오 테입이었고 그걸 보기 위해 주간지를 구독한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만큼 영화들이 좋았다.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단편 소설’만이 갖는 장점이 있듯 영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 한다. 요사이는 ‘1인 영상’으로도 제작이 될 정도로 시스템이 활성화 되었지만 미국과 달리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안타까운 현실은 ‘단편 영화’나 ‘독립영화’에서 주목 받은 감독과 배우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부여되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총 길이가 ‘45분’을 넘어서는 안 되는, 일종의 규칙이 따르는 단편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이 그 짧은 시간 안에 ‘기승전결’을 모두 담아내려면 장편 영화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축약과 창의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게 단편영화다. 

극장 앞에서 수시로 배우와 스텝들이 자신들의 영화를 홍보하며 기자회견을 연다.

▲L.A Shorts Film Festival
‘L.A Shorts Film Festival’은 단편 영화에서 가장 존경받는 쇼 케이스 중 하나다. 기존 영화 제작자와 수상 경력에 빛나는 타이틀이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최고의 인재들이 만든 영화들을 상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근거가 뭐냐고? 그러려면 미국의 영화 시스템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영화의 중심답게 ‘할리우드의 생태계’는 거대 메이저 영화사들만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수많은 에이전시들이 메이저 영화사, 독립영화사, OTT 회사, 넷플릭스, 아마존, 디즈니플러스, 애플TV, HBO 등 영화를 제작하거나 ‘TV쇼’(한국에서 생각하는 쇼가 아니다, 드라마 미니시리즈)를 제작하고자 하는 회사들과 매칭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기획안’과 ‘시나리오’를 ‘카피라잇’(copyright)을 건 후에 제출하고 이에 대한 검토가 끝나면 우선 단편영화나 기타 ‘파일럿 필름’(투자를 받기 위한 견본)을 만들 스폰서들과 매칭이 된다. 물론 이 단계까지 가기 위해서도 피눈물 나는 노력이 동반되지만 그래도 한국보다는 기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영화계’가 워낙 평등하기 때문에 인종, 국적, 나이, 정치적 성향(보수냐 진보냐), 종교(사이비 종교 빼고) 등 다양성을 모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BLIND STITCH’ 포스터. 

물론 ‘테러리즘’의 정당화 같은 공익에 위배되는 소재나 인물들은 배제되지만 적어도 한국처럼 ‘끼리끼리’ 돌려 막기식으로 회전문 캐스팅을 한다든지 누구는 재제 하고 누구는 주구장창 연출의 기회를 주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우선 1차 관문을 통과한 작품들을 다음 단계(장편영화 혹은 TV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L.A Shorts Film Festival’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전혀 상상 못 할 일이 일어난다. A급 배우들이 출연했는가하면 3D에 실사 애니메이션까지 단편영화 수준을 넘어서는 작품들도 종종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날고뛴다는 영화 인재들이 모두 참여하기 때문에 ‘출품’ 자체가 영광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이 영화제 기간 동안 프로듀서들은 꼼꼼하게 각 영화들을 체크한다. 

한마디로 전 세계 영화 인재들의 ‘용광로’이면서 마치 ‘영화 올림픽’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포츠에도 종목이 있듯이 영화에도 ‘장르’들이 존재하고 각 장르별로 치열하게 경쟁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이스쿨’(High School)분야의 시상도 있다는 점이다. 영화 영재들의 발굴기회가 되는 셈이다. 과연 미국이 전 세계 영화인들의 꿈의 무대라는 게 실감이 났다. 

하루의 영화상영이 종료되는 시점에 상영관 부근 ‘PUB’들은 뒷풀이로 북적거린다. 그냥 북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영화’이야기를 하고 다음 행보에 대해서 토론한다. 자리를 옮겨 가며 묻고 싶은 것을 묻고 명함을 주고받는다. 물론 극장 안에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명함과 플라이어들이 비치되어 있다. 주류, 비주류 따지지 않는다. 언제 누가 ‘급부상’하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영화제 행사가 열린 상영관 내부.

▲L.A라는 도시의 마력
사실 미국을 말 할 때 가장 매력 있는 도시를 꼽기를 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뉴욕’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다. 미국의 영화인들도 뉴욕파와 L.A파로 나뉘곤 하는데 우디 앨런(Woody Allen)같은 이는 노골적으로 영화마다 ‘뉴욕’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즐비한데도 불구하고 L.A에 대한 혹평을 하고 뉴욕에서 작업하기를 즐기며 영화 대사에 인용(L.A 보다는 뉴욕이라는식)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같은 이들에게 L.A는 분명 기회의 땅이었다. 노스 할리우드(North Hollywood) 지역의 유서 깊은 극장들을 통해 클래식 영화들을 수시로 접할 수 있었고 여러 영화제들을 경험하면서 안목을 높일 수 있었다. 

심지어 무명시절 맨해튼 비치의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면서 하루 종일 서구영화는 물론 일본, 홍콩의 영화들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안목이 생겨 영화를 추천해주게 되는데 이 명성이 할리우드에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주로 현직 영화인들이 단골 고객이 되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시나리오를 선보일 기회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할리우드’는 원래 1857년 목장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목장의 이름이 바로 ‘할리우드’였다고 한다. 다운타운의 혼잡함을 피하기 위해 ‘할리우드의 아버지’라는 부동산 업자 H. J. 위틀리(Hobart Johnstone Whitley)가 개발을 시작하면서 비로써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11년 네스터 모션 픽처(NESTOR MOTION PICTURE COMPANY)가 할리우드에 ‘스튜디오’를 이전하면서 영화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1908년까지 최소한 30개의 스튜디오가 플로리다 잭슨빌 근처에서 촬영을 시작했었는데, 초창기 영화인들이 영화특허를 가지고 있던 에디슨(Thomas Edison)의 제작 중단 소송을 피하고자 이상적 기후와 낮은 세금의 할리우드로 이전하면서 오늘날 세계 영화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이 연방제 국가인 만큼 주마다 법과 세금이 다르니 캘리포니아는 영화인들에게 분명 ‘파라다이스’요, ‘피난처’였을 것이다.

‘BLIND STITCH’ 소개 글. 

▲BLIND STITCH
우리가 출품한 영화는 ‘BLIND STITCH’이다. 뭐, 직역을 한다면 ‘눈감고도 봉합하다’ 정도로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Blind Stitch’는 주로 ‘재봉’에서 쓰이는 용어(수술대에서도 쓴다)다. 재봉에서 블라인드 스티치는 두 개의 원단을 결합하여 스티치 실이 보이지 않거나 거의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김종만(Jong Man Kim) 할리우드 배우 주연으로 김진근(한국)배우도 등장한다. 할리우드의 베테랑 알렉산더 버그먼(Alexander Bergman)이 감독했다. 

스포일러를 조금 흘리자면 부산에서 수술 전문의로 명성을 얻던 한 사내가 어떤 사연이 있어 코리아타운에 와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재단사 일을 한다.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우연히 테러를 당한 갱의 얼굴을 꿰매주게 되고 낮에는 재단사, 밤에는 외과의로 부업을 맡게 된다. 

배우 김태희, 배우 김종만, 필자, 알렉산더 버그먼 감독.

이를 통해 암암리에 (흉터가 잘 남지 않게 잘 봉합한다는)소문이 나 큰돈을 벌게 된다. 비로써 그는 아메리칸 드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어려운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갱들의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 영화는 ‘스릴러’ 장르로서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주제가가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스릴러’ 라는 장르 그리고 코리아타운, 과거(이민 1세대 한인)를 배경으로 하는 까닭에 우리가 주목한 것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세계적으로 대유행했던 ‘사이키델릭 락’(Psychedelic Rock)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몽환적인 사운드로 강한 중독성을 주는 사이키델릭 락 음악은 히피 문화의 중심이기도 하다. 

한국 사이키델릭 락의 선구자 신중현

우리가 주목한 것은 ‘신중현’이다. 그는 한국 사이키델릭 락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68년 ‘덩키스’(Donkey’s)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주로 미8군 무대에서 사이키 델릭 락을 연주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곡이 ‘떠나야 할 그 사람’(The Man Who Must Leave, 사이키 펑크에 더 가깝다)이다. 물론 이 노래는 김선, 펄시스터즈를 비롯 미니시리즈 ‘시그널’의 삽입곡이었던 ‘잉키’(INKII)까지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그중 오리지널 버전인 ‘김선’의 보컬을 채택했다. ‘김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덩키스’의 멤버로만 추측할 뿐이다. 그 오래된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객석 곳곳에서 세대를 초월한 전율과 공감이 느껴졌는지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장면과 어우러진 그 절묘함이란... 영화를 만들면서 쌓였된 모든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희열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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