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67)/ 악역의 전설 배우 카니에 케이조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67)/ 악역의 전설 배우 카니에 케이조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3.07.0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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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전문 배우로서 명성이 굳어지던 시절의 카니에 케이조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70년대의 일본 영화를 언급하면서 닛카쓰(日活)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에 대한 소개가 길어졌다. 사실 소개가 길어진 데 대해서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한국에서 관심도가 높음에도 소개하는 글들이 별로 없어서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둘째로는 월드 와이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으로 단순한 에로영화인 줄 알았는데 전 세계적으로 매니아 층이 형성되어 있고 모방 영화들이 유럽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작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로망 포르노 장르가 몇 차례 중단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우들이 이후 자연스럽게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하게 된 배경과 ‘리부트’(reboot)라는 부제로 다시 제작되고 리메이크 되는 끈질긴 생명력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꼭 언급하고 싶은 배우 한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로망 포르노’라는 장르 자체가 워낙 여자배우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만 사실 주로 ‘가해자’ 역할로 등장한 남자 배우들도 주목할 만한 몇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 

 

다케나카 나오토

한국에도 잘 알려진 ‘다케나카 나오토’(竹中直人)의 경우에도 로망 포르노의 마지막 작품들에 등장한다. 이시이 다카시(石井隆)감독의 영화 ‘천사의 창자 5 - 붉은 현기증’(天使のはらわた 赤い眩暈, 1988)에 주연으로 나오는 등 종종 등장하는데 우리가 ‘신주쿠 여고생 납치사건’으로 알고 있는 ‘완전한 사육’(完全なる飼育, 1999)에 괜히 주연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 배우들에게 ‘로망 포르노’는 단순한 성애영화 혹은 에로영화가 아닌 엄연한 ‘장르’였고 오늘날 일본의 중견 연기자들의 데뷔 무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배우는 로망 포르노에 빈번하게 등장했으면서도 훗날 액션파, 연기파 배우로 활약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바로 ‘카니에 케이조’(Kanie Keizo, 蟹江敬三)가 그 주인공이다.

카니에 케이조의 특유의 눈빛

▲악역에 강간 전문 배역
야성적 매력의 카니에 케이조는 닛카쓰 로망 포르노에서 없어서는 안 될 배우였지만 특이하게 ‘강간 전문’ 배우이기도 했다. 사실 배우로서 악역 전문이라는 이미지만 굳어져도 불명예스럽게 여겨 질 수 있는데 거기에 ‘강간 전문’까지 더해졌음에도 마침내 대배우가 되었음을 생각해보면 그가 오늘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악역 전문 배우로서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설명해 줄 예화가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초등학생이었던 그의 아들 카니에 잇페이(蟹江一平)가 악역전문 배우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지메’(いじめ)를 당할 정도였던 것이다. 1970년대 스크린에 비친 그의 모습은 두 가지로 일본언론들이 정의하였다. 엽기적(猟奇的)이고 엑센트릭 악역(エキセントリックな悪役)이라는 것이다. 

카니에의 아들딸은 모두 배우다. 아들 카니에 잇페이와 딸 쿠리타 모모코.

한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바로 ‘엑센트릭’(eccentric)일 것이다. ‘별나고 정도를 벗어난’ 정도로 해석이 가능한 데 한국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악역 중에서도 아주 별나고 정도를 벗어난 ‘악당 중 악당’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나중에는 형사로 나온 적도 있다. 물론 관객 혹은 시청자들은 그의 변신에 낯설어했는데 ‘스케반 형사 시즌 2 – 소녀 철가면의 전설’(スケバン刑事II 少女鉄仮面伝説, 1985)이 그렇다

필자 역시 그를 처음 보게 된 영화가 ‘하세베 야스하루’(長谷部安春)감독의 ‘범하다!’(犯す:おかす:Rape!, 1976)였는데 무표정하고도 냉정하고 진지하게 여자를 강간하는 캐릭터를 소화해 내 관심을 갖게 된 배우다. 서구에서는 ‘okasu’(おかす)로 잘 알려진 이 영화는 ‘야시로 나츠코’(八城夏子)의 데뷔작이면서 카니에 케이조가 주연한 영화로 강간이 한 여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순진하고 평범한 도서관 사서인 나츠코(야시로 나츠코 분)는 어느 날 퇴근하던 중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남자(카니에 케이조)에게 강간을 당한다. 

영화 '범하다!'의 라스트 신, 남자는 자신의 칼에 찔려 죽어가고 있는데 강간 당한 여자는 마침내 그를 찾아내어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다는 충격적 결말

이후 그녀는 자신의 몸에 강간의 기억이 남아 여러 남자들과 섹스를 하면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는데 결국 그 해결책은 자신을 강간한 ‘낯선 남자’에게 있다는 결론을 갖게 되어 그를 찾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츠코는 자신을 위협하던 칼에 찔려 숨이 멎어가는 낯선 남자와 정사를 벌이며 비로서 오르가즘을 느낀다. 그는 이 영화에서 여자가 트라우마로 여러 남자와 의미 없는 정사를 벌이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강간’을 한다. 

극중에서 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강간마’(強姦魔)로 불리는데 당대의 로망 포르노 스타 여배우들이 카메오로등장하여 강간을 당한다. SM(사도 마조히즘)의 여왕 다니 나오미(谷ナオミ)를 비롯하여 야마시나 유리(山科ゆり), 니조 아케미(二条朱実)등이다.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강간마’역으로 등장한 카니에 케이조의 눈빛은 너무 냉정하고 살벌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섬찟하게 만든다. 

니혼 테레비 드라마 '오니헤이 한카초'

▲극단으로부터 출발
그의 출발은 극단이었다. 도쿄 출신으로 ‘도쿄도립신주쿠고등학교’(東京都立新宿高等学校)에 재학 중 우연히 연극무대에 섰을 때 느낀 해방감으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64년 유서 깊은 도쿄의 극단인 ‘청배우’(劇団青俳)에 연습생으로 들어간다. 1952년 ‘청년배우클럽’(青年俳優クラブ)으로 출발한 만큼 무대, 방송계, 영화계에 많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후 청배우의 분열로 인해 만들어진 ‘현대인극장’(現代人劇場)으로 이적하면서 배우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1969년 ‘진정 넘치는 경박함’(真情あふるる軽薄さ)으로 인기를 끌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연극은 물론, 영화나 텔레비전 시대극, 형사 드라마 등에 자주 얼굴을 비추면서 차츰 ‘악역전문배우’로서 캐릭터를 구축해 나간다. 비록 악역 전문 배우이고 로망 포르노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갔지만 연극무대에서 닦은 연기력으로 승부 한 만큼 그 장르가 종료된 이후에도 계속 연기자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딸 쿠리타 모모코(栗田桃子)와 아들 카니에 잇페이가 자연스럽게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드라마 '료마전'에서

그런데 두 자녀는 심지어 카니에 케이조의 캐릭터 때문에 ‘이지메’ 경험을 갖고 있어 청소년기 반항을 심하게 한 적도 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묵묵히 연기자의 길을 걸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배우가 될 결심을 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쿠리타 모모코는 연극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명실공히 연기파 배우이다. 카니에 잇페이 역시 연극무대를 거쳐 텔레비전과 영화에 꾸준히 출연하고 있으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장기를 발휘하고 있다. 

특히 예명을 쓰는 누나와 달리 본명을 쓰는 카니에 잇페이는 어느 날 배팅센터(バッティングセンター, 실내 야구장)에서 묵묵히 배팅을 하는 카니에 케이조의 등을 보면서 “가장 힘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一番つらい思いをしているのは父だ)라는 생각에 그를 이해하고 자신도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악역 전문에 로망 포르노배우라는 핸디캡을 가정에서부터 극복한 결과로 보여진다. 

드라마 '열중시대'

▲열중시대(熱中時代)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은 ‘열중시대’의 시즌2이다. 1978년 10월부터 1981년 3월까지 시즌제로 니혼TV(日本テレビ)를 통해 방영된 인기 드라마로 초임 초등학교 교사의 ‘분투기’로 호평을 받았다. 시대와 함께 변해가는 아이들의 기질에 당황하면서도 분투를 계속하는 헌신적 교사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시즌2에서 그는 ‘오마와리’(お巡り)역으로 분하여 처음으로 악인(惡人)이 아닌 선인(善人) 역할을 맡게 된다. 

‘お巡り(さん)’는 경관을 의미하는 속어로 시작되었지만 현대 일본어로는 애칭에 더 가깝다. 이리저리 순찰을 ‘돌기 때문에(巡り)’ 붙은 이름이며 순찰을 도는 경관이라 해서 이따금 번역기를 돌리면 ‘순회’로 번역된다. 이 드라마의 동료 연기자였던 ‘미네 류타’(峰竜太)는 “그가 악역에서 단 한번의 경관역으로 자신에 대한 선입견을 일피이피(一皮も二皮も)벗겨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악역전문배우가 경찰로 캐스팅 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변신을 완벽하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이런 프로 의식이 위암 투병을 하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배우로서 연기를 한 원동력이었다. 

‘열중시대’를 계기로 그에게는 전혀 다른 캐스팅 제안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 ‘스케반 형사’(スケバン刑事)를 비롯, 시대극 ‘오니헤이 한카초’(鬼平犯科帳), ‘료마전’(龍馬伝), 영화 ‘카마타 행진곡’(蒲田行進曲), ‘불타는 집의 사람’(火宅の人), ‘꽃의 혼돈’(華の乱) 등이다. 물론 극중 배역은 악인도 있고 선인도 있다. 특히 ‘오니헤이 한카초’의 경우는 매우 인기 있는 작품으로 무려 20년간 출연을 했다. ‘헤이세이의 오니헤이’는 역사소설의 대가인 ‘이케나미 쇼타로’(池波正太郎)의 동명 시대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주인공인 특수경찰 하세가와 헤이조의 별칭에서 따온 이 인기 시리즈물은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런 장수 드라마에서 고정 악역으로 20년간 출연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오바의 호하치’(小房の粂八)역이었는데 그는 처음 이 배역을 맡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본을 대하고부터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다. ‘천애의 고아로 자라나 외롭고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결국은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연민이 느껴지는 악역’이었기에 연민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혼신을 다해 20년 동안 오바의 호하치로 연기했고 시청자들은 그런 그에게 “호하치의 역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粂八を演じるために生まれてきた)거나 ‘호하치의 환생’(粂八の生まれ変わり)이라는 말로 극찬하며 장수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한 그에게 환호했다.

'스케반 형사'시즌2(1985-1986)에서 드물게 형사로 나왔다.

▲배역이란 “되는”것!
과거 ‘반항하는 젊은이’ 혹은 ‘빌런’ 역할이 주어졌다면 이후 주어진 배역들은 경찰, 평범한 서민의 역할이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하치 역할을 지속한 이유가 있다. 그의 연기자로서의 지론인 ‘배역이란 “되는”것’(役は”なる”もの)이라는 신념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연기자는 배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연기자로서의 신념이 절대적 악인에서부터 선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배역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닐까. 80년대 이후 작품들을 보면 다작을 했음에도 그저 개성파 연기자라는 생각이 들게 할 뿐이다. ‘료마전’을 기억할 것이다. 후쿠야마 마사하루(福山雅治)의 열연이 돋보였던 NHK의 대하 드라마에서 미츠비시(三菱)의 설립자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역을 맡았던 카가와 테루유키(香川照之)의 아버지 역할을 맡아 열연했던 것이다. 

말년의 카니에 케이조. 그는 69세에 사망했다.

그는 드라마에서 번번이 이와사키 야타로의 앞길을 막는 몰락한 사무라이이자 무능한 아버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2012년 일본비평가대상(日本映画批評家大賞) 시상식에서 골든 글로리상(ゴールデン・グローリー賞)을 수상했는데 수상 소감을 통해 그는 “10년 앞이나 20년 앞인지, 제대로 된 노인을 연기할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실천하듯 2013년 NHK 연속 TV 소설 ‘아마짱’(あまちゃん)에서 주인공 마노 아키(天野アキ)의 할아버지역으로 출연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카니에 케이조가 맡은 역할은 폭넓고 개성적인 풍모와 연기로 존재감을 보인 것이 특징이다. 그는 위암으로 2014년 3월 30일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는데 동료 배우들은 한결같이 ‘위암이란 조기 발견을 하면 낫는 병’이라면서 그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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