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㉚/ 전후 황금기8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㉚/ 전후 황금기8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0.04.0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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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이 다다시 감독과 그의 작품 '히메유리의 탑'. 이 작품은 오키나와 반환 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의 국제영화제 출품 러시

일찍이 일본의 배우이자 도호(東宝)의 사장이었던 시미즈 마사오(清水将夫)는 “영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흥행수입을 보면 곧 좋고 나쁜 영화를 구분해 낼 수 있다(Donald Rich의 말을 인용)”고 했다. 일본영화의 전후 황금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양적인 성장을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야망을 가진 감독들이 그들의 기량을 펼쳐 보이며 할리우드와 같은 시스템 구축에도 성공했다는 점이다.

당시 영화는 사회적으로 감당할 역할이 있다고 믿었으며 당연히 흥행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의 흥행이 성공한 영화가 영화제에 나가서도 성공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국제적인 영화제의 출품작품들이나 수상작품들이 대부분 일본 내에서의 성공이 먼저 있고 이를 토대로 도쿄의 영화사 지사들이 앞다투어 영화제 출품을 도왔다.

사실 요즈음 한국영화계가 극심한 침체기를 겪으면서 ‘영화제 출품용은 원래 재미가 없고 작품성에 승부를 건다’는, 물론 그렇지 않은 영화도 존재하지만 독립영화나 전문적으로 영화제 출품이나 초청을 받는 감독들의 영화가 흥행과는 무관한 경향과 비교해 볼 때 일본의 이러한 시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었다.

‘원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의 원조

다른 한편으로는 장르영화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사실 ‘원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의 원조이기도 하다. 장르영화의 확립은 특별히 탄탄한 원작의 발굴에 있었는데 일본의 영화계는 원작을 발굴해 내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신비로운 동양의 나라에서 만든 작품이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원작이 있다면 역시 주목을 받게 된다,

당연히 영화가 상을 받으면 일본의 문학계 역시 주목을 받게 마련이고 앞서 기술하였듯이 무려 세 사람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중작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50~60년대 양적인 면에서 일본영화의 절정을 이루게 된 것은 대형 영화사들이 체제를 정비하고 탄탄한 원작을 발굴해 내었으며 제작 편수는 늘리되 일종의 ’영화제 통행권‘을 줌으로써 경쟁구도를 만들어 갔기 때문이다. 

영화가 비록 일본의 국책사업은 아니지만 야망 있는 감독들에게 과감하게 기회를 부여하고 경쟁구도를 키워 나간 것이 그 핵심이었다. 한국이 영화에서 배우들에 대한 경쟁구도(라이벌 관계)의 이미지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면 일본은 무조건 감독들의 경쟁무대였다. 서로 상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구도였고 또한 일본 내의 흥행은 곧 영화제를 통해 자신의 영화가 칸, 베를린, 베니스, 로카르노, 모스크바,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등에서 주목을 받게 되고 세계 비평가들의 비평에 의해서 유럽의 아르떼(Arte)TV 같은 매체에 팔렸기 때문에 당연히 감독들은 치열한 경쟁을 했다.

특히 당시 세계의 영화 흐름이 장르영화의 구축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역시 중요했던 것이다. 공식유통경로를 통해 배급되기도 수월했고 무엇보다도 ’발굴‘을 위해 베니스영화제나 칸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이 빈번하게 일본을 왕래했다. 특히 칸 영화제의 단골 심사위원장이었던 장 꼭또((Jean Cocteau)의 경우가 그랬다, 자신 스스로가 시인·소설가·극작가·영화감독이라는 화려한 경력답게 ’지옥문(지고쿠몬, 地獄門, 1954)‘같은 걸작을 발굴해 낸 것도 심사위원장 ’장 꼭또‘였다.

1953년 들어 앞으로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텔레비전 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1957년부터는 전 극장을 와이드스크린(wide screen)체제로 전환하면서 초반 방어에 성공하기도 한다. 와이드 스크린이란 보통 35mm 규격 이상의 필름을 영사할 수 있는 스크린을 가리킨다. 우리가 가끔 DVD를 사게 되거나 영화를 파일 형태로 다운로드 받게 될 때 4:3 비율이라는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원래 영화는 탄생 초기부터 1940년대 말까지는 ‘아카데미레이시오(Academy Ratio)’라는 표준화면(standard size), 즉 가로:세로의 비율이 4:3인 화면이 주로 쓰였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보급이 일반화된 이후에는 보다 웅장하고 사실감을 높일 수 있는 대형화면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텔레비전이 경쟁자로서 막강했기 때문에 차별화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미국 와이드 스크린의 등장

1950년대 드디어 미국 할리우드에서 와이드 스크린을 시작한다. 3대의 카메라와 영사기를 사용해 입체 효과를 준 시네라마, 70㎜ 2.35 대 1의 압도적 시각 효과를 구현한 시네마스코프, 그 외에도 비스타비전, 3D 입체 영화, 아이맥스 영화 등 ‘와이드 스크린’이 등장한다. 초기 그냥 보여주는 영화에서 다시 시나리오가 있는 무성영화를 거쳐 유성영화가 개발되더니 다시 와이드 스크린, 총천연색 컬러 필름, 스테레오, 돌비 등 사운드 시스템 등의 발전을 통해 진보한다. 이러한 진보는 텔레비전의 도전을 방어한다는 성격이 강하지만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 가 되기도 한다. 가로:세로의 화면비율이 2.4:1인시네마스코프(CinemaScope)가 대표적이다.

독립 제작사 붐과 독립 프로운동의 중심 감독들

황금기는 양산체제(量産體制)를 통해 다작을 생산해 내기 까지 이어졌으며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는 독립 제작사들이 붐을 이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미군정의 영향으로 인한 ‘레드 퍼지(Red purge)의 실시로 인해 성향상 대형 제작사에서 추방 당한 영화인들과 유명한 도호쟁의(東宝爭議)때 조합 측에서 제작하다가 아예 제작까지 겸하게 된 경우들이라 할 수 있겠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기 때문에 특히 좌파진영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을 만드는 것이 절대 선이라고 불렸다. 어떤 장르의 영화이든 반드시 정치적 메시지를 포함시켰다. 정치적 성향이 같아야 했기 때문에 배우나 스탭의 돌려막기식 캐스팅이 빈번했다. 당연히 묻지마 데뷔도 많았고 관객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계몽주의적 사회주의 리얼리즘 메시지를 계속 전파하다 보면 사회의 모순과 계급적 차별을 인식하고 지지할거라 믿었다.

그러다 보니 판에 박힌 듯 같은 주장만 되풀이 되었고 모든 작품에는 불필요한 사족이 뒤따랐다. 당연히 돈을 내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외면을 받았고 대형 영화사들이 시스템 구축을 마무리하는 1955년경부터 그 짧은 그들만의 르네상스는 막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러나 야마모토 마쓰오(山本益夫), 신도 가네토(新藤兼人), 이마이 다다시(今井正), 가메이 후미오(亀井文夫) 등과 함께 독립 프로운동의 중심적인 존재로 활동한 감독들도 있었다. 그들은 반체제적인 경향의 사회파 감독이지만 장르영화를 만들줄 아는 ’한우물‘만 파는 감독들이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대형영화사와 독립제작사를 오가며 흥행까지 시키는 감독들이었다는 것이다.

공조(共助)-협업(協業)-경쟁(競爭)의 3대 원칙

이제 더욱 구체적으로 일본영화의 황금기에 관하여 풀어 나갈 차례다. 서론이 길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조(共助)’와 ‘협업(協業)’ 그리고 ‘경쟁(競爭)’을 3대 강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1950년대 장르영화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이 3대 원칙의 틀 안에서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동세대 세계의 영화인들이 선망에 품던 할리우드를 동경하면서도 일본을 무대로 한 일본영화의 가능성을 탐구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철저하게 스튜디오 시스템에 소속된 ‘직원’으로서 그 틀 안에서 움직였지만 최대의 프로그램 픽처 그리고 기획력이 발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제나 수출 등 여러 경로의 소비경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황금기였다.

심지어 일본 리얼리즘 전통의 원조라는 이마이 다다시 조차도 독립 제작사와 메이저 영화사를 오가면서 ‘히메유리의 탑(Himeyuri no to, ひめゆりの塔, 1953)’이라는 걸작 중의 걸작을 남길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매우 흥행을 하였는데 격전지 오키나와에서 한 떨기 꽃이 되어 져버린 소녀들을 아름답게 묘사해 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 영화는 동시에 '사회적 사건'으로 평가 받았다.

오키나와 반환운동의 씨앗이 된 ‘히메유리의 탑’

이 영화는 평화와 반전의식을 강조하여 훗날 ‘오키나와 반환운동’의 씨앗이 된다. 이 작품은 결국은 1950년 걸작인 ‘다시 만날 때까지(また逢う日まで , Untill We Meet Again)’같은 걸작 반전영화의 연장선상이었다. 이 영화는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전쟁에 회의감을 느끼던 청춘들의 군상을 그려냈다. 그런데 오히려 창 너머의 키스신이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반전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회파 감독으로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써 1950년대 영화 잡지 ‘키네마 순보 베스트 10’ 순위에 베스트 1위로 뽑히는 작품을 가장 많이 만들어 냈다. 이러한 내공은 훗날 ‘무사도(Bushido, Samurai Saga, 武士道殘酷物語, 1963)을 통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메이저 영화사들의 자기 색깔 찾기

당시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철저하게 자기 색깔을 갖고 있었다. 한 마디로 ‘선택’과 ‘집중’을 했다는 얘기다. 후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도호(東宝)는 사무라이 영화와 괴수 영화에 집중했다. 특별히 ‘고지라(ゴジラ, Gojira, Gozilla)’시리즈는 전 세계 괴수(怪獸)영화의 효시로 손꼽히는데 1954년 11월 3일 첫 선을 보인 후로 지금까지 할리우드에서 수많은 리메이크판을 만들고 은둔의 나라 북한에서 조차 답습하여 ‘불가사리’를 만들 정도인데 방사능 돌연변이 괴물이 일본열도를 갑자기 습격한다는 스토리다.

세계 최초로 핵에 의한 응징을 받은 일본의 공포는 어느새 괴수로 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1년 도에이(東映)는 다른 메이저 회사들 보다 먼저 동시 상영 방식을 선택하여 흥행에 성공한 이후로 다른 메이저 제작사들이 자기 색깔을 분명하게 가져가게 한 장본인이다. 도에이는 만에이(滿映)에서 활동하던 인원들과 중국에서 돌아온 옛 동료 영화인들을 규합하였기 때문에 ‘시대극(지다이게키, 時代劇)’에 집중했다.

특히 도에이는 다른 영화사에서 추방당한 좌익영화인들까지 규합하고 활동 무대를 찾지 못하던 전쟁 전 시대극 스타들을 과감하게 기용한다. 시리즈물 역시 도에이의 특징이었다. 다이에이(大映)는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라는 간판스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모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여성의 고통과 희생을 그린 멜러 드라마가 전문이었다.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의 충돌이 빚어지던 전후 일본에서 단연 다이에이의 영화들은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쇼치쿠(松竹)는 서민적인 드라마와 순수 여성 취향의 멜러드라마에 치중했는데 다이에이와 다른 점은 두 남녀가 엇갈리는 사랑을 할 때면 어김없이 관객을 위한 전국 관광지 안내라는 서비스를 아끼지 않았다. 특별히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恵介) 감독에 의해 후지 필름의 협조를 얻어 1951년 일본 최초의 칼러영화인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カルメン故郷に帰る, Carmen Comes Home)’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닛카쓰(日活)의 역습(逆襲)이다. 1954년에야 비로소 영화제작을 재개했지만 이미 기존 5개 메이저 영화사의 협정으로 배우들을 구하지 못하고 감독란에 봉착한 닛카쓰는 과감한 신인 기용으로 이른바 태양족(太陽族) 영화 등 파격적인 영화로 일본열도를 뒤흔들었다.

이 시절 신인감독 나카하라 야스시(中平康)는 해성처럼 일본 영화계에 등장한다. 그의 영화인 ‘일그러진(미친) 과일(狂った果実, 1956)’은 프랑수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가 우연히 빠리에서 이 작품을 본 후 즉시 장문의 비평을 써 극찬한 작품으로 이후 ‘400번의 구타((Les Quatres Cent Coups, 1959)에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물론 이따금 국적불명의 액션영화를 만든 것도 닛카쓰다.

이 시기에 감독들은 경쟁했다. “하필 구로사와가...”, “미조구치 마저..,”같은 탄식들이 있었지만 때로 그들은 서로의 시나리오를 제공하여 다른 감독들이 연출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세계의 유수한 영화제에서 서로 최종심에 올라 경쟁하기도 한다. 젊고 재능있는 감독들과 탄탄한 배우층들로 인해 일본영화는 어느새 철저한 스튜디오 시스템에 의한 ‘스타시스템’ 구축에도 성공하게 된다.

이 때문에 나카하라 야스시 같은 경우는 프랑스의 누벨 바그(Nouvelle Vague)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이라고 냉담하게 답변할 만큼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러나 1950년대 만큼은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의 시대였고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구로사와도 신도호(新東宝)의 다니구치 센기치(谷口千吉)를 위해 ‘새벽녘의 탈주(曉の脫走, 1950)’의 시나리오를 집필해주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전후 일본인들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으로 ‘조선인 위안부’와 조우하는 패전 일본 여인을 그려낸다.<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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