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한줄 어록/ 작은 일도 악바리가 되어라
CEO 한줄 어록/ 작은 일도 악바리가 되어라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1.10.20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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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고바야시 이치죠(小林一三)
▶경력: 한큐도호그룹(阪急東宝グループ) 창업자
▶태생: 야마나시현 
▶나이: 1873~1957

<에디터 이재우> 일본 에도시대에 ‘게소쿠방’(下足番)이라는 직업이 있었다. 일종의 하인 신분으로, 지체 높은 집의 신발 정리 일을 했다. 게소쿠방을 이야기 하면, 대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떠올린다. 보잘 것 없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당대의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게소쿠방을 하면서 출세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신발 정리하던 직업 ‘게소쿠방’(下足番)
날씨가 추운 날, 히데요시는 주군 노부나가의 짚신을 품에 안고 따뜻하게 했다가 내주었다. 여느 게소쿠방과 다르게 행동했던 히데요시는 훗날 천하를 거머쥘 수 있었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가(史家)들이 만들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세에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일화다. 

고바야시 이치죠(小林一三). 한큐 도호그룹(阪急東宝グループ)의 창업자인 그는 이 게소쿠방의 의미를 다시금 강조한다. “신발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면, 제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누구도 당신을 신발 정리만 하는 심부름꾼으로 놔두지 않을 것이다.”(원문: 下足番を命じられたら、日本一の下足番になってみろ。そうしたら、誰も君を下足番にしておかぬ。) 

하찮은 신발 정리지만 거기서 재미와 보람을 찾아 최고의 게소쿠방이 되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 과정을 지켜 본 누군가가 게소쿠방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얘기다. 오다 노부나가 역시 천한 신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게소쿠방으로 놔두지 않고 기용해 요긴하게 썼다. 고바야시 이치죠의 말인즉슨, 비록 작은 일, 하찮은 일이라도 악바리처럼 일하면 더 큰 일, 더 중요한 일까지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큐 도호그룹 창업자 고바야시 이치죠(小林一三)와 ‘게소쿠방’(下足番) 어록.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한 천재 경영자
고바야시 이치죠는 어떤 경영자였을까.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고바아시 이치죠, '그'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는 늘 상식에서 벗어났고, 늘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일본 기업사에서 고바야시 이치죠는 가장 혁신적인 기업가, 또는 천재 경영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한마디로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하면서 세상을 바꾸었다. 

고바야시 이치죠가 일군 한큐 도호(阪急東宝グループ)는 한큐한신홀딩스(한큐 전철, 한신 전기철도 운영), H2O 리테일링(산하에 한큐백화점, 한신백화점), 영화사 도호(東宝)를 중심으로 구성된 그룹이다. 그 유명한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宝塚歌劇団)과 프로야구 한신팀까지 아우르고 있다. 한큐(阪急)는 오사카(大阪)의 阪과 급행의 急자를 붙여서 만든 회사 이름이다. 민간전철 한큐 전철은 오사카 우메다 역을 거점으로 교토, 고베, 다카라즈카, 천리 등 간사이 지역 중에서도 인구 밀도가 높은 북서부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야마나시현 출신의 고바야시 이치죠(小林一三)는 1월 3일 태어나서 이름에 한자 一과 三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는 게이오대학에 입학해 연극과 문학에 심취했다. 첫 직장은 미쓰이은행. 34세까지 은행원으로 일했던 그는 앞으로 전철사업이 유망할 것이라고 판단해 1907년 미노오 아리마 전기 철도회사(箕面有馬電気軌道株式会社, 지금의 한큐전철)를 설립한다. 이때부터 그의 아이디어가 폭발한다. 그의 생각은 늘 상식에서 벗어났고, 더 나아가 늘 발상의 전환을 꿰했다.

단순한 철도전철사업이 아니었다. 철도를 깔고 연선(沿線)을 개발하고 인근 지역의 인구를 늘려 수요를 만들어갔다. 이른바 ‘사철(私鐵) 비즈니스 모델’을 내놓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바야시 이치죠는 오사카의 중심 우메다에서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한촌에 기차를 달리게 했다. 모두가 “저런 시골에 기차를 다니게 만든다니 바보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한큐노선

오사카 인근 예술도시 다카라즈카의 성공
그는 철도를 개업하기 전에 연선(沿線)에 광대한 땅을 사들여 구획을 정리해 주택지를 개발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골 땅은 상당히 싸게 살 수 있었다. 고바야시 이치죠가 개발한 교외주택은 불티나게 팔렸다. 여기에다 그 주택을 일반 직장인이 구입할 수 있도록 할부(지금의 모기지)라는 지불 방법까지 생각해 냈다. 덩달아 한큐전철도 급속히게 성장했다. 그러면서 ‘교외에 살면서 도시로 통근한다’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형성된 대표적인 도시가 효고현의 다카라즈카(寶塚)시다. 다카라즈카시는 오사카에서 전철로 30분 거리에 있는 일종의 베드타운이다. 원래 작은 온천마을에 불과했지만, 오사카의 우메다와 다카라즈카 사이에 전철이 연결되면서 도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고바야시 이치죠의 발상이 한번 더 빛을 발휘한다. 그는 승객 유치를 위해 1913년 여성들만 출연하는 극단 ‘다카라즈카 창가대’(寶塚唱歌隊)를 만들었다. 이 창가대는 1940년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훗날 일본의 유명 예술 장르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된다. 이 극단의 명성에 힘입어 예술도시로 변신한 다카라즈카 시엔 매년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과 공연 관람객들이 찾아든다.

여성들만 출연하는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宝塚歌劇団)의 공연 모습.

영화사 도호(東宝)가 만들어진 배경
영화사 도호(東宝)도 고바야시 이치죠의 손에서 탄생했다. 당시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인기가 전국적으로 높아지면서 도쿄 공연도 여러 차례 실시했다. 하지만 도쿄 팬들은 그걸론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바야시 이치죠는 1934년 도쿄에 다카라즈카 극장(東京宝塚劇場)을 개업했다. 도쿄에서 동(東)자를, 다카라즈카(宝塚)에서 보(宝)를 끌어내 ‘동보’(東宝)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도 고바야시 이치죠의 생각은 거꾸로 움직였다. 먼저 도쿄, 오사카 등을 중심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 영화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런 다음 배급회사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영화 제작사를 만들었다. 

역세권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간파한 것도 고바야시 이치죠였다. 1920년 한큐 우메다역에 일본 최초로 철도역과 연계된 한큐 백화점을 열었다. 지금이야 흔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념이었다. 교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말에 전철을 타고 도심으로 쇼핑하러 오면서 새로운 소비패턴이 형성됐다. 
 
비즈니스 호텔 개념 처음으로 선보여
고바야시 이치죠가 처음 고안한 것 중엔 비즈니스호텔도 있다. 그 1호가 신바시 다이이치 호텔(新橋第一ホテル)이다. 이 호텔이 개업한 건 1938년이다. 당시 호텔이라 하면, 부자들만 이용한다는 제국호텔(帝国ホテル)이 최고로 꼽힐 때였다. 하지만 제국호텔은 이용료가 너무 비쌌다. 

예를 들면 오사카에서 도쿄로 출장가는 사업가가 묵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고바야시 이치죠는 출장 경비로 사용할 수 있는 호텔을 만들자는 발상이었다. 방이나 욕조 등 시설을 조금 작게 꾸며 왼전 냉방 시설을 갖췄다. 당시 제국호텔의 객실 가동률이 평균 50% 정도인 반면, 다이이치 호텔은 항상 90%에 이르렀다. 이렇게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대중호텔이 탄생했다.  

이렇듯 비즈니스에 새로운 개념을 내놓은 고바야시 이치죠는 1934년 한큐 사장에서 물러나 도쿄전력에 스카우트됐다. 방만한 경영에 빠진 도쿄전력의 경영을 재건하고는 1940년엔 각료에도 참여해 내각상공대신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1957년 1월 사망하면서 “다카라즈카 가극단과 프로야구팀은 절대 팔지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미술 수집가와 다인(茶人)으로도 유명하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큐의 명성은 많이 빛이 바랬다. 하지만 세상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았던 고바야시 이치죠의 새로운 비즈니스 개념만큼은 훌륭한 사례로 기록되고,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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